# 110
어제보다 나은 오늘 (6)
기적이 진아, 진우 남매를 바라보며 말했다.
"체면 생각하지 마시고 조금 뻔뻔해지는 것은 어떨까요? 여기 있는 손주들을 위해서요."
"손주들을 위해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손주들 앞에서 철옹성 같던 남중단의 마음도 조금씩 금이 가고 있었다, 기적은 그 틈새를 파고들었고.
"네. 손주들을 위해서요. 빨리 쾌차하셔서 손주들 학비도 벌고, 용돈도 줘야 하잖아요."
결국 남중단도 마음을 고쳐먹었다.
"폐를 끼쳐도 될지 모르겠네."
"폐라니요, 저도 바라는 바니까 그러세요. 저 거짓말 안 합니다."
남중단은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모습을 본 진아, 진우 남매는 서로를 바라보며 밝게 웃었고, 기적 역시 미소를 머금고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동시에 기적은 다시 한 번 느꼈다, 바로 이러한 뿌듯함이 물리치료사 이기적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장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서 남중단이 움직였다. 주머니에서 작은 손지갑을 꺼낸 그녀는 꼬깃꼬깃한 5천 원짜리 지폐를 꺼내 기적에게 내밀었다.
"이걸로 음료라도 하나 사 먹어요."
기적은 깜짝 놀라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냉장고에 음료수 많습니다."
그러나 남중단은 재차 돈을 내밀었다.
"괜찮으니까 받아요. 내가 미안해서 그래. 이것도 안 받으면 내가 미안해서 여기 다시 못 와."
"……."
기적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쭈뼛거렸다. 돈을 받자니 할머니의 쌈짓돈을 받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고, 거절하자니 할머니의 마음을 무시하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 기적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남중단은 기적의 주머니에 억지로 돈을 집어넣었다.
"받아,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해."
"그럼 잘 받겠습니다. 맛있는 거 사 먹을게요."
실랑이는 거기까지.
남중단은 몸을 일으켜 세웠다.
"미적대지 말고 이만 가야지. 내일 봅시다, 선생님."
"네, 살펴 가세요."
남중단은 기적의 인사에 무심한 듯 손을 들어 보였고, 그대로 센터를 빠져나갔다. 그러자 진아, 진우 남매 역시 기적을 향해 공손히 인사를 해 보인 뒤, 황급히 할머니를 따라나섰다.
"흐음……."
홀로 남은 기적은 한참이나 문 쪽을 응시하다 이내 주머니에 손을 넣어 몇 번이나 접힌 5천 원짜리 지폐를 만지작거렸다.
'5천 원이라…….'
본래 가격인 10만 원에 비하면 별것 아닌 돈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 돈을 건넨 사람의 마음 때문일까? 기적은 그 돈이 10만 원보다 훨씬 값어치가 있다고 느꼈다.
'어쩌면 이건 누군가의 100만 원일지도 모르는 돈이니까. 이 돈 정말 값어치 있게 써야겠어.'
작지만 큰돈. 절대 허투루 쓰지 않겠다. 기적이 이렇게 다짐할 때였다.
문득 문이 열리며 사람 하나가 센터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센터를 나갔던 남매 중 누나, 하진아였다.
"안 가고 왜 다시 왔어요? 뭐 놓고 간 거 있어요?"
"아니요. 놓고 간 게 아니라…… 요 근처에서 친구를 만나기로 했는데 잠깐 시간이 남아서요. 조금 앉아 있다 가도 될까요? 밖이 너무 더워서요."
밖을 가리키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드는 하진아를 보며 기적은 피식 웃었다. 한 사람 더 있다고 실내가 더워지는 것도 아니고 매몰차게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래요, 거기 앉아서 쉬다 가요."
허락을 받은 하진아는 소파에 앉았고, 기적은 자리에 앉아 통증 컨트롤에 관한 전문 서적을 펼쳤다. 그때였다.
"선생님, 감사해요."
난데없는 하진아의 말에 기적은 다시 서적을 덮었다. 어쩐지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뭐가요?"
