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4)
비는 한동안 그칠 줄을 몰랐고, 한가한 날들이 이어졌다. 덕분에 기적을 포함한 특수치료실 직원들은 유비무환이라는 말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비가 오니 도통 환자가 없는 것이다.
물론 환자의 발걸음이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비가 오는 가운데에도 새로이 찾아오는 환자들도 더러 있었다. 치료가 급한 환자들이었다.
띠링.
전자음과 함께 새로운 환자 차트가 넘어왔다. 마침 책상 앞에 앉아 있던 기적은 바로 마우스를 움직여 새로 넘어온 차트를 확인했다. 이에 따라 차트가 화면 가득 떠올랐다.
-이름 : 김중덕(만 62세)
-진단명 : Cerebella ataxia(소뇌성 운동 실조증)
"음…… 낙상으로 인한 소뇌성 운동 실조증…… 뇌수술을 하셨고…… 원인은 공사장에서 추락……."
새로이 넘어온 김중덕 환자는 공사장에서 일하다가 낙상 사고를 당해 머리에 충격을 받은 환자였다. 안전모를 착용했지만 워낙 높은 곳에서 떨어진 탓에 소뇌에 대미지를 입은 것이다.
소뇌는 여러 두뇌 중에서도 우리가 운동을 하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두뇌 중 하나이다. 특히 협응 운동에 많은 관여를 하기 때문에 이곳에 손상을 받으면 협조적인 움직임을 가져가기가 어렵다.
술 취한 사람처럼 휘청거리거나 원하는 곳에 발을 놓지 못하는 현상, 즉 운동 실조증이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운동 실조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는 치료가 굉장히 어렵다.
멘탈이 얼럿(정상)이라고는 나와 있지만 사실상 의사소통이 어렵기 때문에 동작 하나하나를 알려 줄 때마다 상당한 진통을 겪어야 한다.
시행착오를 거쳐 동작을 알려 줬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직접 만나 봐야 정확한 상태를 파악할 수 있겠지만 뇌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상태가 굉장히 복합적이고, 예후가 좋지 않을 확률이 높았다. 환자의 어려움을 나누는 난이도 같은 것은 없지만, 만약 있다면 소뇌성 운동 실조증 환자는 단연 최고 높은 곳에 위치할 터였다.
어두운 표정으로 차트를 읽어 내려가던 기적의 눈에 의아한 기색이 어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 그런데 특이한 이력이 있네? 김중덕 님 원래 한선 전자에서 일하셨었네? 이런 분이 왜 공사장에서 일을 하셨지?"
한선 전자라면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굴지의 대기업이었다. 당연히 받는 연봉도 상당하다. 굳이 높은 직위가 아니더라도 정년퇴직을 하셨다면 노후 자금 정도는 충분히 모을 여력이 되는 연봉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왜 공사장을 전전했을까?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기에? 기적은 그 점이 궁금했다. 그리고 그러한 의문을 품었을 때였다.
-퀘스트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가 주어집니다.
-목표 : 1. 환자가 독립적으로 스탠딩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만드세요.
2. 워커를 이용한 독립적 게이트를 가능하게 만드세요.
-보상 :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 대량의 포인트, 레벨 업 확정권 2장.
새로운 퀘스트가 떠올랐다.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라는 이름의 퀘스트였다.
기적은 올 것이 왔다는 표정이었다.
'어쩐지 사연이 있을 것 같더라니…… 여지없이 퀘스트가 주어지는구나.'
결코 쉽지는 않을 터였다. 소뇌성 운동 실조 환자를 독립적으로 서게 하고 걷게 만든다는 것은.
하지만 미리부터 겁먹을 필요는 없었다. 높아진 레벨 업 시스템과 함께라면 불가능은 없을 터였다.
'미리부터 겁을 집어먹을 필요는 없지. 그런데 보상이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라…… 스카우트 제의도 거절했는데 무슨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거지?'
기적은 그렇게 되물었지만 시스템은 대답이 없었다. 언제나처럼 스스로 알아내라는 의미였다.
