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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84화 (84/205)

# 84

내가 있어야 할 곳 (5)

기적은 평소보다 조금 늦은 출근을 했다. 수정과 메시지를 주고받다 늦게 잠자리에 든 여파였다, 물론 여전히 빠른 시간이기에 문제는 없었지만.

"다음 지하철을 탔는데도 8시 33분인가?"

시간을 확인한 그는 회전문을 지나 안으로 들어섰다.

언제나처럼 병원은 활기가 넘쳤다. 출근을 하는 직원들과, 이미 출근해서 업무를 시작한 직원들, 그리고 환자들과 그 보호자들이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기적이 병원의 활기찬 아침을 감상하며 걸음을 옮길 때였다. 병원 내 카페에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고개를 돌리니 인정선의 보호자 주여진이 밝게 웃으며 서 있었다. 기적은 반갑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모닝커피 한 잔 하시는 중인가 봐요?"

"네네. 선생님도 한 잔 하실래요?"

"아니요. 저는 올라가서 마시면 됩니다. 맛있게 드세요."

웃으며 고개를 저은 기적이 다시 걸음을 옮기려 할 때였다. 주여진이 다시 그를 붙잡았다.

"시간 괜찮으시면 한 잔 드시고 가세요. 제가 한 잔 사 드리고 싶어서요. 엄마한테 너무 잘해 주셔서 항상 감사했거든요. 커피 한 잔은 김영란법에도 안 걸리잖아요?"

기적은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잘 마시겠습니다. 저는 콜드브루 마실게요."

주여진은 웃으며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면서 둘은 자연스레 인정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엄마가 많이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선생님이 매번 달라진 각도를 보여 주시니까 엄마도 덜 조급해하는 것 같아요."

기적이 멋쩍게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할 일인데요, 뭐. 그런데 염전 일을 인정선 님 혼자서 하시나 봐요?"

"네, 엄마가 모든 걸 혼자서 하세요."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주여진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염전 일이 제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하던 일이래요. 그걸 저희 할아버지가 이어받고 다시 아빠가 이어받으셨는데……."

거기까지 말한 주여진은 두 번 헛기침을 한 이후에 말을 이었다.

"아빠가 5년 전에 돌아가셨거든요. 평생 일만 하다가 건강이 악화되셔서 돌아가신 거죠."

주여진의 목소리는 점차 무겁게 변해 갔다.

"그리고 일을 이어받으신 게 엄마예요. 가업을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로 시작하신 거죠. 아실지 모르겠지만 염전 일이라는 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결국 엄마 무릎도 탈이 난 거예요……. 진작 수술을 받으셨어야 하는데 5, 6, 7, 8월이 염전 일 피크라는 이유로 미루고 미루다 이 지경까지 온 거죠. 수술도 겨우겨우 했는데 지금도 매일 돌아가야 한다고 난리예요. 본인이 있어야 할 곳은 염전이라고……."

주여진의 말을 들은 기적은 떠올렸다.

"그런 사연이 있었군요. 내내 궁금하긴 했습니다. 엄살이 심하고, 겁이 많고, 게다가 아픈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어떻게 무릎이 이 지경이 되도록 치료를 받지 않았을까? 대체 어떻게 살아오셨기에? 하고 말입니다."

그동안 품고 있었던 의구심들을.

주여진이 울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엄마가 유달리 겁도 많고…… 손가락에 가시 하나만 박혀도 못 참아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까지 된 걸 보면…… 자식으로서 고개를 들지 못하겠네요."

"무슨 말씀을요. 어머니가 아프실 때 이렇게 와서 간병을 할 수 있는 자식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일이 바빠서, 아이를 키우느라, 집이 멀어서, 변명을 늘어놓기 바쁘죠. 보호자분은 지금 충분히 효도를 하고 계신 거예요."

기적은 잠깐의 시간 차를 두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사실 인정선 님의 그런 모습을 나쁘게만 볼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요. 인정선 님처럼 항상 그 자리를 지켜 주시는 분이 계시기에 저희가 이렇게 불편함 없이 살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기적의 위로에 주여진이 언제 그랬냐는 듯 큭큭 웃었다.

"아 진짜 나이 많은 내가 선생님에게 해야 할 말을 선생님이 저한테 하고 있네요. 따뜻한 위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거기까지 이야기했을 때였다. 테이블 가운데 놓여 있던 진동벨이 지이잉 진동을 토해 냈다. 그리고 그 소리는 두 사람을 감상에서 깨어나게 만들었다.