"저희 할머니 무료로 치료해 주셔서요. 그리고 안 아프게 해 주셔서요."
"에이, 그거야 65세 이상 이벤트니까 그런 거고, 또 할머니 치료하다 보니 나도 배우는 게 많아서 그러기로 한 거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 말에 하진아가 일순 당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에이, 그런 거 아니잖아요. 저도 이제 중 3이거든요? 알 거 다 알아요. 세상천지에 그런 말도 안 되는 혜자 이벤트가 어디 있어요? 저희 형편이 힘들다는 거 눈치채셨죠? 그래서 무료로 해 주기로 하신 거죠?"
기적은 잠시 벙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고민하는 사이, 하진아가 말을 이었다.
"걱정 마세요. 저 그런 걸로 상처 안 받아요. 그런 거로 상처받으면 상처받을 일이 너무 많아요. 그냥 감사하다는 말씀 드리고 싶었어요."
하진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얼굴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모습이 왜 그렇게 안쓰럽게 느껴지는 건지…….
기적은 좀처럼 마땅한 말이 생각나지 않아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 하진아에게 어정쩡한 위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느낀 탓이었다.
"……."
이어지는 침묵 속에서 하진아는 번뜩 정신을 차렸다. 자신이 쓸데없는 말을 떠들었다는 것을 느낀 것이었다.
'어? 내가 왜 이러지?'
철이 들고 난 이후로는 좀처럼 속마음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그녀였다. 이런 이야기를 남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웠으니까.
상처를 받을까 미리 마음에 철벽을 치는 것이다. 그런데 왜일까? 오늘 처음 보는 기적 앞에서 그녀의 마음속 벽은 너무도 쉽게 무너지고 있었다.
한참을 곱씹고 있던 하진아가 입을 열었다.
"선생님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요."
"좋은 사람? 내가?"
기적이 당치 않다는 듯 손을 저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 자신은 좋은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너희 할머니 같은 분이야말로 좋은 사람이지. 나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야."
다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스스로의 평가와는 별개로 누군가가 자신을 좋게 봐 준다는 것은 분명 즐거운 일이었다.
"할머니는 당연히 좋은 분이죠. 그런데 선생님도 좋으신 분 같아요. 아무튼 저는 이만 가 볼게요. 이제 약속 시간이 돼서요."
자리에서 일어난 하진아는 인사를 건넨 뒤 몸을 돌려 센터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며 따뜻한 바람 한줄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적당한 온기를 지닌 그 바람은 문 앞의 하진아를 스치고 들어와 기적의 주변을 한 바퀴 쓸고 지나갔다.
따뜻하게 불어오는 훈풍 앞에서 기적과 하진아의 마음 또한 따뜻해지고 있었다.
* * *
힐링 센터는 날이 갈수록 성장세를 더해 갔다. 오픈한 지 3주도 지나지 않아 목표였던 회원 수 50명을 달성한 것이다.
늦은 저녁.
기적이 환자의 치료를 끝내고 회원 가입을 받자 기다렸다는 듯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올라가는 인지도]의 목표를 달성했습니다.
-보상으로 7,80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보상으로 레벨 업 확정권 한 장이 주어집니다.
퀘스트를 완료했고 그에 따른 보상이 주어진다는 메시지였다. 다량의 포인트를 받은 기적은 곧바로 그 포인트와 확정권을 투자해 레벨 8에 머물던 매직 아이 스킬을 단숨에 레벨 10까지 끌어올렸다. 힐링 센터의 성장과 함께 기적 또한 한 단계 성장한 것이다.
"많이 좋아지기는 했는데…… 이거 너무 힘든데?"
퀘스트를 달성한 날, 기적은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왜 퀘스트의 목표가 회원 수 50명이었는지를 말이다.
회원 수가 50명이 되고 그 환자의 재방문율이 워낙 높다 보니 이제 혼자서 감당하기가 힘들어진 것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쉴 틈 없이 일해야 하는 수준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일하는 시간보다 쉬는 시간이 훨씬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적이 곤란하다고 느낀 것은 회원들이 몰려든 탓이었다. 점심시간과 저녁 시간 식당에 손님들이 몰리는 것처럼 힐링 센터 또한 오후 3시쯤과 퇴근 시간에 환자들이 몰리는 것이다.
