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5)
* * *
길었던 장마가 끝이 났다. 태풍이 지나갔고, 겹겹이 자리했던 비구름이 걷히며 오랫동안 만나기 힘들었던 태양이 반짝 떠올랐다.
이에 따라 잠시 주춤했던 특수치료실도 다시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비구름과 함께 모습을 감췄던 외래 회원들이 태양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성 회원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 탓인지 몰라도 비가 오니까 허리가 더 아프더라고요."
비가 오면 통증이 심해진다. 이는 마냥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비가 오면 주변에 저기압이 형성되잖아요. 그러면 혈압도 다운되고…… 몸도 처지고…… 통증에도 좀 예민해지고 그래요. 마냥 기분 탓은 아닐 겁니다."
"아, 그래요? 이게 기분 탓이 아니었구나. 호호호, 역시 선생님이야. 오늘도 기대해도 되겠죠?"
오랜만이기 때문일까? 사람들은 더욱 기대에 찬 모습으로 치료실에 나타났고, 기적은 여지없는 실력으로 그런 사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주었다.
"오랜만에 오셨으니까 엄청 만족하실 거예요. 뭐든 오랜만에 하면 재미있잖아요. 오늘 오랜만에 오신 분들 다 엄청 만족하고 가셨어요."
그렇게 바쁘게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마지막 한 타임만이 남아 있었다. 요즘 가장 신경을 써서 치료하고 있는 김중덕의 치료 타임이었다. 1주일 전 처음 만났을 때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으로 김중덕과 그 보호자가 나타났다.
"어서 오세요, 비가 그쳐서 그런가 표정이 완전 밝아지셨네요?"
기적의 인사에 보호자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말에 아들이랑 며느리가 왔다 갔거든요. 오랜만에 봐서 기분이 엄청 좋은가 봐요. 선생님 덕분에 몸 떨리는 것도 많이 좋아졌고. 밤에 힘들어하는 게 많이 좋아졌어요."
기적은 밝게 웃으며 김중덕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눈을 맞추며 말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좋아지셨나 했더니 아드님이 왔다 가셔서 그랬군요. 자주 좀 왔다 가셔야겠어요, 김중덕 님이 이렇게 좋아하시는데."
김중덕이 옅은 미소를 지었고, 보호자 강순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좋죠. 그런데 직장 다니랴, 신혼 생활하랴 바빠서 자주 못 와요."
"아! 신혼집이 여기서 좀 먼가 봐요?"
"아니에요. 그렇게 멀지는 않아요. 아니, 오히려 가깝다면 가까운 거리인가?"
기적의 눈빛이 이채를 발한 것은 그 순간이었다. 대답을 하는 강순미의 말투에서 원망스러운 느낌을 받은 것이다.
기적은 일으켜 세운 김중덕을 베드로 옮긴 뒤 조심스레 말했다.
"아드님이 조금 더 자주 오셨으면 좋을 텐데요."
안타까움에 한 말이었다. 그런데 보호자 강순미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럼요, 자주 와야죠. 우리 아들이랑 며느리는 꼭 자주 와야 해요."
어쩐지 뼈가 있는 말이었다. 기적은 그것을 느꼈으나 상황을 파고드는 대신 넘겨 버리는 선택을 했다. 남의 가족사를 파고드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판단에서였다.
"아드님이 자주 오면 좋죠. 자주 오라고 말씀해 보세요."
그렇게 말한 기적이 치료를 시작했다. 강순미의 얼굴에 어쩐지 찝찝한 기색이 남아 있었으나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로 했다. 남의 가정사를 캐묻는 것보다는 환자를 치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었다.
"자, 오늘도 네 발 기기 자세입니다. 한번 해 볼까요?"
1주일 동안 기적은 환자 스스로 네 발 자세를 할 수 있도록 하는데 주력했다.
슈파인에서 프론, 다시 프론에서 네발 자세로 자세를 전환하는데 온 힘을 쏟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기적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더디긴 하지만 김중덕이 슈파인에서 프론으로, 프론에서 콰드리 포지션으로 자세를 바꾸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독립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독립적으로 자세를 바꾸기에는 힘에 부쳐 기적의 도움이 필요했다.