"어머, 벌써 커피가 나왔네요. 바쁘신 분 붙잡고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했나 봐요."

"아닙니다. 그러면 계속 좋은 시간 보내세요. 커피는 제가 받아서 가겠습니다."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였다.

기적은 진동벨을 집어 들었고, 직원에게 시원한 커피를 받아 카페를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선 기적은 커피를 쭉 빨아들였다. 그러자 차가운 커피가 그의 골을 울리며 정신을 번쩍 들게 만들었다. 한 가지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아? 그거 괜찮겠는데?'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던 기적이 다시 카페를 향해 몸을 돌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향해 몸을 돌렸다.

'일단은 사람들에게 동의를 구하는 것이 먼저겠지.'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때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엘리베이터의 목적지는 특수치료실이 있는 3층이었다.

"염전 체험요?"

윤세진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되물었다. 염전 체험이라는 기적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기적은 그런 그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제 환자 중에 염전 일을 하시는 분이 있는데, 지금 일을 못 해서 마음이 조급하신가 봐요. 우리가 야유회 겸 가서 일을 좀 도와드리고 바닷가 간 김에 맛있는 회도 먹고, 놀고 오려고 하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글쎄요. 그쪽이랑은 이야기가 된 거예요?"

"아니요. 선생님들한테 한 번씩 물어보고 갈 의사가 있는 사람이 몇 명인지 확인한 다음에 그쪽에 물어보려고요."

"아……."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윤세진이 말을 이었다.

"식비랑 숙박비 같은 거는 병원에서 대 주는 거죠? 그럼 저는 갈 생각 있어요. 뭐, 언제 제가 염전 체험을 해 보겠어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그 말에 기적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사실 어떻게 받아들일까 많이 걱정했는데, 좋게 생각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선생님이 다른 선생님들에게 의견 물어봐 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물어보면 혹시라도 부담을 가지실까 봐요."

"네, 그럴게요. 대신에 강한수 선생님에게는 실장님이 물어봐 주세요. 그분……은 좀 어려워요."

"아, 알겠습니다. 강 선생님께는 제가 여쭤볼게요."

윤세진과의 대화는 그것으로 종료.

이어 기적은 강한수를 찾아가 윤세진에게 했던 말을 반복했다. 물론 돌아온 대답은 그리 긍정적이지 않았다.

"업무 외 시간인데 꼭 참석해야 하는 겁니까? 꼭 참석해야 하는 게 아니면 참석하지 않겠습니다. 개인 시간이니까요."

결국 기적은 빠르게 설득을 포기했다. 강한수의 까칠한 태도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결코 강요할 수 없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대신 기적은 다른 곳을 찾아갔다.

"뭐? 염전 체험? 거기 가면 오징어 회 사 주나?"

오징어를 사랑하는 장원호였다. 물론 오징어 정도야 얼마든지 사 줄 의향이 있었다.

"보고서를 만들어서 원장님께 정식으로 보고하고 허락을 받을 생각입니다. 그러면 모든 비용이 법인 카드로 해결될 겁니다."

"오? 정말? 진아 샘은 어때?"

"저도 좋아요. 1박 2일 재미있을 것 같은데요?"

그리고 오래지 않아, 윤세진이 염전 체험에 참여할 인원들을 알려 주었다.

"실장님, 저랑 임 선생님, 그리고 수정 샘이랑, 동식 샘 모두 가기로 했어요."

그렇게 염전 체험에 참여할 인원이 모두 결정되었다. 기적을 필두로 윤세진, 임정도, 정수정, 맹동식 5명에 장원호, 최진아까지 총 7명이었다.

기적은 자신의 계획을 치료를 위해 내려온 인정선과 보호자에게 알려 주었다.

"염전 일을 해 주시겠다고요?"

"네. 저희가 염전 일은 할 줄 모르지만 그래도 인원이 7명이나 되잖아요. 인정선 님과 보호자 분께서 옆에서 코치해 주시면 저희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인정선과 보호자는 당황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죄송해서 어떻게 그래요? 말도 안 돼요. 마음만 고맙게 받을게요."

"그랴. 자네들은 힘들어서 못 해. 염전 일이 얼마나 힘든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여."

