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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83화 (83/205)

# 83

내가 있어야 할 곳 (4)

기적과 주호식의 눈에 띈 인물은 장원호와 최진아였다. 한쪽에 자리를 잡은 두 사람이 달달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우리 근데 언제까지 이렇게 몰래 만나야 돼? 그냥 공개 연애하면 안 돼? 사내 연애 좋잖아, 낭만적이고."

"낭만은 무슨 낭만요. 놀림만 잔뜩 당하지. 걸릴 때까지는 지금처럼 몰래 만나요."

"마음에 영 안 드네. 이 사람이 내 여자다, 이 여자가 내 사람이다 왜 말을 못 하게 하냐고!"

입을 삐죽 내민 장원호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그러니까 최 샘이 장 팀장 여자다, 이거지?"

난데없이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에 장원호와 최진아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주호식과 기적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사랑에 취해, 술에 취해 붉게 달아올랐던 두 사람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하게 변해 버렸다.

"시, 실장님!"

반면 주호식과 기적의 얼굴에는 숨길 수 없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재미있다는 듯 웃으며 주호식이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 봐, 좀 앉게. 이 실장이랑 술 한잔하러 왔는데 합석해도 되지?"

"아, 예."

주호식과 기적이 자리에 앉고 주변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장원호와 최진아의 얼굴에 떠오른 당혹감은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재미난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만면에 웃음기를 매단 주호식이 말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 뭐야? 계속해 봐."

장원호는 안주로 나온 오징어만 잘근잘근 씹었고, 최진아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릴없이 시간만 흘러가는데 기적이 불쑥 입을 열었다.

"두 분이 연인 사이인 줄은 몰랐네요. 정말 축하드립니다. 솔직히 두 분이 되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거든요."

그 말이 용기를 준 것일까? 오징어만 질겅질겅 씹어 대던 장원호가 에라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 우리 사귀는 거 맞아."

기적을 향해 말한 그는 주호식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실장님, 우리 사귀는 거 맞습니다. 안 그래도 언제 말해야 하나 고민 중이었는데, 차라리 잘됐습니다. 속 시원하게 공개하게 돼서 말입니다."

"어허? 장 팀장 패기 보게? 하긴 함께 일하다 보면 눈이 맞기 마련이지. 나도 사실은 사내 커플이었어, 두 번째 병원에서."

"그래요?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요?"

"안 물어봤잖아?"

"그야 그렇죠. 그러면 여기 전부 사내 커플이네요? 여기 기적 실장만 빼고."

장원호가 자연스레 기적을 도마에 올렸다. 핀치에서 탈출하기 위해 기적을 희생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는 효과를 발휘했다.

"그러고 보니 이 실장은 여자 친구 없어?"

기적은 손을 들어 점원에게 소주잔 2개를 요구한 뒤 대답했다.

"지금은 없습니다."

주호식은 없다는 말보다 지금이라는 말에 주목했다.

"'지금은'이라는 말은…… 얼마 전까지는 있었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마침 술잔이 날라져 왔고, 기적은 주호식의 술잔에 술을 채워 주며 말했다.

"10년 사귄 여자 친구가 있었는데, 이 병원 오기 전에 헤어졌습니다."

가볍게 던진 질문이 무거운 돌직구가 되어 돌아오자 일동은 당황했다.

"어? 그런 일이 있었어? 나는 몰랐지……."

주호식이 당황한 얼굴로 둘러댔다. 그러나 기적은 괜찮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다 지난 일인데요. 지금은 잘 헤어졌다고 생각하는 중입니다. 술이나 한 잔 주세요."

주호식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술을 따라 주었고, 장원호는 특유의 밝은 목소리로 기적을 달랬다.

"그래그래. 그런 노랫말도 있잖아.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죠~ 떠난 이에게 노래하세요."

말로 시작한 장원호의 목소리는 노래로 끝이 나고 있었다. 잔망스러운 바이브에 최진아가 이마에 손을 척 올렸다.

