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8)
* * *
기적은 바쁜 하루하루를 보냈다.
주경야독이라고 해야 할까? 낮에는 병원에 출근해 환자를 치료하고, 밤에는 영어 공부에 매진하는 바쁜 일상이 계속되었다.
바쁘게 시간을 보냈기 때문일까? 시간은 정신없이 흘러 어느덧 두 번째 주말이 찾아왔다. 원래대로라면 집에서 늘어지게 휴식이라도 취했겠지만, 이날은 그럴 수 없었다. 주호식을 대신해서 강의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예정된 시간은 2시였지만 기적은 11시가 되기도 전 집을 나섰다. 여유를 가지고 도착해 강의 준비와 리허설을 해 보기 위함이었다.
"소강당 오래간만이네?"
병원에 도착한 기적은 제일 먼저 소강당을 찾았다. 문을 염과 동시에 아담한 소강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북쪽 정 가운데 강의를 할 단상이 있었고, 다시 그 중앙에 교탁이 놓여 있었다. 교탁 하단에는 컴퓨터가 있었고, 상단에는 모니터와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었다.
다시 그 맞은편에는 마치 영화관처럼 사람들이 앉을 접이식 의자들이 주욱 배치되어 있었다. 둥글게 나열되어 있어 어디서든 교탁을 정면으로 볼 수 있는 구조였다.
"음, 집중하기 좋게 잘 만들었네. 단상이랑 거리도 그리 멀지 않고."
잠시 구조를 둘러본 기적은 직원 카드를 꺼내 단상 한쪽에 설치된 카드 꽂이에 꽂았다.
그러자 단상 위 조명과 마이크 등의 전원이 일시에 들어왔다. 팀장급 이상의 직원 카드에 포함된 마스터키 기능이 발동된 것이었다.
"좋네."
기적은 고개를 끄덕이며 컴퓨터 전원을 켰다. 그러고는 컴퓨터가 완전히 가동되기를 기다렸다가 USB를 꽂았다.
이동식 디스크 폴더가 떠올랐고, 기적은 마우스를 클릭해 파워포인트 자료를 화면에 띄웠다. 주호식이 보내 준 자료를 상황에 맞게 수정한 자료였다.
기적은 교육생들이 자리했다는 가정하에 모의 강의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막히는 부분은 없는지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명성 병원 특수치료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이기적 실장입니다. 지금 시간이 오후 2시인데요. 다들 점심 식사는 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한참 졸릴 시간인 데다 식사까지 하셨으니 지루한 이론 교육은 최대한 짧게 진행하려고 합니다."
원래 주호식은 이론 1시간, 데모 30분, 그리고 이에 관련한 질문 30분으로 강의 일정을 계획했다.
그런데 기적은 이를 조금 수정했다. 힘든 주중을 보낸 다음 날인 데다 한참 졸릴 시간인 것을 감안해 이론 시간을 반으로 줄인 것이다.
남는 시간은 고스란히 데모 시간에 투자했다. 굳이 이론과 데모를 나눌 것 없이 데모를 진행하며 틈틈이 이론 강의를 하는 편이 더 효과적일 것 같아 그렇게 한 것이었다.
"각 뇌가 담당하는 영역들입니다. 이 정도는 모두 알고 계시죠? 뭐 모르신다면 지금부터 아시면 되고요. 이 부분은 잠시 후에 데모를 진행하면서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론 리허설은 금방 끝이 났다. 예정된 30분이 채 지나기도 전이었다.
"27분 걸렸네. 본 강의 할 때는 조금 더 천천히 해야겠어."
리허설을 마친 기적은 잠시 소강당을 나와 식당으로 향했다.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해결한 뒤 곧바로 최종 강의 준비를 하겠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다.
접시를 들고 적당히 음식을 담은 기적은 이내 자리를 잡고 식사를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식사가 반쯤 끝냈을 즈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점심 드시는 거예요?"
