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6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9)
2시가 되었다.
100여 석이 넘는 소강당 좌석이 꽉꽉 들어찼고, 기적은 준비해온 멘트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명성 병원 특수치료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기적 실장입니다.
좌석 곳곳에서 드문드문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기적은 신경 쓰지 않고 강의를 이어 나갔다.
-지금 시간이 오후 2시인데요. 다들 점심 식사는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졸릴 시간인 데다 식사까지 하셨으니 많이 졸리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지루한 이론 교육은 최대한 짧게 진행하려고 합니다.
이론 교육을 짧게 한다는 말에 교육생들이 반색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신졸 치료사들이 교육을 들으러 다니는 이유는 데모를 보기 위함이었다. 실력 좋은 치료사들이 어떤 식으로 환자를 치료하는지 보고 싶은 마음에 교육장을 찾는 것이다.
그런데 기적이 알아서 이론 교육을 미니멈으로 줄이겠다고 하니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안 그래도 이론 듣기 싫었는데 잘됐다. 저 강사 젊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마음에 드는데?"
"그러니까. 사실 우리가 실전 기술을 배우기 위해 온 거지 이론을 배우러 온 것은 아니잖아? 이론이야 우리가 더 잘 알지. 배운지 얼마 안 됐으니까."
좌중에서는 작게 박수 소리마저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좋다는 것을 감지한 기적은 빠르게 이론 수업을 진행했다.
-먼저 뇌를 구성하고 있는 뇌의 종류들입니다. 그림을 준비했으니까요. 보시고 각 뇌들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정도는 반드시 알고 넘어갔으면 합니다. 그리고 특히 여기 소뇌. 이 부분은 반드시 알고 넘어가셔야 합니다. 오늘 만나게 될 환자가 소뇌형 운동 실조증 환자거든요.
그렇다고 성의 없이 이론 수업을 진행한 것은 아니었다. 기적은 빠르게 진도를 넘어가면서도 포인트만큼은 확실하게 짚고 넘어갔다.
"아아……."
초, 중, 고, 그리고 대학에 이르기까지 학생들은 참 다양한 부류의 스승을 만나게 된다.
하지만 왜인지는 몰라도 대부분의 스승들은 책을 읽듯이 수업을 진행한다.
중요한 것도 없고, 뚜렷한 수업의 목적도 없다. 그저 한 시간 내내 책을 읽고 나갈 뿐, 중요한 것은 학생 스스로가 알아서 공부해야 한다.
그에 반해 기적은 수업을 쉽게, 쉽게 진행했다. 명확한 포인트가 있고, 무엇을 알고 넘어가야 하는지 제대로 짚어 주었기 때문에 교육생 입장에서는 만족도가 높을 수밖에 없었다.
25분 가까이 수업을 진행한 기적이 마지막으로 요점을 짚어주었다.
-첫 번째! 소뇌의 위치와 역할, 두 번째! 운동 실조증의 임상적 증상, 데모를 시작하기 전에 이 두 가지는 반드시 알고 넘어가야 합니다. 지금부터 10분을 드리겠습니다. 화면에 뜬 요약지를 보시면서 확실하게 이해해 주세요.
10분을 준다는 말에 좌중은 다시 웅성거렸다. 겨우 20분 수업을 진행하고 시간을 10분이나 준다는 것이 과하다고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웅성거림은 오래 가지 않아 사라졌다. 이어진 기적의 말 덕분이었다.
-10분 동안 공부를 하시고 치료 계획을 세워 주세요. 10분 후에 앞으로 나와서 환자를 직접 치료해 보는 시간을 가지겠습니다.
직접 치료한다는 말에 좌중의 분위기가 일시에 심각해졌다. 시간이라는 것이 참 신기한 것이어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고 넘친다고 생각했던 10분이 이제는 너무나도 짧게 느껴지고 있었다.
