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내가 있어야 할 곳 (7)
* * *
"기적 실장은 스틱 차도 잘 모네?"
"네. 면허증이 1종 보통이기도 하고…… 학원을 거의 안 다니고 주로 아빠한테 배웠어요. 아빠가 농사를 지으시니까 트럭이 있으시거든요. 그걸 가끔 몰다 보니까 스틱에 익숙해진 거죠."
일을 마치고 저녁 식사를 하러 가는 길.
일행은 순조로운 이동을 위해 자동차를 렌트했다. 시간제로 빌리는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해 차를 빌린 것이다.
번거로운 작업은 필요 없었다. 직원을 만날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 어플을 이용해 차를 선택하고, 결제만 하면 바로 차를 몰 수 있게끔 되어 있었으니까.
문제는 인원수였다. 사람이 모두 7명이나 되다 보니 대형차가 필요했는데, 하필이면 차가 스틱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바로 그때 기적이 나섰다. 면허증이 1종 보통이라 스틱도 문제없다는 말과 함께였다. 이 순간 기적이 차를 몰고 있는 이유였다.
"진짜 못 하는 게 뭐야? 대체 왜 하는 것마다 잘하는 거냐고! 자괴감이 느껴질 정도야, 자괴감이."
장원호가 절규하듯이 말했다. 기적은 멋쩍은 표정으로 핸들을 돌렸다.
"불과 몇 개월 전만 해도 잘하는 것 하나 없는 비루한 인생이었는데요. 아시다시피 제가 힐링 센터 운영했었잖아요. 그때 센터에 파리만 날려서 정말 힘들었었어요. 그런데 이 병원 오고 나서 일이 이렇게 잘 풀리네요."
모두 레벨 업 시스템을 얻은 뒤 생긴 변화였다. 우연히 얻은 레벨 업 시스템은 그에게 새로운 인생을 선물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를 알 리 없는 장원호는 고개를 갸웃했다.
"맞다. 기적 실장, 센터 운영했었다고 했지? 그런데 파리만 날렸다고? 이상하네, 기적 실장 실력이면 그럴 리가 없을 텐데?"
"글쎄요. 그때는 제가 치료를 참 못 했어요. 환자의 말은 무시하고…… 자가당착에 빠져서 치료를 했다고나 할까? 쉽게 말해 건방졌던 거죠. 그런데 지금은 조금 달라졌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해서 그런가? 보이는 것도 많아졌고, 환자 맞춤식 치료를 하다 보니 다행히 환자들도 좋아하는 것 같아요."
"음…… 그러니까 환자를 나에게 맞추는 게 아니라 나를 환자에게 맞춘다는 건가?"
"그렇죠. 치료사들은 이런 성향이 있어요.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과 치료법에 환자를 끼워 맞추려고 하는 거요. 그게 실력이 모자라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실력을 과신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면 안 되겠더라고요."
"음…… 반반이라고 봐야겠지. 나도 느끼는 게 많네. 맞는 말이야."
고개를 끄덕인 장원호가 작은 목소리로 넌지시 물었다.
"그런데 기적 실장,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혹시 센터 다시 차릴 생각은 없어?"
"네? 센터요?"
"그래, 사실 지금 운영하는 특수치료실이 센터나 별반 차이 없잖아. 차리면 돈도 엄청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쩌면 1년 연봉을 한 달에 벌어들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음…… 글쎄요? 지금은 병원에 있는 게 좋아요. 사람들하고 지내는 것도 만족스럽고, 다양한 환자들 만나 볼 수 있다는 점도 메리트고요. 다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니까요. 솔직히 말해 다시 센터를 차리는 것도 생각 안 해 본 거는 아니에요. 언제 갑자기 센터를 차릴 지도 모르는 일이죠."
"그렇구나."
기적과 장원호가 센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차는 목적지에 다다랐다. 주여진으로부터 소개받아 예약해 둔 회집에 도착한 것이다.
기적은 능숙한 후진 실력을 뽐내며 차를 주차했고, 덕분에 또 한 번 사람들의 탄성을 들으며 횟집에 입성할 수 있었다.
"이쪽으로 오세요. 예약하신 방으로 안내해 드릴게요."
횟집 안 인테리어는 그렇게 좋지도, 그렇다고 나쁘지도 않은, 딱 중간 정도였다. 주변을 둘러본 장원호가 그 점을 지적했다.
"인테리어는 굉장히 평범하네. 여기 정말 맛집 맞나?"
