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99화 (99/205)

# 99

새로운 도전 (2)

"뭐야, 이게?"

기적은 하도 어이가 없어 그렇게 되물었다.

주말 동안 꽤 많은 숫자의 환자가 넘어와 있었다. 그런데 그 환자의 특이 사항을 적는 란에는 모두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환자의 요청이 있었습니다. 꼭 강한수 선생님이 치료해 주세요!

우연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그러한 요청은 비단 그 환자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으니까. 다음 환자의 요구 사항에도, 그다음 환자의 요구 사항에도 똑같은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지난 주말 동안 넘어온 환자 대부분이 강한수를 원하고 있는데 이게 우연일 수는 없었다. 때문에 기적은 이번 일에 담긴 의도를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나를 배제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전 강한수가 보인 태도도 이해가 됐다. 왜 그가 그리도 기고만장한 모습을 보였는지 말이다. 믿는 구석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기적은 얼마 전 보았던 드라마 속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잘나가던 주인공이 한순간 임원진의 눈 밖에 나 쓸모없는 부서로 강등되고, 회사를 그만두기까지 갖은 수모를 당하는 장면이었다.

당시 기적은 그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능력 있는 주인공이 왜 저런 수모를 받으면서까지 회사에서 버티려고 하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자신에게 벌어지고(아직 확실한 증거는 없지만) 있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버틸 필요가 있을까? 그 질문에 대한 기적의 대답은 'NO'였다.

만약 능력이 없다면 더럽고 치사해도 어떻게든 병원에 남는 게 맞을 거다. 존버라는 말처럼 버티고 버텨야 한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능력이 있었다. 무엇보다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는 레벨 업 시스템이 있었고, 이를 통해 짧은 기간 동안 두 번이나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그 때문에 기적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일이 벌어지면 고민할 것 없이 사직서를 던지겠다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여러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겠지. 김대규 선수에게 연락을 해 보거나, 아니면 행정국장이라는 사람에게 연락을 해 보거나. 그도 아니면…… 완전히 실패했던 힐링 센터를 다시 차려 보거나. 어떤 선택을 해도 나쁘지 않을 거야.'

많은 선택지 중 하나를 선택하면 그만이었다.

복잡한 표정으로 차트를 살피는 것은 거기까지, 어쩐지 마음이 홀가분해진 기적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시간은 8시 57분, 앞일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하루 일과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같은 시각 재활의학과 과장실.

그곳에는 2명의 남자가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1명은 이 방의 주인이자 임시 병원장을 맡게 된 김준명이었고, 다른 1명은 같은 과 부하 직원 명석한이었다.

"과장님, 임시 병원장이 되신 것 축하드립니다. 임시 병원장이 저희 재활의학과에서 나와서 참 다행입니다."

그 말에 김준명이 과장된 동작으로 손을 저었다.

"이 사람아, 민망하게 축하는 무슨. 다 명 닥터 덕분인데, 뭘 그래."

"제 덕분은요. 저는 그냥 과장님이 유능하다고 이사장님에게 추천을 했을 뿐입니다. 아무리 임시여도 과장님이 능력이 없었다면 이사장님이 승인했을 리가 있습니까?"

"아하하하! 그런가? 그렇게 말해 주면 나야 고맙지. 그래, 명 닥터. 내가 명 닥터 마음 잊지 않을게."

김준명은 책상 앞에 놓인 임시 원장패를 어루만지며 껄껄 웃었다. 그런 그를 묘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석한이 험험 헛기침을 한 뒤 말했다.

"그런데 과장님, 이사장님은 잘 만나셨죠? 이사장님이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습니까?"

단지 이사장님을 잘 만났냐고 물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김준명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좋은 말씀? 어어, 좋은 말씀 많이 하셨지. 이사장님이 특수치료실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더라고. 그래서 조금 개혁을 하실 생각이신 것 같던데. 이기적 실장을 내리고 강한수 그 친구를 실장으로 올리실 생각인가 봐. 그런데 이기적 실장 말이야. 그 친구는 왜 이사장님 눈밖에 난지 모르겠어. 잘하는 줄 알았는데 말이야."

명석한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은 채 김준명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그 말에 답했다.

"글쎄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뭐 이사장님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었나 보죠."

"그런가? 그래도 나는 조금 걱정이네. 치료도 잘하고 환자도 제법 끌고 다녀서 병원 수익에 꽤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강한수 그 친구가 실장직을 해도 수익이 그만큼 나올까 모르겠어."

그 말에 명석한의 낯빛이 살짝 변했다.

"과장님, 별걱정을 다 하십니다? 이기적 실장이 환자들을 끌고 다닌다고요? 에이, 환자들이 찾아오는 거는 우리들 때문이지요. 이기적 실장이나 강한수 치료사나 거기서 거기죠. 이기적 실장이 병원을 그만둔다고 해도 병원 수익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겁니다."

전에 없이 높아진 명석한의 목소리에 김준명은 살짝 당황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명석한이 말하는 바를 눈치채고는 그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하, 하긴 환자들이 우리를 보고 오지 물리치료사를 보고 오는 것은 아니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네."

