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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108화 (108/205)

# 108

어제보다 나은 오늘 (4)

* * *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시간을 지키는 일은 굉장히 중요하다.

무슨 말이냐면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정해진 시간 문을 닫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렇게 해야만 고객에게 신뢰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업시간을 확인하고 방문했는데, 문이 닫혀 있다면 그것만큼 화나는 일은 없으니까.

제아무리 가게가 마음에 든다고 하더라도 그런 일을 한 번 겪고 나면 다음 방문이 꺼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봤을 때 기적은 아주 성실한 사업가라 할 수 있었다. 아직 1주일밖에는 되지 않았지만 단 1분도 시간을 어기지 않았으니 말이다.

조금은 마음이 풀어질 수 있는 토요일.

기적은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센터를 오픈했다. 그리고 여유 있게 영어 강의를 들으며 환자를 기다렸다.

"여기서는 과거 분사가…… 그렇구나."

외국어 영역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한다는 매직 브레인의 설명이 괜한 것이 아니었는지 기적의 영어 실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

시험 삼아 해 본 논문 번역 속도도 엄청나게 빨라졌고, 일상생활 대화도 막힘없이 튀어나왔다.

"토익이나 엘츠 같은 시험 한번 봐 볼까? 점수가 얼마나 나올지 궁금한데."

동영상 강의 하나를 끝까지 들은 기적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창문을 통해 바깥의 날씨를 살폈다.

"날씨 좋네."

9월의 날씨는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하늘은 푸르렀고, 햇살은 적당히 따스해서 오랫동안 지켜보고 있어도 전혀 싫증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커피를 내린 기적은 커피를 마시며 9월의 경치를 한없이 감상했다.

"슬슬 올 때가 된 것 같은데……."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감상에서 깨어난 기적이 시간을 확인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오늘의 첫 손님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그 손님을 확인한 기적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기다렸던 사람들이 치료실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왔구나!'

치료실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3명이었다. 어제 보았던 남자 아이와, 그 누나로 보이는 여학생, 그리고 그들의 할머니로 보이는 노인이 그 주인공이었다.

기적은 반갑게 일행을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어, 어제 왔던 친구네?"

그러자 남자 아이가 멋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어제 전화로 10시에 오겠다고 예약한 게 저희 누나에요."

"그래? 그건 몰랐네. 그럼 이쪽이 할머님?"

기적은 그렇게 말하며 할머니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무엇이 걸리는 것일까? 할머니는 어딘가 불안한 시선으로 연신 주변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마음에 걸렸던 기적은 할머니를 향해 물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조금 쉬었다가 아픈 곳 좀 봐 드릴게요."

그러자 할머니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가 뭐 하는 데라요? 애들이 가자고 해서 뭣도 모르고 왔는데…… 아픈 곳을 봐 줘? 여기 혹시 병원이라요?"

아무래도 할머니는 어디에 가는지도 모르고 이곳에 끌려온 모양이었다. 기적은 그런 할머니에게 이곳이 어디인지를 설명해 주었다.

"병원은 아니고요. 저는 물리치료사인데요. 할머님이 많이 아프다고 하셔서 아프지 않게 해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그 말에 할머니는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는 곧 손사래를 치며 말을 이었다.

"나 안 받을라요. 이런데 요금 엄청 비싸잖아. 하이고, 30분에 10만 원? 일 없어요, 일 없어."

할머니는 당장이라도 돌아갈 기세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남매가 잽싸게 나서 그런 할머니를 말렸다.

"할머니, 아니에요. 65세 이상에 한해서 한 번은 무료로 해 주신다고 하셨어요."

"그래, 할머니. 일단 한번 치료받아 봐. 힘들게 왔는데 그냥 돌아가면 어떻게 해."

그러나 할머니의 태도는 요지부동이었다.

"느그들 공짜 좋아하면 안 된다. 다 바라는 게 있어서 공짜로 해 주는 거지. 그냥 해 줄 리가 있나? 괜히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신세를 왜 져? 됐으니까 그냥 돌아가자."

그렇게 말한 할머니가 두 남매 사이를 지나쳐 센터를 향해 걸어 나갔다. 바로 그때였다, 주먹을 꽉 움켜쥔 남자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할머니가…… 할머니가 너무 아프니까 그렇잖아. 우리는 그냥…… 할머니가 안 아팠으면 좋겠어. 그래서 요즘 누나하고 엄청 열심히 알아봤단 말이야."

그 말에 할머니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고, 여학생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래, 할머니. 나랑 진우가 엄청 열심히 알아봤어. 우리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받아 봐 줘. 진짜 열심히 알아봤어. 우리가 후기도 다 찾아봤는데, 여기 선생님 치료 엄청 잘하신대. 아픈 사람들 싹 낫게 만들어 주신대."

할머니를 생각하는 손주들의 뜨거운 마음은 얼음장처럼 굳어 있던 할머니의 표정을 단번에 녹여 버렸다.

"너희들……."

할머니의 주름진 눈가가 살짝 일그러졌다. 인상을 쓴 것이 아니었다. 자신을 생각하는 손주들의 따뜻한 마음에 웃음을 지은 것이었다.

무상한 세월에 고생만 하다 보니 이제는 웃는 법조차 잊어버렸지만 그것은 분명한 웃음이었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나갈 것 같았던 할머니가 스르르 몸을 돌렸다. 그것은 단순히 몸을 돌린 것이 아니었다. 마음을 바꿔 치료를 받겠다는 심리적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향해 기적은 종이 두 장을 내밀었다.

"하나는 가입 신청서고, 다른 하나는 진단을 위한 설문지입니다. 치료하는 데 참고해야 하니까 성실하게 작성해 주세요. 치료는 그 다음에 진행하겠습니다."