"그러게요. 굉장히 평범하네요. 비린내도 살짝 나는 것 같고."
그러나 그의 그런 걱정은 오래지 않아 사라졌다. 주전부리가 큰 상을 가득 메우고, 메인 디시라 할 수 있는 회가 나오자 사람들의 표정은 완전히 달라졌다.
"와, 이 가격에 이게 가능한가?"
"주전부리만 해도 가격 나올 것 같은데?"
"그럼 회는 공짜로 먹는 셈인가?"
사람들은 흡족한 표정으로 식사를 시작했다. 특히 맹동식의 활약이 눈에 띄었다.
치료실 내에서 대식가로 활약하고 있는 그는 이날도 쉴 틈 없이 음식을 입속으로 집어넣으며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 이유에 대해 맹동식은 이렇게 항변했다.
"원래도 많이 먹지만 오늘은 고된 노동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그에 맞게 먹어 줘야죠."
기적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분주히 젓가락을 움직였다, 옆자리에 앉은 수정과 간간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런데 두 사람의 분위기가 조금은 어색해 보였다.
"맛이 괜찮아요?"
"아…… 네."
대화 자체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도 단문 단답식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이런 분위기는 단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었다. 두 사람이 밤늦게까지 문자를 주고받은 이후부터 쭉 이어져 온 현상이었다.
밤늦게까지 신나게 대화를 주고 받아놓고, 막상 그다음 날 얼굴을 본 이후로는 좀처럼 편하게 대화를 하지 못하는 것이다.
기적은 주로 맞은편에 앉은 장원호와 이야기를 나누었고, 수정 역시 맞은편에 앉은 최진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배가 터지도록 식사를 마친 다음에는 다시 차를 타고 예약해 둔 숙소로 이동했다. 바다가 보이는 데다 테라스까지 딸려 있는 최고급 펜션이었다.
"와, 펜션 진짜 좋아요."
"개인 스파도 있어요. 저 스파 완전 좋아하는데."
펜션을 둘러보며 만족감을 표하기도 잠시, 사람들은 곧 2차를 시작했다.
횟집에서 순배를 돌리며 흥을 돋운 사람들은 마룻바닥에 둘러앉아 본격적으로 흥을 올리기 시작했다.
마음에 맞는 사람들끼리 모였기 때문인지 분위기는 더없이 화기애애했다.
기적 또한 기분 좋게 술잔을 꺾었다. 운전을 하느라 횟집에서 술을 마시지 못한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알코올을 섭취했다.
오고 가는 술잔 속에서 분위기는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술기운이 오른 기적은 적당한 순간, 자리에서 빠져나와 테라스에 나왔다.
소금기 가득한 바닷바람, 밤하늘의 별은 너무 많아서 쏟아지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 취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할 정도의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기적은 말없이 그 모습을 감상했다. 소래의 밤하늘이 만들어 낸 경치에 제대로 취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였다.
"실장님, 혼자서 뭐 하세요?"
퍼뜩 상념에서 깨어나 뒤를 돌아보니 정수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술에 취한 것인지, 분위기에 취한 것인지, 트레이드마크인 루돌프 사슴코를 한 채로였다.
기적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경치가 좋아서요. 술도 깰 겸 잠깐 바람 좀 쐬고 있었어요."
"아,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수정이 어쩐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좋아하세요?"
"네?"
갑작스러운 질문에 기적은 심히 당황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눈으로 묻자 수정이 웃으며 앞을 가리켰다.
"좋아하시냐고요, 바다요."
"아…… 바다요?"
몸에 잔뜩 들어갔던 힘이 스르륵 빠지는 것을 느끼며 기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하죠, 바다 좋잖아요. 대낮의 바다도 좋고, 밤에 보는 바다도 좋고, 한여름의 바다도 좋고, 겨울 바다도 좋고."
"저도 좋아해요. 다……."
고개를 끄덕이는 수정의 얼굴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기적 또한 그러한 변화를 눈치 챘다.
'어쩐지 수정 샘, 얼굴이 붉어진 것 같은데…….'
하지만 그 사실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수정의 얼굴이 빨갛게 보이는 것이 테라스의 조명 때문이라 여긴 것이었다.
"좋아한다니 다행이네요. 멀리까지 왔는데 좋아하지 않으면 곤란하잖아요."
수정이 곧바로 이에 대답했다.
"좋아하니까 왔죠. 좋아하지 않았으면 오지도 않았을 거예요."
