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00화 (100/205)

# 100

새로운 도전 (3)

* * *

"실장님, 안녕하세요?"

"실장님……? 뭐지?"

치료실로 돌아가는 길.

기적은 사람들의 인사도 듣지 못할 정도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미리 마음을 먹었다고는 해도 이 병원을 떠난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결정이었다.

그런데 정신없이 걸어가는 그를 붙잡는 목소리가 있었다.

"어이어이! 이기적 실장, 어딜 그렇게 정신 줄을 놓고 걸어갑니까?"

겨우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돌려보니 명석한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기적은 앞을 막고 있는 석한을 향해 손을 저었다.

"비켜 주실래요? 굳이 명 닥터까지 나서 주지 않아도 충분히 심란하니까."

말 그대로였다. 기적은 석한과 말다툼을 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다음 말을 듣기 전까지는 분명 그랬다.

"뭐가 이렇게 예민해? 꼭 퇴사 권고라도 받은 사람 같네?"

하지만 말을 들은 이후에는 생각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얼굴을 굳힌 기적이 말했다.

"너 설마……?"

석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네 생각이 틀리지 않다고 말이다.

기적은 순간적으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주먹의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말했다.

"너 내가 그렇게 신경 쓰이냐? 내가 그 정도로 무섭고 겁이 나?"

의미심장한 어조와 말들이 석한의 심기를 자극했다.

"뭐? 너 지금 뭐라 했냐? 뭐라고 지껄였어? 엉?"

얼굴을 빨갛게 붉힌 석한이 기적의 멱살을 잡으며 으르렁거렸다. 그러나 기적은 조금의 동요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 더러운 수작을 부릴 만큼 내가 그렇게 신경 쓰이냐고 물었다. 콤플렉스 덩어리 같은 놈아."

그렇게 말한 기적은 차가운 냉소를 덧붙이는 것으로 석한을 완전히 달아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석한이 행동을 취하기도 전 기적이 재차 말했다.

"그리고 이것 좀 놓는 게 어때? 사람들이 다 보고 있는데 너의 그 잘난 이미지 괜찮겠어?"

그제야 석한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화가 치밀었지만 하는 수없이 잡은 손에 힘을 풀 수밖에 없었다. 그는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잘리는 주제에 무슨 말을 하는 거냐? 콤플렉스? 의사인 내가 물리치료사인 너에게 콤플렉스를 느껴?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다."

기적은 말려 올라간 옷을 툭툭 턴 뒤 말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럼 나한테 관심 좀 꺼 줄래? 사람이 언행일치가 돼야 하잖아?"

"으으으……."

석한은 분하다는 듯 이를 갈았지만 멀어져 가는 기적을 붙잡지는 못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직성대로 하기에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실업자 주제에…… 입만 살아서는…….'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자신은 의사고 기적은 물리치료사였다.

자신은 이 병원에 남았고, 기적은 이 병원을 떠나야 하는 입장이었다. 왜 자꾸 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들 수고 많았습니다."

오후 5시.

기적은 팀원들을 한곳에 모았다. 가끔 있는 일이었기에 팀원들은 별생각 없이 소집에 응했다.

"실장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팀원들의 분위기는 좋았다. 퇴근을 앞둔 기분 좋은 흥분감이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어진 기적의 말은 좋았던 분위기를 단숨에 다운시켜 버렸다.

"저 아무래도 이번 달을 마지막으로 병원을 그만둬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말씀을 드리려고 이렇게 자리를 만들었습니다."

"네? 그게 무슨……?"

"말도 안 돼요. 그만두신다니요? 농담하시는 거죠?"

"왜요? 실장님이 원해서 그만두시는 거예요?"

기적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글쎄요. 자의 반, 타의 반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 대답은 사람들을 완전히 충격에 빠지게 만들었다. 말을 잃은 모두를 대신해 기적이 말했다.

"아무튼 그렇게 됐습니다.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선생님들을 못 보게 되는 건 좀 많이 아쉽네요.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데 말입니다."

아쉬운 표정으로 기적은 그렇게 말했다. 덕분에 사람들은 실감할 수 있었다. 자신들의 앞에 이별의 순간이 다가왔다는 것을.

"……."

분위기가 또 한 번 급변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의 얼굴에서 화가 묻어났다면 지금 그들의 얼굴에서는 진한 아쉬움이 묻어나고 있었다.

"실장님…… 너무 아쉬워요. 실장님 밑에서 정말 많이 배웠는데……."

"정말 많이 믿고 의지했는데 떠나신다니…… 이렇게 갑자기 가 버리시면 저희는 어떻게 해요."

물론 아쉬운 것은 기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도 가급적이면 남고 싶었습니다만…… 병원의 방침이 그런 걸 어쩌겠습니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죠."

슬프지만 사실이었다. 모두는 그 말에 반박을 하지 못했고, 기적은 애써 밝게 웃으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오늘 당장 그만두는 것도 아니니까요. 일단은 다들 퇴근합시다."

다음 날.

기적은 정식으로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냥 기다리며 사직 권고를 받는 것도 방법이었지만, 구질구질하게 기다리는 것보다는 먼저 사직서를 내는 것이 조금 더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그런 마음을 안 것일까? 김준명은 빠르게 기적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 이번 주까지만 일하는 것으로 일정을 조정했다. 김준명은 아무래도 기적을 빠르게 병원에서 정리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적은 기꺼이 이에 응해 주었다. 명의진이 없는 명성 병원에 대한 미련이 손톱만큼도 없었기에 미적거릴 이유는 없었다.