"제발 적당히 좀 하세요, 적당히. 어떻게 매번 적당히를 몰라."

"내가 뭘? 위로해 준 거잖아."

주호식도 아찔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었다.

"……어이! 그만하고 술이나 받으라고. 이 이야기 비밀로 하고 싶으면 이 실장에게 잘해야 할 것 아냐?"

"아…… 기적 실장, 진짜 위로하려고 한 말이야. 오해하지 마."

장원호는 끝까지 잔망미를 발산한 뒤에야 술잔을 들어 올렸다.

쫄쫄쫄 각자의 잔에 술이 차올랐고, 넷은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주도한 것은 주호식이었다.

"며칠 전에 간부 회의를 했는데 말이야. 요 앞 양재 역 근처에 올리고 있는 빌딩 있잖아. 거기 요양 병원이 생길 예정이라고 하더라고. 엄청나게 돈을 투자했다는 것 같던데……. 앞으로 힘들어질지도 모르겠어."

"아…… 그 건물 저도 오가다가 봤습니다. 거의 다 지어지지 않았나요?"

장원호의 말에 주호식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고 하더라고. 실내 인테리어도 하고 해야 하니까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겠지만은……. 그렇게 멀진 않은 것 같아. 아무래도 우리 병원에 타격이 있겠지."

물론 요양 병원과 재활 병원은 영역이 다르다. 요양 병원은 말 그대로 요양을 하는 곳이고, 재활 병원은 재활을 하기 위한 곳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다른 것은 아니다. 주요 환자가 노인이라는 점과 어디까지나 환자를 상대하는 병원이라는 점에서 두 병원은 교집합을 이룰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재활 병원과 요양 병원이 붙으면 요양 병원이 승리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기적의 입을 통해서 밝혀졌다.

"요양 병원이 재활 병원보다 국가 지원금이 훨씬 많잖아요. 골치 아프게 생겼네요?"

"그렇지. 물량 공세로 나오면 피곤해질 수도 있어. 뭐 우리 재단도 돈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그것도 그러네요."

네 사람의 얼굴에 급격히 그림자가 드리웠다. 무거워진 주변의 공기를 느꼈을까? 주호식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뭐 미리부터 걱정할 필요는 없지. 오늘은 즐겁게 술이나 마시자고."

이후로 네 사람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는 결국 병원 이야기로 귀결되었다. 네 사람의 공통분모가 병원밖에 없는 탓이었다.

오늘 유독 조용했던 최진아가 말했다.

"수정 샘이랑 동식 샘은 잘하고 있나요? 못 본 지도 꽤 된 것 같아요."

"아, 물론이죠. 엄청 잘하고 있습니다. 워낙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라 120% 몫을 다 하고 있어요."

기적이 그렇게 답했을 때였다. 눈치 빠른 최진아가 어? 하며 눈을 빛냈다.

"어? 그런데 실장님 왜 웃으세요?"

"네? 제가 웃었나요? 어…… 뭐 잘하고 있으니까 뿌듯해서 저도 모르게 웃었나 봐요."

"혹시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다른 이유요? 무슨 다른 이유요?"

고개를 갸웃하는 기적을 향해 대답한 것은 장원호였다. 무엇이 그리도 궁금했는지 찰나의 순간을 자르고 들어온 것이었다.

"두 사람이 영화관에 들어가는 것을 봤다는 이야기가 들리던데? 이거 진짜야?"

순간 기적은 실감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는 말을. 그리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 말은 쥐가 듣는다는 말을.

동시에 그는 고민에 빠져들었다. 모르쇠로 나서야 할지, 인정을 해야 할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와, 그걸 누가 봤대요? 맞습니다. 영화 보러 갔었습니다."

"헐! 진짜였네? 단둘이 영화 보러 갔으면 게임 끝난 거 아냐?"

장원호가 그렇게 말하자, 최진아가 거들었다.

