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98화 (98/205)

# 98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11)

교육은 성황리에 끝이 났다. 교육생들은 만족한 얼굴로 돌아갔고, 기적은 기분 좋게 뒷정리를 시작했다.

컴퓨터를 종료시키고, USB를 회수한 그는 마찬가지로 뒷정리를 마친 김중덕 가족과 얼굴을 마주했다.

"정리 다 끝나셨나요?"

물어보나 마나한 질문이었다. 이미 네 사람은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 나란히 서서 기적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강미숙을 대신해서 휠체어의 손잡이를 잡고 있던 김정수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정리 다 끝났습니다. 이제 돌아가시는 겁니까?"

"네. 이제 다 끝났으니까요. 돌아가서 조금 쉴 생각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기적은 네 사람을 밖으로 안내했다.

"자, 그럼 올라가세요. 주말인데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미숙이 천만의 말이라는 듯 손사래를 쳤다.

"무슨 말씀을 하세요. 선생님이 고생하셨죠. 따로 부탁을 드려도 모자랄 판인데…… 이렇게 치료받을 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그랬다면 정말 다행이네요. 그러면 조심히 올라가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건넨 기적은 멀어져 가는 가족을 돌아본 뒤 이내 문단속을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코너를 돌아 사라졌던 김정수가 어찌된 셈인지 기적을 향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어? 무슨 일이십니까? 혹시 뭘 놓고 가셨습니까?"

기적은 잠시 문단속을 멈추고 그렇게 물었다. 김정수가 다시 돌아온 것을 보니 무언가 물건을 놓고 갔나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김정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놓고 간 것 없습니다."

"네? 그러면 무슨…… 일이십니까?"

기적은 재차 물었다. 그러나 김정수는 머리만 긁적일 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그 끝에서 김정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기…… 제가 경상도 남자라…… 표현하는 데 많이 서툽니다만…… 그래도 이 말은 꼭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렇게 다시 돌아왔습니다."

기적은 일부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기다렸다. 지금은 그럴 때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김정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담백한 한마디.

하지만 마음이 따뜻해지는 한마디에 기적은 살짝 웃음을 머금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인지 기적을 바라보는 김정수의 얼굴은 붉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후련한 기색 또한 느껴졌다.

이를 느꼈을까? 기적이 말했다.

"용기를 내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뿌듯하네요."

'역시 말하길 잘했어.'

기적의 말에 김정수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는 감정 표현에 인색한 사람이었다. 원래부터 무뚝뚝하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도 감사하다는, 그리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그는 마음을 바꿨다. 말을 하지 않으면 알 수 없으니까. 적극적인 사람이 되기로.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바로 지금, 그는 그 첫발을 내딛은 것이었다.

"그런데 선생님,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요."

"그게 뭔가요?"

"원래 음악이 환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나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말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갑자기 좋아질 수 있는지 말입니다."

기적은 한참을 생각한 뒤 질문에 답했다.

"음악이 환자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경향이 있긴 있습니다만…… 오늘 김중덕 님처럼 급격히 좋아지는 경우는…… 없다고 봐야겠죠."

"그럼 오늘 아버지는 어떻게 그렇게 걸을 수 있었던 겁니까?"

"글쎄요. 저도 놀랐습니다. 아무래도 이번 경우는 의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죠. 이번 일은 심리적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고 봐야합니다. 사람들은 가끔 이해할 수 없는 초능력을 발휘하지 않습니까? 차 밑에 깔린 아이를 구하기 위해 엄마가 차를 들어 올린다든가 하는 거요. 아마 김중덕 님도 이와 같은 경우가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위해 초인적인 힘을 발휘한 것이죠. 그러니까 슈퍼맨처럼 말입니다. 아들에게 아빠는 항상 슈퍼맨 아닙니까?"

"……."

김정수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아들에게 아버지는 항상 슈퍼맨이죠. 제가 그 사실을 잠시 잊었나 봅니다. 가르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어느 때보다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은 김정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기적에게 내밀었다.

"아! 그리고 이거……."

"이게 뭡니까?"

엉겁결에 그것을 받은 기적이 묻자 김정수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이에 답했다.

"별거는 아니고…… 제 연주회 티켓입니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와 주세요."

"연주회요? 제가 바이올린은 잘 모르지만 꼭 가도록 하겠습니다."

기적은 그렇게 대답했고,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여 보인 김정수는 이내 몸을 돌렸다. 코너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를 향해서. 그는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슈퍼맨이라…… 나도 오늘 슈퍼맨이나 만나러 가야겠다."

원래는 집으로 돌아가 늘어지게 잠이나 잘 생각이었다. 그런데 김정수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마음을 바꿨다. 어쩐지 아버지가 보고 싶어진 것이었다.

빠르게 문단속을 끝낸 그는 그 길로 주차장에 내려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우렁찬 엔진음을 토해 내는 자동차는 사계절이 아름다운 시골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서울의 한 작은 공연장.

