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2
새로운 도전 (5)
* * *
"실장님, 이쪽입니다."
기적이 안으로 들어서기 무섭게 한쪽에서 아는 얼굴이 손을 들어왔다. 최병렬 행정국장이었다. 아무래도 문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목소리를 들은 기적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빠르게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일찍 온다고 왔는데, 더 일찍 오셨네요?"
"허허, 목마른 사람이 우물판다고 급한 쪽이 먼저 움직여야죠. 안 그렇습니까, 원장님?"
그 말에 최병렬의 옆쪽에 앉아 있던 40대 초반 정도의 남자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갑습니다, 최병훈 원장입니다."
"아, 네. 어?"
고개를 끄덕이던 기적이 순간 고개를 갸웃했다. 원장이라는 사람의 이름을 듣는 순간 뭔지 모를 위화감을 느낀 것이다.
"최병훈 원장님…… 그리고 최병렬 국장님?"
최병렬이 껄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 눈치가 빠르시네. 맞습니다. 여기 최 원장이 제 친동생입니다. 제가 형이고요."
"아아~ 어쩐지."
기적이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최병렬이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들었다.
"뭐 좀 마시면서 이야기할까요? 실장님은 뭐 드시겠습니까?"
"저는 미숫가루요. 찬 걸로."
미숫가루라는 말에 최병렬과 최병훈이 약속이라도 한 듯 헛웃음을 터뜨렸다. 설마, 기적이 미숫가루를 시킬 줄은 몰랐다는 표정이었다.
"요즘에도 미숫가루 드시는 분이 있군요? 그리고 찬 거요? 차가운 것도 아니고, 찬 거?"
기적은 어색하게 웃으며 저 멀리 메뉴판을 가리켰다.
"들어오면서 보니까 미숫가루 판매 중이라고 쓰여 있더라고요. 날씨도 덥고 옛날에 어머니가 타 주시던 생각도 나서요. 갑자기 먹고 싶더라고요?"
"하하, 그런가요? 생긴 거랑 다르게 상당히 클래식한 감성이네요? 갑자기 나도 미숫가루가 먹고 싶어지네."
그리고 미숫가루가 먹고 싶어진 이는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몸을 돌리는 최병렬을 향해 최병훈이 어쩐지 얄미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 미숫가루 한 잔 추가!"
잠시 후.
세 사람은 세 잔의 미숫가루를 앞에 두고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래서 하실 이야기란 게 뭔가요? 자꾸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일단 나오기는 했습니다만은……."
기적의 말에 최병렬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병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해 실장님이 부담스러워 하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실장님 연차에 실장 자리에 올랐다는 것은 그만큼 병원에서 대우를 해 줬기 때문이라는 것 정도는 우리도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도 깔끔하게 포기를 했습니다. 이미 재활 치료센터의 센터장으로 일할 분도 계약을 마친 상태고요."
"계약을 마치셨다고요? 그러면 왜 저를?"
기적이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이미 계약이 끝났다면서 자신을 왜 보자고 한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든 것이다.
그런 그를 향해 최병렬이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겠습니다. 저희 지인들이 명성 병원을 주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 명성 병원을 벤치마킹하기 위해서요. 일종의 스파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습니다. 실장님이 병원을 그만두셨다고요. 아까는 혹시나 안 나오실까 싶어서 모르는 척했는데…… 사실입니까?"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고, 최병렬이 말을 이었다.
"그 말을 듣고 여기 원장님하고 긴급회의를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죠."
최병렬은 목이 마른지 미숫가루를 한 모금 들이켰다.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갈 때쯤 그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희가 이 근처에 임대한 건물이 하나 더 있습니다. 건물 전체를 임대한 것은 아니고요. 상가 하나를 인수한 건데 평수가 제법 됩니다. 마침 전 세입자랑 계약이 끝난 참인데, 실장님이 이곳에서 센터를 운영해 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저보고 센터를 운영하라고요? 그게 정확히 무슨 말씀이신지…… 결국은 똑같은 말처럼 들리는데요."
그 말에 최병렬은 고개를 저었다.
"오해를 하시는군요. 말 그대로 실장님이 운영을 해 보시라 이 말입니다. 저희 병원 간판을 달 필요도 없고, 월세를 낼 필요도 없고, 저희의 간섭을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실장님 마음 가시는 대로 운영을 해 보시라 이 말입니다."
너무나도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의심이 됐다.
"그런 말씀을 하셔도…… 솔직히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자선사업이라도 하실 생각이신가요?"
"그럴 리가요. 물론 저희도 얻는 게 있어야지요. 8 대 2. 센터에서 나오는 수익을 8 대 2로 나누는 겁니다. 실장님이 8, 저희가 2로요. 어떻습니까? 센터를 운영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
최병렬이 그렇게 물었을 때였다.
-보상으로 새로운 도전을 할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보상이 주어진다는 메시지였다.
사실 기적은 최병렬의 제안을 듣고 이건 사기가 아닐까 우려했었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만큼 최병렬의 제안은 자신에게 너무 유리해 보였으니까. 총 10의 수입 중 2를 가져가서 비싼 임대료나 뽑을 수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퀘스트 보상이라는 시스템 메시지를 들은 뒤에는 불안감을 덜 수 있었다.
