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내가 있어야 할 곳 (9)
* * *
소래에 위치한 어느 소금밭.
바다와 맞닿은 그곳에서는 밀짚모자를 눌러쓴 노파 1명이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어지간한 일들은 모두 기계가 대신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여전히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일들이 남아 있었다. 예를 들자면 염전 일 같은 일들이다.
염전을 포함한 밭일은 사람의 노동력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와는 별개로 그 인력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더럽고(Dirty), 어렵고(Difficult), 위험하고(Dangerous).
소위 3D라고 불리는 직업들이 점차 외면받고 있는 시대다. 사람들은 편한 것, 쉬운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그래서 더 감사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를 대신해 힘든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거북이 등껍질처럼 나누어진 염전 위를 노파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한여름의 엄청난 고온, 그리고 짜증 나는 습기와 싸우면서, 대파를 밀어 소금을 모으고 있었다.
구슬 같은 땀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어쩌면 저 소금은 노파의 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이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이 노파는 지금으로부터 약 5주 전 인공 관절 수술을 받은 환자였다. 하지만 지금 이 노파는 믿기 힘들 정도로 좋아진 모습으로 염전 일을 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걷는 것은 물론 쪼그려 앉았다 일어나는 고난도 동작까지 무리 없이 수행해 냈다.
"인 씨! 아따 대파질 기가 막히네! 아픈 사람 맞는가 모르겄어?"
"그러게. 조금 쉬었다가 하지. 수술한 사람이 뭐이래? 정말 수술하고 온 거 맞아? 어디 놀러 갔다 온 거 아녀?"
"인 씨는 하늘이 내린 염부여! 기적이지, 기적."
인정선이 수술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인정선의 모습을 보고 '기적'이라고 수군거렸다.
그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사무실에 앉아 스마트폰을 통해 염전 일을 하는 인정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정선은 당연히 기적을 볼 수 없었지만, 기적이 이 동영상을 볼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었다.
기적은 잠시 대파질을 멈추고 카메라를 응시하는 인정선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부디 건강하시길. 그리고 그 자리를 오래오래 지켜 주시길.'
오늘도 기적은 가까운 곳에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콘서트 (1)
-출근길에 우산을 꼭 챙기셔야 할 것 같습니다. 태풍의 영향으로 전국에 많은 비와 바람이 예상되고 있는데요. 태풍의 직접 영향권에 드는 호남 지방은 태풍 경보가 발령된 상태고요. 서울 경기 역시 강풍주의보와 호우주의보가 발령된 상태입니다. 많은 비와 강풍으로 인한 피해 없도록 조심하셔야겠습니다.
기상 캐스터의 예보대로 아침부터 많은 비가 쏟아졌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폭우였기 때문에 기적은 옷이 흠뻑 젖은 후에야 병원에 들어설 수 있었다.
출입문을 열어젖힌 기적이 뒤에서 윤세진이 인사를 해 왔다.
"아이고, 실장님. 흠뻑 젖으셨네요? 걸어 오셨어요?"
"아…… 네. 세진 샘은 멀쩡하네요? 차 타고 왔나 봐요?"
"네. 저는 차 타고 왔죠. 덕분에 비 하나도 안 맞았어요."
다시 한 번 기적의 모습을 살핀 윤세진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실장님은 왜 차 안 사세요? 연봉도 많이 받으실 텐데…… 출퇴근하기 힘들지 않으세요?"
"연봉요? 생각보다 그렇게 안 많습니다. 글쎄…… 딱히 불편하다는 생각은 안 해 봤는데…… 오늘처럼 비가 쏟아지는 날은 좀 불편하기는 하네요."
기적은 구멍이라도 난 듯 비를 퍼붓는 하늘을 원망했다. 하지만 빗발치는 것은 비단 하늘에서 내리는 비뿐만이 아니었다. 업무가 시작하자마자 전화가 연이어 걸려 왔다.