굳이 따지자면 5대 5의 비율 정도랄까? 여전히 많은 도움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것을 기적에게 의존했던 처음에 비한다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만한 변화였다.
기적은 덜덜덜 떠는 김중덕의 몸을 살짝 잡아 증상을 멈추게 만든 다음 치료를 이어 나갔다.
"오늘부터는 이 자세에서 한 가지를 추가해 볼 거예요."
그 말에 김중덕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지금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 해도 너무 힘이 드는데 여기서 동작을 더 추가한다니……. 그게 과연 가능할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렇게 걱정하실 거 없습니다. 아시잖아요, 제가 힘들게 안 시키는 거."
김중덕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당혹스러운 그의 얼굴이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힘들게 안 시킨다고? 그럼 지금 내 얼굴에 흐르고 있는 굵은 땀방울은 뭔데?'라고 말이다.
기적은 그런 기색을 읽었지만 모르는 척 치료를 이어 나갔다. 치료 시간에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것이 그의 치료관이었다.
"자, 제가 무작위로 위, 아래, 좌, 우로 밀어 볼 거예요. 김중덕 님은 무작위로 들어오는 힘에 대응해서 중심을 잡으시면 되는 거예요, 그럼 시작합니다."
기적은 손을 들어 김중덕을 밀기 시작했다. 위에서 아래로, 앞에서 뒤로, 다시 좌측에서 우측으로. 김중덕은 그 힘에 대항하여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시 한 번 김중덕의 몸에서 떨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몸에 힘을 주자 잦아들었던 떨림 현상이 심해진 것이다.
기적의 머릿속에 실체 없는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강도가 너무 강하잖아. 강도를 조금 약하게 손의 위치는 조금 더 그러쥐듯이 힘을 줘 봐.
-저항을 주는 타이밍이 너무 빨라. 조금 더 천천히 지긋이 힘을 줘. 환자가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줘야지. 진전(떨리는 증상)이 일어나잖아.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아 주는 목소리였다. 덕분에 기적은 오차를 빠르게 수정해 나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김중덕의 떨림 증상도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다.
적용하기가 어려워서 그렇지 적용할 수만 있다면 지금의 치료는 상당히 유용한 것이었다.
다방면에서 힘을 줌으로써 환자의 다양한 근육들을 동원시킬 수 있음은 물론, 협응 능력까지 강화할 수 있기 때문에 운동 실조형 환자에게는 안성맞춤이라 할 수 있는 치료 방법이었다.
"힘드시죠, 잠깐 쉬었다가 할까요?"
김중덕은 고개를 끄덕였고, 콰드리에서 프론으로, 다시 프론에서 슈파인으로 자세를 바꿨다.
그러자 한 발치 떨어져서 치료를 보고 있던 보호자 강순미가 수건을 들고 다가와 남편의 땀을 닦아 주었다.
"우리 남편 고생하네. 퇴직하고서 말년은 좀 편하게 보내나 했더니 고생을 사서 해, 사서. 어?"
강순미가 따지듯이 말했다. 그러자 김중덕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아아아느으은 후우회애애 아아안해애애."
무엇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일까? 기적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냥 못 들은 척하기로 했다. 자신이 나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요?"
기적의 말과 함께 잠시 멈췄던 치료가 다시 시작되었다. 김중덕은 다시 콰드리 포지션을 취했고, 기적은 손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그런 김중덕을 컨트롤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치료실의 문이 열리며 1명의 인물이 안으로 들어섰다. 주호식이었다.
'실장님이 어쩐 일이지?'
치료를 하다 주호식을 본 기적이 김중덕을 향해 말했다.
"오늘 많이 힘들어 하시네요? 그런 의미에서 조금 일찍 끝낼까요?"
지나치면 부족하니만 못하다. 기적이 몇 번이나 했던 말이었기에 김중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정비를 마친 김중덕이 치료실을 나서자, 주호식이 치료사들의 인사를 받으며 기적에게로 다가왔다.
"이 실장, 요즘 잘 지내고 있지?"
"네. 저야 뭐……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까지?"
주호식은 머리만 긁적일 뿐 쉽게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결심을 했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 실장, 혹시 다음 주 토요일에 스케줄 있어?"