주어가 없는 좋다는 말에 야릇한 느낌이 드는 것은 어째서일까? 어쩐지 빨라진 것 같은 심장박동을 늦추기 위해 기적은 심호흡을 했다. 후욱, 후욱, 가슴이 안정되는 것을 느끼며 그가 말했다.
"이제 들어가죠. 바닷바람이라 그런지 생각보다 차갑네요."
"네, 그래요."
대화를 마친 둘은 안으로 들어가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이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진 상태였다. 노동으로 인한 피로감 때문인지 생각보다 일찍 자리를 파한 것이었다.
둘이서 얼마의 술을 마셨을까?
"수정 샘, 괜찮아요?"
"네에, 괜찮아요. 저 한 병 반 정도는 마셔요."
어느 순간부터 수정의 얼굴에 확연한 취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의 주량을 마시지 않았음에도 취기를 보이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일어나 소래까지 달려왔다. 또 뜨거운 햇빛 아래서 염전 일을 했다. 하루를 타이트하게 보내고 술까지 마셨으니 평소보다 빠르게 취기가 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수정 샘, 이만 들어가서 쉬는 게 좋겠어요."
"아니에요, 저 더 마실 수 있어요."
수정이 원래부터 이렇게 술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한 병 반이라는 주량은 부모님으로부터 좋은 간을 물려받은 덕분이지 음주를 즐기기 때문이 아니었다.
당연히 평소라면 이렇게 과음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다만 기분 좋게 술을 마셨고, 이에 따라 흥이 올랐을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함께하고 있는 사람이 기적이었다.
기적은 새 병을 까려는 수정을 뜯어말렸다.
"그거 이리 줘요. 오늘은 진짜 그만 마시는 게 좋겠어요. 그거 새로 까면 누가 다 마셔요."
수정은 그런 기적의 손을 피해 술병을 휙 돌렸다. 살짝 초점이 풀린 눈으로 그녀가 말했다.
"따악 한 잔만 더 마실게요."
"안 돼요, 수정 샘 더 마시면 안 될 것 같아요."
잘라 말한 기적이 다시 술병을 빼앗으려 손을 뻗었다. 그런데 수정이 몸을 움직이는 바람에 조준이 빗나가고 말았다. 기적은 술병 대신 수정의 손을 움켜잡고 말았다.
"……."
"……!"
바로 그 순간, 옆 펜션에서 들려오던 음악이 멈췄다. 잠시 시간이 멈춘 듯했다. 사람들은 모두 잠에 빠져들어 있었고, 두 사람은 마치 석상처럼 굳어 그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자세 때문일까?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의 얼굴은 닿을 듯 가까워져 있었다. 서로가 내뱉는 입김이 느껴질 정도였다.
"……."
"……!"
바로 그때였다. 화장실의 문이 열리며 최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깜짝 놀란 수정은 그대로 기적을 밀어 버렸고, 기적은 술병을 품에 안은 채로 넘어지고 말았다.
"실장님, 많이 취하셨어요? 술병 끌어안고 뭐 하세요?"
기적은 튕기듯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아닙니다. 취하긴요. 보세요, 아주 멀쩡합니다."
"그래요? 근데 왜 누워서 뒹굴고 계세요?"
다행히 최진아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보지 못한 듯했다.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수정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앉은 그녀가 미니 종이컵을 뽑아 들었다.
"아직 안 취하셨으면 저랑 한잔 더 해요. 저 아직 술이 고파요. 저기 저분이 저렇게 일찌감치 뻗어 버려서요."
슬쩍 시선을 돌려 소파에 뻗어 잠을 자고 있는 장원호의 모습을 본 기적은 말없이 술병을 열었다.
그러고는 최진아가 들어 올린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술을 받은 최진아는 기적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고, 수정의 잔에도 술을 채워 주려다 이내 동작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수정 샘은 얼굴이 왜 이렇게 달아올랐어? 원래는 코만 빨개지잖아? 취해서 그런가? 어머, 그런데 그 와중에 이 미모는 뭐야? 생얼 실화야?"
"네? 아니에요……."
수정은 당황한 듯 고개를 숙였고, 최진아는 피식 웃었다.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 그냥 칭찬하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린 최진아가 창문 밖으로 보이는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밤하늘 죽이네요. 예술이다, 진짜."
그 말에 기적은 시선을 돌려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소래의 밤하늘은 더없이 검고 높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