그곳에서는 지금 바이올린 공연이 한창이었다. 오늘의 연주자는 꽤 실력이 좋은 바이올리니스트로 보였다.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만들어지는 선율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관중석에 자리한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법으로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듣는 사람도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며 듣는 사람도 있었으며, 리듬을 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사람이 있었다. 일반석이 아니라 휠체어에 앉아 있는 남자였다.

대략 60세쯤 되었을까? 휠체어에 앉은 남자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일 전, 공사장에서 떨어져 뇌수술을 받은 중환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 남자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건강한 모습으로 연주를 감상하고 있었다.

필요에 따라 박수를 치기도 하고 작게 소리를 내기도 하면서 기분 좋게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남자의 사연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런 남자의 모습을 보고 기적이라고 수군거렸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쭉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공연장 맨 뒷자리에 앉아 두 남자, 김정수와 김중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김정수와 김중만은 기적을 볼 수 없었지만, 그가 어딘가에서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기적이 자신들 가까이에 와 있다는 사실을.

기적은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를 즐겁게 감상하고 있는 김중덕을 보며 씩 웃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슈퍼맨들의 앞날에 찬란한 영광이 있기를…….'

오늘도 기적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完.

새로운 도전 (1)

* * *

주말 동안 고향집을 방문해 재충전의 시간을 가진 기적은 다시 힘찬 한 주를 시작했다.

"좋은 아침입니다, 다들 주말 잘 보내셨나요?"

그런데 치료실로 들어서는 팀원들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네…… 실장님, 안녕하세요?"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낀 기적이 물었다.

"무슨 일 있으세요? 다들 표정이 왜 그러세요?"

그 말에 대답한 것은 가장 앞서 있던 맹동식이었다.

"실장님, 아직 문자 못 보셨어요? 조금 전에 병원 전체 공지 들어왔는데……."

"아, 그래요? 제가 아직 스마트폰을 확인 못 해서……."

어깨를 으쓱해 보인 기적은 곧 스마트폰을 꺼내 문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그의 안색은 급격하게 변화했다. 문자의 내용은 길었다. 다만 그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았다.

-명성 병원에서 알려 드립니다. 현 병원장 명의진 원장님이 건강상의 문제로 잠시 일선에서 물러나시게 되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복귀 시점을 알 수 없는 바, 부득이하게 대체자를 정하게 되었습니다. 명의진 원장님이 부재하시는 동안 원장직은 김준명 재활의학과 과장님께서 수행하게 됩니다. 이런 때일수록 근거 없는 괴소문들이 판을 치기 마련입니다. 그런 소문에 현혹되지 마시고 다들 본연의 위치에서 열심히 해 주세요.

"음……."

기적은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만큼 문자의 내용이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그를 대신해 맹동식이 재차 입을 열었다.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원장님이 빨리 쾌차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괜찮을까요? 김준명 과장님은……."

맹동식은 뒷말을 흐렸다. 그러나 기적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를.

'김준명 과장님은 대놓고 명석한의 뒤를 봐주고 있으니까…… 임시라고는 해도 김 과장님이 원장이 됐다는 소식은 나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겠지.'

그러나 기적은 밀려드는 불안감을 애써 떨쳐 냈다. 본래의 신색을 회복한 그가 어느새 앞에 모인 팀원들을 향해 당부의 말을 전했다.

"김준명 과장님이 잘해 주시겠죠. 문자 내용대로 다들 소문에 흔들리지 마시고 본연의 위치에서 할 일을 해 주세요. 원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기적은 이렇게 생각했다. 이럴 때일수록 팀원들을 다독여 혼란을 최소화시키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이것을 느낀 것일까? 팀원들도 애써 농담을 던지며 분위기를 띄우려 했다.

그런데 그런 분위기를 방해하는 이가 있었다. 그 주인공은 출근 시간인 8시 50분을 넘어서 나타난 강한수였다.

"아이고, 늦었습니다."

좋았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싸해졌다. 실쭉 웃으며 말하는 강한수의 태도는 전혀 죄송해하는 표정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강한수는 거기서 한 발을 더 나아갔다.

"다들 뭘 그렇게 봐요? 내가 뭐 죽을죄를 지은 것도 아니잖아? 벌점 받으면 되잖아. 실장님, 저 늦었으니까 벌점 주세요, 벌점. 그까짓 거 뭐 받으면 되지."

거기까지 말한 그는 또 모두를 향해 빈정댔다.

"자기들도 줄 잘 서. 지금 세상이 바뀌었는데 언제까지 분위기 파악 못 할 거야?"

보다 못한 기적이 나섰다.

"강 선생님, 지금 뭐 하자는 겁니까? 말조심하세요."

그러나 강한수는 별로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별로가 아니라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이었다. 움찔하기는커녕 오히려 과장된 모습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기적을 조롱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 것이다.

안하무인격인 모습은 기적을 포함한 모두를 화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감도 느꼈다.

강한수가 아무 생각 없이 저러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기적은 오래지 않아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방에 들어가 차트를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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