잠시의 시간 차를 두고 기적이 답했다.
"아니요, 아직 없습니다."
그 말에 주호식의 표정이 환하게 밝아졌다. 기적의 옆자리에 주저앉은 그가 말을 이었다.
"다른 게 아니라 다음 주 토요일에 우리 병원에서 교육이 열리거든. 원장님이 나한테 맡긴 교육인데…… 내가 급한 일이 생겨 버려서 말이야. 그 교육을 이 실장이 대신 해 줬으면 좋겠는데…… 혹시 가능할까?"
기적은 음…… 하고 침음을 흘렸다.
"그런데 원장님이 실장님한테 맡기신 일을 제가 해도 괜찮은가요?"
"아아, 그 부분은 걱정 말아. 급한 일이 생겼다고 원장님에게 말씀드렸더니 이 실장에게 부탁해 보라고 하더라고. 이 실장만 괜찮으면 문제없을 것 같은데 말이야."
"글쎄요. 다음 주 토요일이면 오늘이 월요일이니까……. 12일밖에 안 남은 건데…… 할 수 있을까요? 정확히 무슨 교육인데요?"
"3년 차 이하 선생님들 상대로 하는 교육이야. 케이스 하나 잡아서 이론 설명해 주고, 데모 보여 주고, 질문 받고 뭐 그러면 되는 거야. 시간은 오후 2시부터 4시까지 2시간 예정되어 있고. 장소는 우리 병원 소강당."
"크흠……."
기적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준비 시간이 2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교육을 떠맡기가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이를 눈치챈 것일까? 주호식이 부연 설명을 했다.
"내가 그동안 준비해 놓은 발표 자료가 있어. 완성된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거 조금만 입맛에 맞게 수정해서 쓰면 될 거야."
"음…… 주제가 뭔데요?"
"주제는 뇌손상 환자. 뇌손상 환자면 아무 상관없는데…… 그래도 뇌출혈 환자는 너무 식상하잖아. 그래서 내가 이번에는 외상성 뇌손상 환자에 대해서 준비하고 있었거든."
주호식은 간간이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에 환자 혹시 운동 실조 환자 아니야? 보니까 운동 실조 환자 같던데. 그 환자 정도면 이번 케이스로 딱일 것 같은데 말이야."
기적이 살짝 웃음을 지은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간절한 태도로 말하던 주호식이 어? 하고 물었다.
"어? 이 실장, 왜 웃어?"
그러자 기적이 얼른 얼굴에 떠오른 웃음을 지운 뒤 이에 답했다.
"죄송합니다. 실장님 얼굴이 너무 간절해 보이셔서 저도 모르게 그만…… 알겠습니다. 그 강의 제가 해 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주호식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오오~ 고마워 이 실장. 내가 이 은혜 안 잊을게. 병원에서 주최하는 거라 수당도 쏠쏠히 지급될 거야. 그리고……."
주호식은 또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기적에게 내밀었다.
"이건 발표 자료가 들어 있는 유에스비. 발표 잘하고 천천히 돌려줘."
"어? 유에스비까지 준비해 오신 거예요?"
"준비해 왔지. 여기가 은근히 가까우면서도 멀더라고? 문턱 넘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야. 그러니까 한국과 일본 같은 거리감이라고 해야 하나?"
재활 치료실과 특수치료실.
사실 두 치료실은 경쟁 관계에 놓여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실적을 비교당하는 위치이기 때문에 서로를 견제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같은 3층에 자리하고 있지만 서로 간에 왕래가 없는 것은 누군가의 지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미묘한 경쟁 심리가 마음 속 장벽을 만든 것이었다.
기적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요. 저도 특수치료실 온 이후로 재활 치료실 간 적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어쩐지 가기가 그래서……."
"그것 봐. 그게 그래. 이제 와 말인데 나도 오늘 큰마음 먹고 온 거야. 오는 내내 가슴이 벌렁벌렁 했다니까?"
"아, 어쩐지 영상 지원이 되는 것 같네요."
기적은 혼잣말을 늘어놓으며 걸어왔을 주호식을 생각하자 어쩐지 우스운 생각이 들어 웃음을 짓고 말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주호식의 얼굴에도 어느새 웃음기가 떠올라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