나타난 이는 명의진의 담당 간호사인 허선경이었다. 기적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아! 네. 선생님도 식사하러 오신 건가요? 왜요? 오늘 근무하세요?"
허선경이 기적의 앞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며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늘 당직 근무가 있어요. 그러는 실장님은 어쩐 일이세요?"
"저는 오늘 2시부터 강의가 있어서요. 일찍 온 김에 식사 좀 하려고요. 여기 음식이 워낙 맛있잖아요."
"그렇죠. 음식 맛있죠."
둘은 자연스럽게 식사를 함께 했고, 이야기가 테이블 위를 오갔다.
"그런데 왜 갑자기 당직을 서세요? 원래 원장님 담당이라 당직 안 서시잖아요?"
그 말에 허선경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막 국을 뜬 숟가락을 입에 넣으려던 그녀가 힘없이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실장님은 아직 모르시겠구나. 저 당분간 원장님 담당 안 해요. 입원 파트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래서 당직도 서는 거고요."
기적도 숟가락을 내려놓은 뒤 말했다.
"어? 왜요, 원장님하고 무슨 일 있으세요?"
허선경은 짧게 고개를 저은 뒤 기적의 말을 수정해 주었다.
"원장님하고 무슨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원장님에게 문제가 생겼어요."
"네? 원장님에게 문제가 생겼다고요, 무슨 문제가요?"
"원장님이 저번에 건강검진을 받으셨는데 몸에 문제가 발견되신 모양이에요. 그래서 당분간 요양이 필요하신가 봐요. 한동안 결근하실 것 같아요. 일단은 한 달 정도라고 하는데…… 한 달 후에 복귀하실지는 모르겠어요……."
기적은 정말 깜짝 놀란 표정이었다.
"아, 정말입니까? 어떻게 그런. 어디가 안 좋으신데요?"
"저도 자세한 거는 몰라요. 그냥 그렇게만 말씀하셨어요."
"충격이네요. 별일 아니어야 할 텐데요. 연락 한 번 드려야겠네요. 저는 원장님이 안 나오고 계신 줄도 몰랐습니다."
"바로 어제부터 안 나오셨으니까요. 그리고 일부러 소문 안 나게 하신 거예요. 뭐, 이미 소문은 다 퍼졌지만."
"그런가요? 흠……."
입맛이 떨어졌는지 밥을 절반 가까이 남긴 허선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날게요. 교대해야 해서요."
"아, 그러세요. 수고하세요."
인사를 한 허선경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완전히 기운이 빠진 모습.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적의 표정도 좋지 못했다.
'원장님이 아프시다니…… 항상 건강하실 줄 알았는데.'
항상 웃고 있는 명의진의 얼굴 때문일까? 아니면 직접 보지 못했기 때문일까? 아직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연락을 한번 해 볼까?'
기적은 스마트폰을 들어 명의진의 전화번호를 찾았다. 안부를 묻는 문자라도 넣기 위함이었다.
기적은 정성을 다해 문자를 작성한 뒤, 전송 버튼을 눌렀다. 명의진의 쾌차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은 문자였다.
"하아, 무슨 병인지는 모르겠지만 부디 빨리 쾌차하시기를……."
기적은 가볍게 바라보았다.
점심 식사를 마친 기적은 다시 소강당으로 돌아왔다. 모니터에 나온 화면을 확인하니 현재 시각은 1시 20분. 교육이 예정된 2시까지는 40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여유가 있었기에 기적은 천천히 교육 준비를 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소강당으로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서기 시작했다. 오늘 교육을 들을 교육생들이었다.
"여기가 외상성 뇌손상 교육 열리는 곳 맞나요?"
"네, 맞습니다."
"아, 맞구나. 고마워요."
감사 인사를 한 교육생들이 담소를 나누며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하하호호 웃는 그들의 모습에서 기적에 대한 경계심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보통 강사를 보면 어려워하기 마련인데 그런 모습이 전혀 없는 것이다. 그 이유는 교육생들의 대화에서 잘 드러났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야? 저분도 물리치료사신가?"