'뭐 딱히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당장 내일부터 치료니까…… 오늘 열심히 준비를 해야겠네.'
기적은 자리에서 일어나 전공 서적을 열었다. 그리고 소뇌와 운동 실조증에 관한 공부를 시작했다. 시간은 충분했다.
다행히 장마로 인해 비어 있는 타임이 많았기 때문에 그는 그 시간을 고스란히 치료 계획을 세우는 데 투자했다.
치료를 하고, 또 빈타임에는 내일 받을 환자에 대한 공부를 하고.
그러다 보니 금세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다음 날 기적은 마침내 기다리던 환자 김중덕을 맞이했다.
'저분이 김중덕 님이구나.'
휠체어에 등을 기대고 들어오는 환자를 본 기적은 그 사람이 김중덕임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얼굴에 이름표가 붙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환자의 상태를 보고 이 사람이 운동 실조증을 가지고 있는 환자라는 것을 직감한 것이었다.
멀리서도 단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뚜렷한 뇌수술 흔적과 계속해서 떨리고 있는 진전 현상을 보고 그렇게 유추한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김중덕 님이시죠?"
그리고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휠체어를 밀고 오던 보호자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 김중덕 환자입니다. 이기적 실장님이신가요?"
보호자를 향해 네, 하고 대답한 기적은 이내 고개를 돌려 김중덕의 모습을 살폈다.
김중덕의 상태는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한쪽 두개골이 골절이 되었었는지 살짝 주저앉아 있었고, 안면 근육은 뒤틀려 있었으며 휠체어 받침대에 올리고 있는 팔과 다리의 근육 또한 심하게 뒤틀려 있었다.
기적은 침음을 흘리며 물었다.
"수술하신 지가 얼마나 되셨죠?"
그에 대한 대답은 역시 보호자로부터 나왔다.
"이제 두 달 정도 됐습니다. 대학병원에서 수술 받고 한 달하고 보름 정도 치료받다가 나가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병원 알아봐서 여기로 온 거예요. 여기 선생님들이 치료 잘해 주신다고 해서요."
기적은 그 말을 모두 들은 뒤에야 말을 이었다.
"두 달 정도 지나셨군요."
그렇게 말하는 기적의 표정이 어두워 보였을까? 보호자가 근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많이 안 좋은가요? 사실 대학 병원에서 두 달 가까이 있었는데 한 게 별로 없어서요. 이런 거는 빨리 치료받는 게 중요하다고 하던데……."
대학 병원은 응급 환자를 받아 수술을 하는 병원이다. 수술이 필요한 응급 환자가 계속해서 찾아오기 때문에 병상을 빠르게 회전시킬 필요가 있다.
그 때문에 대학 병원의 모든 포커스는 환자를 수술하고 빠르게 내보내는 것에 맞춰져 있다. 김중덕의 보호자가 별로 한 게 없다고 느끼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기적은 쓴웃음과 함께 그것에 대해 설명했다.
"대학 병원 같은 3차 병원은 계속해서 응급 환자를 받아서 수술해야 하니까요. 아무래도 빠르게 회전을 시킬 수밖에 없죠. 그 때문에 저희 같은 재활 병원이 있는 것이고요. 그리고 상태는…… 조금 더 평가를 해 봐야 알 것 같아요. 지금으로써는 뭐라 말씀드리기가 뭐합니다."
눈으로 본 김중덕의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시진일 뿐, 아직 제대로 된 평가는 하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확실하지도 않은 정보를 괜히 말해 환자를 불안하게 만들 필요는 없을 터였다. 때문에 기적은 말을 아꼈다.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는 마세요."
보호자와의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
기적은 김중덕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러고는 손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김중덕 님, 제 말 들리세요?"
그 목소리에 김중덕이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응답을 해온 것이다. 눈을 깜빡이는 정도를 생각했는데 반응이 기대 이상이었다.
"혹시 제 말 알아들으시겠어요? 오른 손 들어 보세요."
그 목소리는 김중덕을 움직이게 만들었다. 목소리에 맞춰 오른쪽 손을 들어 보인 것이다.