시스템이 보상이라는 메시지를 던진 이상 최병렬의 제안이 사기일 리는 없을 테니까. 그리고 이어진 최병렬의 설명은 남은 우려를 떨쳐 버리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임대료가 월세로 치면 월 1,000만 원입니다. 단순 계산으로 실장님이 월에 5,000만 원만 수익을 내 주시면 저희는 최소 본전을 뽑게 되는 거죠. 더 쉽게 말씀해 드릴까요? 30분 기준으로 15만 원을 받는다고 계산해 보겠습니다. 하루에 10명만 받아도 150만 원이지요? 이걸 한 달로 단순 환산하면 4,500만 원입니다. 뭐 주에 하루 이틀 쉰다고 해도 얼마든지 2,500만 원 이상은 벌게 됩니다. 게다가 건물은 넓습니다. 실장님이 혼자서 일할 필요가 전혀 없다는 말입니다. 저희는 실장님이 특수치료실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환자를 유치할 것이고, 최소 1억 원 이상의 수익을 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 그런 거군요. 그런데 환자가 매일 10명이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합니까? 환자 10명이 말처럼 쉽겠습니까? 병원과 별개로 운영하는 센터는 보험도 적용이 안 될 텐데요."
그에 대한 대답은 병원장 최병훈으로부터 나왔다.
"실장님 실력이라면 10명 정도는 충분히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습니다. 뭐 정 안 되면 저희 병원에서 실장님의 센터를 추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최병렬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물론 실장님이 원하지 않는다면 병원에서는 일절 관여를 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최소한의 보험으로 월 500만 원은 보장받아야겠습니다. 저희도 마냥 손해만 볼 수는 없으니까요."
잠시의 시간 차를 두고 최병렬이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실장님에게 밑지는 일은 아닐 겁니다. 센터를 차리는 비용이나 보증금 같은 것은 일절 쓰실 필요가 없으니까요. 어떻습니까?"
기적의 마음은 한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그리고 기운 마음을 확실히 하기 위해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이 정도로 불리한 계약을 제시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최병렬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그 질문에 답했다.
"저는 자선사업가가 아닙니다. 이익을 쫓는 사업가입니다. 애초에 불리한 사업에 투자를 할 이유가 없지요. 이 계약이 저에게도 좋은 계약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에 실장님께 계약을 제시한 겁니다. 실장님의 능력, 저는 그걸 믿었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고개를 주억거린 기적은 시원한 미숫가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말했다.
"좋습니다. 그 계약,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새로운 도전을 해 보겠다고.
양재 역 7번 출구에 위치한 작은 카페 안, 기적의 새로운 도전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기적은 최병렬이 전해 준 계약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계약서는 몇 페이지에 걸쳐 꽤나 많은 조항들이 적혀 있었지만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1. 갑(기적)은 계약 기간 동안 을(최병렬)이 제공하는 건물의 소유권을 가진다.
2. 계약 기간은 2년으로 한다. 단 상호의 합의하에 기간을 연장하거나 단축할 수 있다.
3. 갑은 매달 을에게 총 수익의 20%를 지급한다. 만약 수익이 적더라도 최소 500만 원을 지급해야 한다. 단 첫 세 달 간은 500만 원 지급 조항을 예외로 한다.
4. 을은 갑의 센터 운영에 일절 관여를 할 수 없다.
5. 갑은 센터의 인테리어 작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도움을 준다.
특별히 독소 조항이라 할 것은 없었기에 기적은 고민 없이 사인을 하고 온 참이었다.
사실 그는 계약에 대해서 잘 몰랐다. 계약이라고 해 봤자 부동산 계약을 한 것이 전부였으니까. 경계심이 드는 것이 당연했다. 이런 종류의 계약에는 항상 사기의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는 별다른 고민 없이 계약서에 사인을 할 수 있었다. 퀘스트 보상이라는 메시지 덕분이었다.
"마침맞게 이런 계약이라니…… 정말 잘됐어. 돈이 없어서 어떻게 센터를 차릴지 고민이었는데."
많은 선택지를 두고 고민한다고 했지만 기적의 마음은 이미 센터를 차리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거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이거였다. 새로운 유형의 환자를 치료해 보겠다는 것, 병원에서 만나는 신경계 환자들 말고도 근골격계, 혹은 전혀 다른 유형의 환자를 만나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뭐…… 물리치료사가 운영하는 센터라는 한계가 있겠지만……."
한국의 현행법상 물리치료사가 단독 개업해서 의료 행위를 하는 것은 엄연한 불법이었다. 물리치료사가 의사에 준하는 공부를 하는 미국이라면 몰라도 3, 4년 교육을 받는 한국의 형편상 이는 당연한 규정이었다.
당연히 치료라는 말도 쓸 수 없고, 환자라는 말도 쓸 수 없다. 환자를 상대로 치료 행위를 하면 의료법 위반이기 때문이다.
다만 꼼수라고 해야 할까? 센터를 차리고 운영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환자라는 말 대신 회원이라는 말을 쓰고, 치료라는 말 대신 통증을 개선하기 위한 운동을 시킨다고 하면 합법이었다.
이렇게 생각하면 쉽다. 의료 센터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피트니스 센터를 차린다고 말이다. 개인 PT를 하듯이 회원을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물론 병원도 아닌 곳에서 회원을 끌어모으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실제로 많은 물리치료사들이 센터를 차리지만 대부분의 센터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진다. 기적 또한 1년 전쯤 센터를 차렸다가 쓴맛을 봤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이 있었다. 레벨 업 시스템이 있으니까. 시스템과 함께라면 어떤 난관도 헤쳐 나갈 자신이 있었다.
주먹을 움켜쥔 기적은 조금 전 최병렬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당장 다음 주부터 인테리어 설계를 시작하겠다고 했지? 그리고 나도 거기에 참가해 달라고 했고. 그러니까 내일 모레부터 시작인 건가?'
당초 보름으로 세웠던 휴가가 오늘을 포함해 이틀로 줄어들었다. 하지만 조금도 아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벌써 이번 주를 넘어 다음 주를 향해 가고 있었으니까. 새로운 도전이라는 기대감이 그를 떨리게 만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