"음…… 아닌 거 같은데? 강의 준비해 주시는 분 아닌가? 얼굴 깔끔하고 훈훈한 거 보니까 인사과 직원 같은데?"
"그런가? 하긴 물리치료사보다는 인사과 쪽 페이스기는 하다. 아무튼 잘 생겼다, 흐흐."
교육생들은 기적이 오늘 교육을 진행할 강사라고는 꿈에도 생각을 하지 못하는 듯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교육을 맡아 진행할 강사라고 하기에 기적의 얼굴은 너무나도 어려 보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생들의 오해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오늘 강의하시는 분 이기적 실장이라고 하던데. 원래 주호식 실장님 아니었나?"
"그러게. 주호식 실장님 교육이 좋은데. 그분 물리치료사 협회 이사시잖아. 강의 잘한다고 들었는데. 갑자기 바뀌어서 조금 실망이야."
"맞아 맞아. 이기적 실장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약간 듣보 느낌인데. 이력 보니까 연차도 얼마 안 되는 것 같고, 학교도 이상한 학교 나왔던데."
"수정이 때문에 온 거지 뭐. 엄청 잘한다잖아. 최악의 경우 수정이 얼굴이나 보고 간다고 생각해야지."
고개를 끄덕이던 교육생 1명이 입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어! 수정이 저기 온다! 수정아!"
"수정아, 여기!"
입구를 지나다 둘을 발견한 수정이 격하게 양손을 흔들었다.
"어어! 지애야! 다슬아!"
"루돌프!"
오랜만에 만난 세 사람은 마치 10년 만에 만난 사이처럼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그 끝에서 웨이브 머리 여자, 지애가 말했다.
"그런데 저분은 누구야?"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던 수정이 어! 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 벌써 와 계셨네? 오늘 교육하시는 실장님! 내가 말했었잖아. 치료 완전 잘하신다고."
그 말에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엥? 저분이 오늘 교육하시는 분이라고?"
"진짜? 말도 안 돼. 아직 서른도 안 돼 보이는데? 실장이라고?"
두 사람은 말도 안 된다는 듯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수정은 뭐가 문제냐는 반응이었다.
"마스크가 엄청 영해 보이시지? 그런데 실장님이셔. 뭐가 문제야? 꼭 나이 많은 사람만 실장해야 하는 거야? 실력만 좋으면 되는 거지!"
"그렇긴 한데…… 솔직히 실력이 좋을 것 같지는 않은데…… 낙하산 아냐?"
"그러니까. 나도 왠지 신뢰가 가질 않네. 우리랑 나이도 비슷한 사람한테 강의를 듣는다니. 2만 원이나 냈는데 괜히 헛돈 쓰는 거 아닌가 몰라."
"어머? 얘네 말하는 것 좀 봐? 우리 실장님 실력 완전 좋으시거든?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선입견이야? 조금만 있어봐. 오늘 완전 잘 왔다고 할 테니까."
단호한 수정의 말에 두 사람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기적을 바라보는 두 사람의 표정은 여전히 찜찜해 보였다.
그리고 그것은 비단 두 사람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소강당을 찾은 교육생들도 기적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늘 강사가 저분이야?"
"너무 어려 보이는 것 같은데. 정말 저 사람이 강의를 한다고?"
"아니, 꿩 대신 닭도 아니고. 이렇게 교육이 바뀌어도 되는 거야? 명성 병원 믿고 신청한 건데 조금 실망이네?"
"그런데 저번 주에 공지 올라왔네. 일찍 공지하기는 했네. 뭐 어쩌겠어, 왔는데 들어야지."
원래의 나이보다 더욱 어려 보이는 기적의 얼굴 때문일까? 사람들은 동년배로 보이는 기적에게 신뢰가 가지 않는 듯했다.
대외적으로 유명한 주호식에게 교육을 받기 위해서 교육을 신청했는데 또래가 나오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외모만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