분위기가 일시에 분주해진 가운데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옆자리 분과 상의를 해도 좋고…… 아! 말이 나온 김에 그냥 2인 1조로 하겠습니다. 시간 관계상 모든 분들의 치료를 보려면 그렇게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왼쪽부터 2명씩 짝을 짓도록 하겠습니다. 시작할 때 나누어 드린 환자 자료 참조하시고……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여유로웠던 자세는 온데간데없이 교육생들은 다급히 토론을 시작했다. 이렇다 할 답이 없는 문제였기에 그들은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토론을 벌였다.
기적은 허투루 시간을 보내는 대신 그런 그들의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총 인원이 92명이었다. 2인 1조로 나누었지만 여전히 46개 조의 치료를 봐야 한다는 말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교육생들에게 부여하기로 마음먹은 시간은 20여 분. 모든 조의 치료를 보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기적은 총 다섯 조의 치료만 보기로 마음먹었다. 다만 아무나 불러낼 수는 없었다. 치료에 도움이 될 수 있을 만한 조들을 불러내야 했다. 기적이 유심히 토론하는 이들을 살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그런 기적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교육생들은 토론에 열중했다. 그렇게 시간은 재깍재깍 흘러갔고, 기적은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환자를 불러들였다.
"어서 오세요, 컨디션 좀 어떠세요?"
언제나처럼 휠체어를 끌고 나타난 김미숙이 이에 답했다.
"컨디션 아주, 아주 좋습니다."
뭔가 의미심장한 말에 기적이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네. 아들하고 며느리가 왔거든요. 혹시 들어와서 조금 지켜봐도 될까요?"
"아, 네. 물론입니다. 남은 자리에 아무데나 앉으셔서 보시면 됩니다."
사실 보호자가 치료를 지켜보는 것은 치료사에게 있어 상당히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컴플레인이 보호자가 지켜보고 난 뒤 걸리니까.
하지만 기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실력에 자신이 있으니 꺼릴 것이 없는 것이다.
강미숙은 전화를 걸었고, 잠시 후 김중덕의 아들 김정수와 그 아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어깨에 무언가 악기를 둘러맨 김정수는 기적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이렇게 인사드리는 것은 처음이네요. 아버지 잘 치료해 주셔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잘 부탁드립니다."
"별말씀을요.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요. 치료 직접 보시는 건 처음이시죠? 오늘 아버지가 얼마나 열심히 하고 계신지 한번 지켜보세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김정수가 아내와 함께 뒤쪽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기적은 다시 눈을 빛내며 교육생들의 토론하는 모습을 살피기 시작했고, 시간은 째깍째깍 흘러갔다. 그리고 정확히 10분이 지났을 때 기적은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자, 10분이 지났습니다. 지금부터 바로 치료를 시작할 건데요. 시간 관계상 모든 조를 앞으로 모실 수는 없을 것 같고, 대표로 다섯 조만 모시기로 하겠습니다.
다섯 조만 불러내겠다는 말에 교육생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이들도 더러 있었다. 실력에 자신이 있는 것인지, 아니면 준비가 잘된 것인지 의미 모를 탄성을 내뱉는 것이다. 물론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기적은 그런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혹시 꼭 발표하고 싶으신 조가 있습니까? 보니까 이쪽에 두 분 굉장히 아쉬워하시던데?
"네? 아닙니다."
쏟아지는 관심이 부담스러웠을까? 두 사람은 한사코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그러나 기적은 집요했다.
-그래도 나와 보세요. 제가 두 분을 찍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앞으로 나왔고, 기적의 도움하에 치료를 진행했다.
-저희는 이렇게 치료하겠습니다.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던 모습과는 달리 두 사람은 적극적으로 치료에 나섰다. 치료 방법 또한 생각보다 훌륭했다.
-협응 능력을 상승시키기 위해 콰드리 포지션에서 치료를 진행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콰드리 포지션을 만들고…… 왼쪽 손과 오른쪽 발을 동시에 들어 올리는 훈련을 진행해 보겠습니다.
김중덕을 처음 만났을 때 기적이 집중적으로 실시했던 콰드리 포지션에서의 훈련을 두 사람이 생각해 낸 것이었다.
다만 컨트롤하는 능력에 있어서 기적과는 차이가 있었다. 손쉽게 콰드리 포지션을 만들었던 기적과는 달리 두 사람은 콰드리 포지션을 만드는 데 애를 먹고 있었다. 동시에 달려들었음에도 말이다.