-선생님, 죄송하지만 오늘 예약은 취소할게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오늘 예약 좀 취소하려고요. 비가 많이 와서 나가기가 힘드네요.
-선생님, 죄송해요. 오늘 예약 취소하겠습니다. 비는 그러려니 하는데 바람이 너무 많이 불어요. 겁나서 밖으로 못 나가겠어요.
예약을 취소한다는 전화였다. 태풍의 영향으로 외출이 힘들다는 것이 이유였다. 덕분에 기적과 특치실 팀원들은 모처럼 여유 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기적은 일부러 1층에 내려가 팀원들이 마실 커피를 사 왔다.
"다들 심심하시죠? 커피나 한 잔씩 하세요."
"와, 실장님! 감사합니다. 저희한테 시키셔도 되는데."
"별말씀을. 아무나 사 오면 어떻습니까? 맛있게 먹으면 그만이죠. 커피 사 오는 사람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 네."
사람들은 스툴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주요 주제는 지난 주말에 다녀왔던 염전 체험이었다.
"저는 동식 샘 회 먹는 거 보고 완전 감사했잖아요. 저번에 초밥 집에서 그래도 내 생각 해 줬구나 싶어서요."
"맞아요. 진정한 대식가 동식 샘."
"하지만 술은 잘 못 마시던데요? 반 병 정도 마시고 취해서 들어가 버리던데?"
"맞아요. 제가 술은 잘 못 합니다. 먹는 것만 잘 먹어요."
"정도 샘은 먹는 거나 술이나 존재감 제로. 저는 정도 샘 중간에 집에 간 줄 알았잖아요."
"술은 수정 샘이 잘 마시던데? 생각보다 주량이 엄청 세던데?"
사람들은 이제는 추억이 된 지난주를 회상하며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다.
반면 단 한 사람 강한수만큼은 시큰둥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염전 체험에 참가하지 않았던 그는 지금 이 순간 소외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깟 염전 체험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고. 집에서 쉰 내가 위너지.'
그는 그렇게 자기 합리화를 시도했지만 씁쓸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갈 때였다. 문이 열리며 40대 초반의 남자 1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입구에 앉아 있던 수정이 가장 먼저 달려가 남자를 맞이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그러나 남자는 대답을 하지 않고 치료실의 전경을 눈에 담는 일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수정이 다시 한 번 물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치료받으러 오셨나요?"
남자는 그제야 관찰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아! 어어. 치료받으러 왔는데…… 여기 혹시 이기적 실장이라고 있습니까? 그분 소문 듣고 왔는데?"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자 기적이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 남자에게 다가갔다.
"제가 이기적입니다만…… 치료받으러 오셨습니까?"
이번에도 남자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 초조한 모습으로 손가락을 움직여 목덜미를 긁어 댔다.
"음…… 저기…… 네. 한번 치료받아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치료 엄청 잘하신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그러세요? 저희는 원래 회원 가입 후, 예약제로 운영하는데요. 다행히 오늘은 환자가 없어서 바로 치료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 치료받고 가시겠습니까?"
버퍼링이라도 걸린 것일까? 아니면 원래부터 신중한 성격인 것일까? 남자는 좀처럼 곧바로 대답하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남자는 잠시의 시간 차를 두고 그 말에 대답했다.
"일단 오늘 받아 보고 회원 가입은 나중에 하고 싶은데 괜찮습니까?"
"그래도 되시는데요. 비회원으로 하시면 여러 혜택을 못 받으시는데 괜찮으세요?"
"네, 뭐. 오늘은 그냥 비회원으로 해 보고 싶네요."
"그럼 그렇게 하셔도 됩니다. 그런데 일단은 병원에 접수를 하시고 진단을 받으셔야 해요. 가셔서 특수치료실 이기적 실장에게 치료받고 싶으시다고 말씀하시면 처방 내 주실 거예요."