"그러니까요. 의사의 지도를 받는 것이 물리치료사입니다. 그런데 우리 병원 연봉 테이블을 보면…… 참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올 지경이에요. 저 같은 전문의보다 이기적 실장이나 박영규 과장 연봉이 더 많습니다. 뭐 박 과장이야 근속 기간이 길어서 그렇다고 해도……. 이기적 실장 같은 신입이 연봉이 이렇게 많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이사장님이 특수치료실을 개혁하려고 하는 것은 아마 그 때문일 겁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 많은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이 더 많은 급여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명석한은 그런 당연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듯했다.

김준명은 명석한의 주장에 오류가 있다고 느꼈지만 굳이 속마음을 밖으로 꺼내 놓지는 않았다.

"하긴 그렇지. 의사의 지도를 받는 물리치료사가 우리 의사들보다 많은 돈을 받는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아무튼 걱정 말라고. 특수치료실은 조만간 정리가 될 테니까 말이야."

그제야 명석한의 표정이 풀어졌다. 흡족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그가 말했다.

"이제야 병원이 좀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네요."

병원 분위기가 좋지 못했지만 기적은 자신이 맡은 일에 최선을 다했다. 이럴 때일수록 자신이 맡은 일에 집중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치료에 집중한 것이다.

마음은 불편할지 몰라도 몸은 편했다. 신환이 배정되지 않는 탓에 충분한 휴식 시간이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기적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의 주인공은 임시 병원장 김준명이었다.

-이 실장, 상의할 일이 있으니 잠깐 과장실로 오세요.

기적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김준명이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으나, 일단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 먼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기적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둘은 잠시 후 얼굴을 맞대었다. 얼음이 둥둥 떠다니는 시원한 커피를 마시며 김준명이 말했다.

"이기적 실장, 오늘은 특수치료실과 관련해서 할 이야기가 있어서 이렇게 불렀습니다."

"그렇습니까, 무슨 일입니까?"

김준명은 책상 앞에 놓아두었던 A4 용지를 기적의 앞으로 착 내밀며 말했다.

"이 실장이 맡은 환자들 평균 방문 횟수예요."

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김준명이 왜 이런 자료를 보여 주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러자 김준명이 답답하다는 듯 펜을 들어 밑줄을 쫙쫙 그었다.

"거기! 거기를 봐요. 왜 이렇게 합니까? 이거 보고 뭐 드는 생각 없어요?"

시선을 돌려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확인한 기적은 비로소 김준명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김준명이 줄을 그은 부분에는 이런 내용이 적혀 있었다. 기적의 환자들의 평균 방문 횟수가 다른 치료사들에 비해 많이 적다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환자들을 빨리 돌려보내면 어떻게 합니까?"

김준명이 나무라듯 말했지만 기적도 할 말이 있었다.

"돌려보내지 않으면요? 완치된 환자를 또 오라고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나 참…… 이봐요, 이 실장. 실장이면 간부 아닙니까? 간부라는 사람이 그렇게 이상적인 소리를 하고 있습니까? 간부라면 병원 실정도 생각해야지. 그럼 우리는 뭐 환자들에게 악감정이 있어서 이 검사, 저 검사 받게 합니까? 원수라서 수술을 권유해요? 악마라서 다음에 또 오라고 합니까?"

"……."

"혼자 그렇게 성인군자인 척하면 기분이 좋습니까? 아주 그냥 우리만 나쁜 사람들이죠? 이 실장, 연봉이 대체 얼마에요? 그 돈은 어디서 솟아난답니까?"

기적은 김준명의 꾸지람을 그냥 듣고만 있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그러다가 말이 끝나고 난 뒤에야 착잡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글쎄요. 명 원장님이 계실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는데…… 갑자기 왜 이런 일들이 문제가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저의 방식을 바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이전의 환자가 더 이상 오지 않는다고 해도, 또 그만큼의 환자를 끌어들였다고 생각하고요. 결론만 말하자면 그렇게 말씀하셔도 제 방식을 바꿀 생각은 없습니다."

얼굴을 굳힌 김준명이 뭐라고 말을 덧붙이려 할 때였다. 기적이 한 박자 빠르게 나섰다. 그러고는 자신의 생각을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저에게 신환을 배정하지 않는 것도 그렇고…… 혹시 병원에서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미련 없이 그만두겠습니다. 명의진 원장님이 안 계시는 이상, 저도 더 이상 이 병원에 미련이 없습니다."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그렇다면 가타부타 말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다. 김준명은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지금 그 말 후회 안 하겠습니까?"

기적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글쎄요. 누가 후회하게 될지는 지켜봐야 알 일이죠."

의미심장한 대답에 김준명은 일순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을 느꼈다. 과연 이대로 이기적이라는 걸물을 내치는 것이 병원을 위하는 길인지 순간적으로 고민이 되었다.

하지만 고민의 순간 그는 얼마 전 만났던 이사장 김귀연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기적을 콕 집어 말하지는 않았지만 특수치료실 개혁에 강한 의지를 내보인 김귀연의 말들을 말이다.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그리고 답을 알고도 문제를 풀어내지 못한다면 자신은 무능한 인물로 낙인찍힐 공산이 컸다. 그것은 결코 그가 바라는 일이 아니었다.

'어차피 내가 책임져야 할 일도 아니고…… 내 병원도 아니니까…….'

결론을 내린 김준명이 무거운 표정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좋습니다. 조만간 다시 연락하겠습니다. 오늘은 이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기적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뒤 그대로 과장실을 빠져나갔다. 김준명은 그런 기적의 모습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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