기적은 두 사람의 치료를 유심히 지켜보다가 적당한 타이밍에 나섰다.
-접근은 좋았습니다. 하지만 컨트롤하기가 쉽지 않죠? 이렇게 한번 해 보자고요.
보통 데몬스트레이션은 강사의 일방적인 치료로 진행된다. 강사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치료를 펼쳐 보이지만, 이 과정에서 교육생들은 그저 지켜보는 것 외에는 아무런 행동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기적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데모를 진행했다. 치료사들의 치료를 먼저 보고, 이 치료법을 더욱 발전시키는 방법으로 환자를 치료한 것이다.
-다들 아시겠지만 치료에 정답은 없습니다. 치료법도 다양하고 어떤 이론을 적응시키느냐에 따라 치료 방법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죠. 다만 어떤 콘셉트를 사용하든 이를 적응시킬 수 있는 실전 기술은 반드시 필요할 것입니다. 지금 같은 경우에는 포지션 체인지가 문제가 되는데요. 제가 포지션 체인지를 쉽게 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기적은 직접 베드에 올라 포지션 체인지를 보여 주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쉽게 포지션 체인지를 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서도 너무나 쉽게 김중덕의 포지션을 바꿔 버렸다.
눈높이 교육에 교육생들은 만족감을 드러냈다. 처음에만 해도 교육생들 사이에서 팽배했던 기적에 대한 불신은 이제는 거의 사라져 있었다.
너무도 쉽게 환자를 컨트롤하고 귀에 쏙쏙 들어오는 강의를 하니 자연스레 그렇게 된 것이다.
하지만 놀라기에는 아직이었다. 그런 식으로 다섯 조의 치료가 진행되고 난 뒤, 시작된 본격 데몬스트레이션에서 기적의 진가는 제대로 드러났다.
-소뇌성 운동 실조증 환자입니다. 현재 워커를 잡고 싯 투 스탠드 훈련을 하고 계신데…… 잘될 때도 있고, 그렇지 못할 때도 있으시죠. 일단 지금 어느 정도로 하고 계신지 먼저 보여 드리겠습니다.
기적은 치료에 앞서 김중덕이 어느 정도로 싯 투 스탠드를 할 수 있는지를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교육생들에게 치료 전과 치료 후의 변화를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자, 일어나 보세요.
기적의 지시에 따라 김중덕이 워커를 잡고 몸을 일으켰다.
김중덕의 싯 투 스탠드는 2주 전에 비해서 완연하게 좋아져 있었다.
몸을 일으킴과 동시에 떨림 증상이 발생했지만 엉덩이를 밀어 넣으며 스스로 떨림 증상을 극복하는 모습을 보였다.
-오늘 컨디션이 좋으신 것 같네요. 원래는 이 정도까지 하지 못하셨거든요. 내친김에 다리를 들어 올리는 동작까지 한번 해 보겠습니다. 자, 김중덕 님, 왼쪽 다리부터 들어 보실게요.
그렇게 말하면서도 기적은 크게 기대를 품지는 않았다. 새로운 동작을 할 때면 쉽게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 그동안 김중덕이 보인 패턴이었으니까.
그런데.
"어?"
오늘의 김중덕은 달랐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왼쪽 다리를 들어 올린 것이었다.
겨우 지면에서 발을 떼는 정도였지만, 이와는 별개로 상당히 의욕적인 모습이었다. 어찌된 일인가 김중덕을 살피던 기적은 곧 그의 시선이 어딘가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아들을 보고 있는 건가? 그래. 아들의 존재가 김중덕 님을 움직이게 만들고 있는 거구나. 아버지는 아들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이고 싶은 거야.'
동시에 기적은 생각했다. 어쩌면 지금 김중덕의 모습은 단순한 몸부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네 탓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필사의 외침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렇다면 기적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김중덕의 외침이 아들에게 닿을 수 있도록 확성기 역할을 할 필요가 있었다.
기적의 쇼 타임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