"아…… 그렇습니까?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다시 한 번 치료실을 눈에 담은 뒤 멀어져 갔다. 그리고 그로부터 15분 뒤, 남자, 즉 최병렬의 차트가 넘어왔고, 그로부터 다시 5분 뒤 최병렬이 치료실에 모습을 드러냈다.
기적은 베드에 걸터앉은 최병렬을 향해 물었다.
"목이 아프다고 하시던데 정확히 어떻게 아프신지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음…… 네? 아, 뭐라고 해야 할까요? 목을 돌리는 게 조금 불편하고…… 잠을 조금만 잘못 자도 오른쪽 목 언저리에 담이 들어서요. 그 부분에 대해서 좀 치료받고 싶습니다."
"아, 그러세요? 담이 자주 드시는군요."
기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치료를 시작하기에 앞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와 대략적인 치료 계획을 먼저 설명해 주었다.
"근육은 수많은 섬유 다발과 이를 싸고 있는 근막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염좌, 타박 등의 부상을 당하면 바로 이 섬유와 근막이 손상을 당하게 되는 거죠. 근막과 극히 일부의 섬유만 손상을 당하면 1도, 근섬유의 손상이 보다 심하면 2도, 아주 심하면 3도……. 뭐 이런 식으로 손상 정도를 나누죠. 그런데 한 번 다치면 손상된 근막과 근섬유들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습니다. 근막이 늘어난 상태로 있거나 끊어진 일부 근섬유들이 회복되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게 되죠. 한 번 다친 곳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온전한 종이는 쉽게 찢어지지 않지만 끝부분이 살짝 찢어져 있으면 쉽게 찢을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죠. 목이 자꾸 다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조금만 장력이 들어와도 그 부분이 찢어지는 거죠. 일단은 아픈 곳 주변의 근육들을 이완시키는 치료를 할 거예요. 장력이 들어와도 쉽게 스트레스를 받지 않도록요. 이쪽으로 누워 보세요."
최병렬을 베드에 눕힌 기적은 손가락을 짚어 손상된 근육이 움직이지 않도록 고정한 뒤, 반대쪽 손으로 움직임을 유도했다.
"제가 미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려고 해 보세요.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고개를 돌려 보세요."
기적은 그렇게 치료를 진행하면서 틈틈이 치료에 도움이 되는 말들을 해 주었다.
"혹시 높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지는 않나요? 사실 척추 건강에는 베개가 없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하지만 불편하기 때문에 베개를 베는 것이죠. 가능한 한 베개의 높이를 낮춰 보세요."
"기능성 베개는 어떻습니까? 광고를 보면 좋은 기능성 베개가 많던데요? 증상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까요?"
"글쎄요. 확신하기 힘듭니다. 사람마다 척추 라인이나 골격의 크기가 전부 다르잖아요. 사실 광고와 전혀 다른 제품들도 많이 있고요. 기능성 베개라고는 해도 효과를 확신하기는 힘듭니다. 저는 그냥 높이가 낮은 베개를 베고 주무시는 걸 추천드려요."
친절한 모습에 최병렬은 만족하는 모습이었다.
"선생님이 목소리도 아주 좋으시고, 설명도 잘해 주시고, 손기술도 좋으시고. 소문이란 게 원래 과장되기 마련인데 선생님 소문은 오히려 축소된 것 같습니다."
칭찬을 듣는 기적의 표정은 평온해 보였다. 자신을 좋게 말해 주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평온했던 그의 표정이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흡족하게 치료를 받던 최병렬이 조심스럽게 꺼낸 말 때문이었다.
"선생님 정도면 연봉 엄청 많이 받으시겠습니다? 한 5천 이상은 받으시죠?"
기적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난데없이 연봉을 묻는 남자의 저의를 헤아리기 힘들었던 것이다.
"연봉은 근로계약서에 의거해서 비밀을 유지하기로 되어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해 드리기 힘들겠네요."
최병렬은 다소 민망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오래지 않아 다시 입을 열었다. 보다 노골적인 질문이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