"수정 샘 사람 괜찮죠…… 흔히 말하는 얼굴 돼, 몸매 돼, 머리 좋아, 싹싹해, 어디 하나 흠 잡을 데가 없잖아요. 말하다 보니 기분 나쁘네요? 너무 사기 캐릭터 아니에요?"

주호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실장도 꿀리지 않잖아? 얼굴 돼, 키 커, 능력 있어, 성격 좋아. 이쪽도 만만치 않은 사기 캐릭터인데?"

"그러네요. 기적 실장이 처음에는 그렇게 잘생긴 줄 몰랐는데 요즘에는 엄청 훈훈해졌어요. 원래 이렇게 훈훈했나 싶을 정도로…… 비결이 뭐야?"

치고 들어갈 틈을 노리고 있던 기적이 겨우 입을 열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영화 한 편 본 겁니다. 때마침 1+1 쿠폰이 도착했고, 우연히 보고 싶은 영화가 똑같아서 신기해서 본 거예요. 정말 그게 다입니다."

기적은 자초지종을 설명했지만 최진아를 납득시키기에는 부족한 모양이었다.

"아니 실장님, 여자 마음을 너무 모르시네. 우리 여자들은요, 1+1 쿠폰이 아니라 무료 쿠폰 100만 장이 있어도 마음 없는 남자랑은 영화관에 안 가요. 그것도 단둘이서? 더더욱 안 가죠."

"에이,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거죠. 우리는 그런 사이 아니에요."

최진아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두드렸다.

"실장님, 진짜 답답하네요? 주인공 심리 뭐 그런 건가요? 그래서 연예 땡땡 콘셉트로 나가시는 거예요?"

"내가 그거라니…… 그거라니……."

기적은 최진아와 장원호의 연속 공격에 당혹감을 금치 못하며 주호식을 바라보았다.

무언가 도움을 요청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러나 주호식은 그런 기적의 기대를 저버렸다.

"잘해 봐. 사내 커플 의외로 나쁘지 않아. 내가 보증할게."

기적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장원호와 최진아에게 맞춰져 있던 포커스는 어느새 기적에게로 넘어와 있었다.

간단한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

기적은 연신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렸다. 술자리 내내 수정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인지 수정에 대한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고 있었다.

분명 오늘 모임을 나가기 전까지는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괜히 신경이 쓰였다.

'연락을 한번 해 볼까?'

스마트폰 화면에는 수정의 톡 프로필 화면이 떠올라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함께 일한 지가 꽤 되었지만 한 번도 따로 연락을 해 본 적은 없었다.

기적은 대화 창을 열어 메시지를 적었다.

-수정 샘, 자요?

하지만 오래지 않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메시지를 지워 버렸다.

'딱히 할 말도 없는데, 연락하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시간도 늦었고.'

현재 시간은 9시 30분.

밤잠이 없어 늦잠을 잔다던 수정의 말을 생각하면 실례가 될 시간은 아니었지만 기적은 그렇게 스마트폰을 닫아 버렸다. 그런데 그때였다.

지이잉.

일순 스마트폰에 진동이 들어오며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 메시지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정수정이었다.

-실장님, 바쁘세요?

기적은 흠칫 놀라 답장을 적어 넣었다.

-아닙니다. 무슨 일이세요?

-뭐 하고 계셨어요? 제가 다다음주가 교육이잖아요. 그래서 뭐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서요.

-아, 저 주호식 실장님하고 술 한잔하고, 이제 집에 가는 길이었어요. 뭔지는 모르겠지만 물어보세요.

처음에만 해도 둘은 그렇게 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주제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하지만 교육에 대한 이야기가 끝났음에도 둘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기가 무섭게 진동이 울리고, 다시 답장을 적고, 다시 진동이 울리는 상황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대화 자체는 당장 끊어져도 이상할 것 없는 내용이었지만, 메시지의 끝을 잡고 계속해서 대화가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기적은 집에 도착했고, 노란색이던 배터리는 빨간색으로 변해 버렸다.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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