이로써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김중덕에게 말을 알아듣고 이에 맞춰 행동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무적인데? 인지 능력은 확실해. 그렇다면 언어 능력은 어떨까?'
기적은 김중덕의 언어 능력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말했다.
"김중덕 님,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김중덕은 이번에도 반응을 보였다. 입을 벌려 소리를 낸 것이다.
"마아아아알 하아아아 쑤우우 이이이있 으으으으."
사실 뭐라고 말하는지 알아듣기 힘든 목소리였다. 그래도 김중덕은 최선을 다해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려 하고 있었다.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렇게라도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은, 치료를 잘 받는다면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표정이 밝아진 기적이 평가지에 연신 동그라미를 적어 넣었다. 평가지에 동그라미가 많다는 것은 환자의 상태가 좋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지 평가를 마친 기적은 운동 능력 평가를 시작했다.
"자, 그럼 제 손을 한번 잡아 보실까요?"
기적의 목소리에 김중덕이 몸을 움직였다. 천천히 손을 뻗어 기적의 손을 잡은 것이다. 기적은 그 동작에서 긍정적 신호와 부정적 신호를 동시에 보았다.
일단 손을 뻗어 기적의 손을 잡았다는 것은 긍정적이었다. 그리고 그 손에서 작지 않은 힘이 느껴졌다는 것도 긍정적이었다.
다만 손을 움직일 때 나타난 심한 떨림 증상은 부정적이었다. 어떤 동작을 수행할 때 떨림 증상이 심해진다는 것은 김중덕의 운동 조절 능력이 그리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기적은 계속해서 평가를 진행했다. 슈파인 포지션(바로 누운 자세), 프론 포지션(엎드린 자세), 콰드리 자세(네발 기기 자세) 등 다양한 동작을 유도하며 동작 수행 능력을 평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서 기적은 답을 내렸다.
'콰드리 자세가 가능하네? 그렇다면 콰드리 자세에서 협응 능력을 향상시키는 훈련을 해 보자.'
콰드리 포지션은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는 자세다. 더구나 목 관절까지 컨트롤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협응 능력을 키우기 위한 최적의 포지션이라 할 수 있었다.
물론 아직까지 김중덕은 독립적으로 콰드리 포지션을 수행할 수 없었다. 콰드리 포지션을 만들기까지 많은 도움이 필요했고, 또 콰드리 포지션을 만들었다 해도 유지하는 데 그 이상의 서포트가 필요했다.
더구나 김중덕은 결코 작은 체구가 아니었다. 키도 기적 못지않았고, 덩치는 기적보다 훨씬 컸다. 콰드리 포지션이 앞뒤전후 어디로든 무너질 수 있는 자세라는 것을 감안하면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결코 쉬워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기적은 어렵지 않게 이 동작을 만들고 유지시켰다. 큰 힘을 쓰지 않고도 자신보다 덩치 큰 환자를 컨트롤할 수 있는 원동력은 기술이었다.
보통의 치료사라면 자꾸만 쓰러지려는 몸을 컨트롤하기 위해 애를 먹었을 터였다. 하지만 기적은 달랐다. 그는 몸을 컨트롤하는 대신 환자의 목을 컨트롤하는 것으로 콰드리 자세를 유지시켰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보호자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이 가득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불과 저번 주까지만 해도 남편을 담당했던 대학 병원 치료사들은 콰드리 자세를 만들지 못하고 애를 먹었으니까.
땀을 뻘뻘 흘리며 치료를 했지만 좀처럼 결과를 만들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치료사는 너무도 쉽게 콰드리 자세를 만들고, 또 유지시키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대학 병원에서 억지로 콰드리 포지션을 만들었을 때 치료사 못지않게 남편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불안해 보였고, 또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남편은 세상 편안한 표정으로 치료에 임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렇게 쉽게?"
기적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기에 그 질문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약 들었다면 이렇게 답했을 터였다. 중요한 것은 힘이 아니라 정확한 위치라고.
기적은 부드럽게 치료를 이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