2명까지는 기적도 잠시 기다려 달라고 양해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3명이 몰려들면 정말 난감했다. 단순 계산으로 30분씩만 잡아도 마지막에 온 1명은 고스란히 1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약제를 해 봤지만……."
고민 끝에 기적이 내린 답은 예약제였다. 예약제를 통해 이러한 쏠림 현상을 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약제를 실시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대부분이 퇴근 시간 이후에 치료를 받길 원했기 때문에 6시 이후에만 사람이 몰리고, 6시 이전 타임은 원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보니 전체적인 회원 숫자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추가 인력을 구해야 하나?"
하지만 기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상황에서 추가 인력을 구한다고 해도 일이 해결될지는 미지수였다.
지금 회원들은 대부분 기적을 보고 찾아오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케어를 받으라고 해도 회원들이 이에 응할 확률은 그리 높지 않았다.
"어쩐다?"
기적이 컴퓨터 마우스를 딸깍거리며 일자리 사이트를 확인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이 나타났다.
"실장님, 뭘 그렇게 보고 계세요?"
활기찬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수정이었다. 최근 그녀의 센터 방문은 점차 잦아지고 있는 추세였다.
"어? 수정 샘! 어서 와요. 연락도 없이 어쩐 일이에요?"
"오늘 교육하는 날이잖아요. 그래서 기왕 늦은 김에 실장님 끝날 때를 기다렸다가 저녁이나 먹을까 하고요."
"아, 오늘 교육 있는 날이었군요. 그래요, 그럼. 저녁 같이 먹어요."
"그런데 실장님 뭐 보고 계시는 거예요? 표정이 꽤 심각하시던데?"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수정이 모니터를 살피며 물었다. 기적은 모니터를 수정 쪽으로 돌리며 이에 답했다.
"요즘 센터에 오랜 시간 대기하는 사람들이 자꾸 생겨서요. 추가 인력을 1명 더 구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중입니다. 구직하는 사람들 중에 괜찮은 사람 있는지 확인하고 있었어요."
그 말에 수정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힐링 센터가 벌써 그 정도예요? 오픈한 지 3주도 안 돼서 대기자 발생? 그러면 추가 인력 뽑아야죠, 대기가 너무 길면."
"음…… 그런데 회원들이 새로운 치료사에게 받으려고 할지 모르겠어요. 지금은 대부분 저를 보고 오는 분들이라……."
"그건 그러네요. 음…… 그러면 이렇게 하시는 건 어때요? 가격에 차등을 두는 거예요. 실장님은 비싸고 다른 선생님은 조금 싼 가격에 환자를 볼 수 있게요. 그러면 사람들도 좀 분리가 되지 않을까요? 미용실에서는 그렇게 하거든요. 똑같은 커트를 해도 원장님한테 받으면 3만 원, 실장급한테 받으면 2만 5천 원, 이런 식으로요."
"나쁘지 않은데요?"
기적의 반응을 보이자 수정이 신이 나서 말을 보탰다.
"너무 돈으로 하기는 그러니까 일단 실장님이 상담을 하시고 증상을 봐서 어려운 환자는 실장님이 보시고, 그렇지 않은 환자는 다른 선생님께 돌리는 거죠. 가격이 싸고 충분히 치료 가능하다고 하면은 회원들도 수긍하지 않을까요?"
"그거 괜찮은 생각이네요. 당장 구인 글 올려야겠다."
기적은 즉시 행동에 나섰다. 구인란에 접속해 모집 공고 글을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
"상호명 힐링 센터…… 주소는 서울특별시……."
빈칸이 하나하나 채워져 갔고,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모집 공고 글이 완성되었다. 등록 버튼을 누르며 기적이 말했다.
"좋은 사람이 지원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우려 섞인 기적의 말에 수정이 걱정 말라는 듯 말했다.
"분명 좋은 사람이 지원할 거예요. 걱정 붙들어 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