그러나 기적도 물러서지 않았다.

"저희도 하루 일하고 저녁부터는 신나게 놀 생각으로 가는 거니까요. 단합 대회 성격이니까 부담 가지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이래 봬도 제가 농부의 아들입니다. 똑같은 밭일 아닙니까? 시켜만 주시면 일 잘할 수 있습니다."

염전도 결국은 전(田)이다. 기적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설득력이 있었던 것일까? 인정선의 표정도 살짝 변했다.

여세를 몰아 기적이 말을 이었다.

"염전 일 때문에 마음이 너무 조급하시잖아요. 인정선 님도 한번 가서 염전 보고 하면, 기분 전환이 되지 않겠어요? 소래면 그렇게 멀지도 않고…… 게다가 지금이 한창 소금이 많이 나올 시기라면서요. 저희가 많이 부족하지만 그래도 그냥 두는 것 보다는 낫지 않겠어요?"

주여진은 여전히 말도 안 된다는 표정이었지만 인정선은 조금 달랐다.

"어, 언제 시간이 되시는데?"

"뭐 빠르면 이번 주말이나 다음 주말 정도요?"

"그러면 그냥 체험한다는 생각으로 오실래요? 염전 일이 어떤 일이다 맛보는 정도면은 괜찮을 것 같은데."

거기까지 말한 인정선이 주여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바람도 좀 쐬고. 병원이랑 너희 집만 왔다 갔다 했더니 너무 답답해."

"그래도 엄마, 너무 실례인데……."

"아니에요. 저희 이미 가기로 다 정했어요. 거기 못 가게 되면 그냥 소래포구라도 가려고요. 가고 싶은 사람만 가는 거니까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흠……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그럼 이번 주가 될지 다음 주가 될지 정해서 알려 드릴게요."

치료를 끝낸 기적은 단체 방에 7명의 사람들을 초대해 괜찮은 날짜를 상의했다. 그 결과 3일 뒤인 이번 주 토요일에 출발하는 것으로 결정이 났다.

기적은 그 즉시 명의진에게 보고할 보고서를 작성했다. 그냥 사적으로 가는 것보다는 이렇게 병원에 보고를 하고 승인을 받아 움직이는 편이 여행 경비나 보험 등을 지원받을 수 있어 좋았다.

"됐다!"

양식에 맞춰 보고서를 작성한 기적은 그 길로 원장실을 찾아갔다. 보고서를 받은 명의진은 오래지 않아 의미를 알 수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머쓱해진 기적이 말했다.

"아무래도 사적인 체험이라 지원이 힘들까요?"

명의진이 여전히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실장님도 어지간히 엉뚱한 사람이네요. 허허허."

기적은 살짝 당황한 얼굴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아무래도 지원이 힘든가 보네요."

그러자 명의진이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을 이었다.

"제가 병원장으로 일한 지 벌써 10년이 넘었습니다. 그동안 정말 많은 동아리 활동이나 여가 활동 보고서를 받아 봤는데, 염전 체험을 하겠다는 보고서는 처음 받아 봤습니다. 더구나 담당하는 환자분의 염전에 가겠다니…… 취지가 너무 좋지 않습니까, 취지가. 어떻게 매번 이런 생각을 해 냅니까? 제가 신경내과는 아니지만 진짜 머릿속에 뭐가 들어 있나 해부해 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너무 섬뜩한가요? 허허허."

"뭐 그렇게 거창한 뜻이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환자분을 조금이라도 도와드리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그러니까 더 엉뚱하다는 말입니다. 사심 없이 한 일이라는 말이 아닙니까? 어떤 치료사가 있어 환자의 염전 일을 도와주러 소래까지 가겠다는 생각을 하겠습니까? 이건 누가 시켜도 못 합니다. 그냥 실장님이 그런 사람인 거지요. 지원해 드려야지요. 얼마든지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가서 일도 열심히 하고 맛있는 것도 실컷 드시고 오세요."

기적은 그저 머리만 긁적였다. 그냥 겸사겸사 계획한 일인데 과한 칭찬을 듣는 것 같아 멋쩍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그가 명성 병원에 입사하고 지금까지 해온 일들이 평범한 사람들로서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들이라는 것을.

명의진의 말대로 이기적이라는 사람이기에 가능했던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기적의 활약은 현재진행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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