기적은 신변 정리를 시작했다. 담당하는 환자들에게 병원을 그만두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린 것이다.

"제가 이번 주까지만 일하게 됐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부득이 다른 선생님에게 치료를 받으셔야 할 것 같아요."

기적의 말에 환자들은 대부분 대동소이한 반응을 보였다.

"선생님 그만두시면 제가 여기 올 이유가 없는데요. 어디 다른 병원으로 옮기세요?"

"글쎄요. 일단은 조금 쉴 생각입니다."

"선생님, 병원 옮기시면 꼭 연락 주세요. 저 꼭 그리로 갈 테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기적은 또 팀원들과도 이별을 준비했다. 쉬는 타임이 겹치는 특수치료실 치료사들, 그리고 주호식, 장원호, 최진아 등과 따로 시간을 보낸 것이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보니 금세 그 시간이 다가왔다. 금요일 저녁, 모두와 이별할 그 시간이 말이다.

"실장님, 정말 송별회도 안 하실 거예요?"

"그래요. 송별회라도 하셔야죠. 이대로는 너무 아쉽습니다."

기적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금요일 저녁인데 다들 쉬셔야죠. 조만간에 제가 연락드릴 테니까 그때 모입시다."

기적이 거듭된 송별회 요청을 한사코 거부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자신이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팀원들은 남아서 새로운 실장(아마도 강한수)을 따라야 했다. 그렇다면 떠나는 자신은 조용히 떠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기적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흐흐흑……."

난데없는 울음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돌아갔다. 거기에는 정수정이 있었다.

"아니, 수정 샘, 왜 울어?"

윤세진이 걱정스럽게 묻자, 수정이 겨우 대답을 했다.

"흐흑…… 갑자기…… 실장님…… 흑흑…… 처음…… 흑흐흑 만났을 때가 생각나서…… 흐흐흑……."

이별 앞에서 수정은 떠올린 것이었다. 면접장에서 대일밴드를 내밀던 기적의 모습을, 어깨를 나란히 하며 병원을 출퇴근했던 나날을, 아이스크림을 나눠 들어주던 그 모습을, 영화를 봤던 그날을, 함께 소금을 모으고 별을 봤던 그날을. 그리고 함께했던 모든 순간을.

기적은 까딱했다가는 자신도 분위기에 휩쓸릴 것 같아 일부러 밝은 척을 했다.

"하하, 첫날에 왜 웃었냐고 엄청 뭐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때 말했었죠. 사실 루돌프 같아서 웃었다고. 그런데 선생님, 그거 알아요? 지금도 루돌프처럼 코 빨개진 거?"

어디까지나 분위기를 전환해 보고자 한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수정이 더욱 오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흑, 흑, 흑, 흐흐흐흑……."

어느샌가 각티슈를 들고 온 윤세진이 기적을 향해 눈을 흘기며 말했다.

"실장님, 지금 농담할 타이밍이에요? 가뜩이나 우는 사람을 왜 자극하고 그러세요? 실장님이 수정 샘 책임져요."

기적은 윤세진이 가져온 각티슈를 받아 수정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티슈를 뽑아 수정에게 건넸다.

"좀 닦아요. 화장 다 번졌네……. 아니, 왜 울고 그래요? 우리 영영 못 만나는 거 아니잖아요. 우리 또 만날 거잖아요."

End 가 아닌 And.

기적은 우리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네……."

수정은 휴지를 받아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한 번 터져 버린 눈물은 쉽게 그칠 줄을 몰랐다.

기적은 그런 수정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고마웠다.

정말이지 각박한 요즘 세상이다. 인터넷,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쉽게 사람을 만나지만 또 그만큼 쉽게 이별을 한다.

어떻게 보면 사람들은 이별에 익숙해져 있다. 쉽게 이별을 받아들이고 또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 10년이나 만났던 여자 친구조차 세상 냉랭한 표정으로 이별을 고하지 않았던가?

그에 반하면 수정은 아직 만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가 자신과의 이별을 슬퍼해 이렇게 눈물을 흘려주니 기적으로서는 고마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번이고 티슈를 뽑아 주던 기적이 어느 순간 말했다.

"그냥 조용히 떠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아쉬워서 안 되겠네요. 선생님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저 송별회 해 주실래요?"

수정의 눈물이 기적의 마음을 바꾼 것이었다. 사람들은 기꺼이 참가 의사를 밝혔고, 윤세진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어떻게 보면 실장님도 참 악취미네요? 왜 이렇게 사람들을 울려요?"

그 말에 기적은 떠올렸다. 이 병원에 입사하고 자신이 울게 만들었던 사람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걸음을 걸었던 박부진.

꿈을 향해 던졌던 성우.

위기를 기회로 만들었던 김대규.

평범한 일상을 꿈꿨던 소영이.

시간이 멈추길 바랐던 박현숙과 한남훈.

두 번째 인생을 살게 된 백지훈.

집으로 돌아가길 바랐던 고길자.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염전이라고 말했던 인정선.

아들 앞에서는 슈퍼맨이 되길 바랐던 김중덕.

그리고 수정과 팀원들까지.

기적은 정말 많은 사람들을 웃고 울렸다. 힘들었지만 돌이켜 보면 정말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순간들…….

어쩐지 가슴이 울컥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기적은 애써 그런 감정을 억눌렀다. 스스로 말했듯 end가 아닌 and니까. 자신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러한 스토리를 써 내려갈 테니 말이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기적이 모두를 향해 말했다.

"자, 그럼 송별회 그거 하러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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