그렇게 신청서와 설문지 작성이 완료되었고, 기적은 이를 통해 많은 것들을 알 수 있었다.

할머니의 이름이 남정단이라는 것과, 지난겨울 넘어져서 팔에 골절상을 입었다는 사실, 그리고 최근 시도 때도 없는 전신의 통증으로 고생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알 수 있었다.

설문지를 살피다 진단명이 비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기적이 말했다.

"그런데 남중단 님. 손주분들 말로는 병원에 다녀오셨다고 들었는데 진단명을 안 적으셨네요? 하나도 빠짐없이 적어 주셔야 해요."

그 말에 남중단은 조금 곤란한 얼굴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래지 않아 입을 열었다.

"나 사실 병원에 간 적 없어요. 애들이 하도 다녀오라고 하니까 다녀왔다고 한 거지. 뭐 몸 좀 아프다고 죽는 것도 아니고, 이런 것쯤 푹 쉬면 금방 나으니까."

그러나 기적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설문지를 살피던 그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글쎄요. 어쩐지 시간이 지나도 좋아질 질환이 아닌 것 같은데요? 혹시 최근 들어서 통증이 더욱 심해지지는 않으셨나요?"

그 말에 남중단의 얼굴에 자리한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그건 맞아요. 요즘 통증이 심해져서 일도 못 나가고 있어. 일을 해야 저것들 학비 내고 용돈도 줄 텐데……."

기적은 슬쩍 고개를 돌려 입구 옆 소파에 나란히 앉아 해냈다는 표정으로 해맑게 웃고 있는 남매의 모습을 살폈다.

그 모습에서 가정이 불우한 아이들 특유의 그늘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덕분에 기적은 추측할 수 있었다. 힘든 환경 속에서도 할머니가 손주들을 얼마만큼의 사랑으로 키워 왔는지를.

'무슨 사연으로 손주들을 떠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대단한 할머님이네…….'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세 사람을 살피던 기적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할 수 없죠, 뭐. 일단 제가 한번 볼게요. 이쪽 어깨랑 팔이 가장 아프시다고 했죠?"

상황을 정리한 기적이 인정선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댔다. 기적의 치료가 시작되었다.

남중단의 설문지를 보는 순간, 기적은 어제 치료했던 동민철을 떠올렸다. 통증이 발생하기 전 골절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팔과 어깨에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있다는 점 등이 그와 닮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뭔가 달라.'

진단을 해 볼수록 생각이 달라졌다. 통증 포인트를 압박할 때 반응을 보였던 동민철과 달리, 남중단은 중구난방으로 통증을 호소하고 있었다.

더구나 남중단은 통증의 정도가 동민철보다 훨씬 강한 것으로 보였다. 단지 손을 대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통증을 호소한 것이다. 이 정도의 통증을 느끼면서 어떻게 지금까지 버텨 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 이렇게 손만 대도 아프시다는 말씀이시죠?"

그러자 남중단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대답했다.

"그, 그렇다니까요. 엄청 아파요. 아주 칼로 쑤시는 것 같아……."

이에 따라 기적의 생각도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기적은 계속해서 아닐 거라고 스스로에게 세뇌를 했지만 실체 없는 목소리는 계속해서 들려왔다.

-이건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야. 모든 정황들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뭘 고민하는 거야? 이건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잖아. 찌르는 듯한 통증,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소스라칠 정도로 큰 고통, 일정한 패턴 없이 중구난방으로 생기는 통증, 이게 뭘 말하는지 모르겠어?

-이제 그만 받아들여. 계속 그렇게 만져대 봤자 환자만 고통스러울 뿐이야.

이미 답은 나왔다. 하지만 기적이 그 답을 외면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하잖아…….'

앞서도 잠깐 말했지만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은 난치병이다. 명확한 치료법이 없는데다가 엄청난 통증과 싸워야 한다.

심한 경우에는 바람만 불어도 불에 데는 듯한 통증을 느낀다고 하니 그 통증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건강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누구나 똑같겠지만, 이미 70세가 넘은 할머니였다. 더구나 자식에게 케어를 받는 입장이 아니라 오히려 손주 둘을 케어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이라니…… 이건 너무 가혹한 일이었다.

한껏 무거워진 얼굴로 기적이 말했다.

"아무래도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인 것 같습니다."

남중단은 나 아무것도 몰라요, 하는 표정이었다.

"복합…… 무슨 증후군? 그게 뭣이여?"

기적은 난감했지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기로 했다.

"말 그대로 여러 부위에 통증이 발생하는 증상인데요. 이게 원인이 불분명해서 치료하기가 쉽지 않아요……."

비로소 남중단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기적의 말을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치료하기가 어렵다는 말 만큼은 이해한 것이었다.

사실 꼭 기적의 말 때문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증상이 평범하지는 않다는 것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만큼 통증이 심했으니까. 아니라면 좋겠지만 보통의 병이 아니라는 것쯤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큰 병이었구먼……. 그럴 줄 알았지……. 내 그럴 줄 알았어……."

남중단은 침음을 흘리며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뿌듯한 얼굴로 앉아 있는 손주들이 있었다. 큰 병이라고 하니 아무래도 손주들이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다만 좌절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은 대표적인 난치성 질환이었지만, 그렇다고 전혀 좋아지지 않는 병은 아니었으니까. 완치까지는 어렵더라도 관리만 잘 이루어진다면 좋아질 여지가 충분한 병이었다.

더구나 기적이 누구인가? 물리치료사였다. 그것도 손대는 족족 환자를 낫게 만드는 기적의 물리치료사. 두 손만 있다면 그에게 불가능이란 없을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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