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내가 있어야 할 곳 (3)
첫날부터 실력을 보여 준 효과는 다음 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이어졌다. 한 번 형성된 라포는 점점 두터워졌고, 인정선은 기적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왔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무릎 상태가 좋아지니 없던 신뢰도 생길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치료를 할수록 기적에게는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하루가 다르게 좋아지고 있는데도 인정선은 이상하리만치 조급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동기 부여 차원을 넘어서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마저 풍겼기에 기적은 더는 미루지 못하고 질문을 던졌다. 조급함이 화를 부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정선 님, 엄청 빨리 낫고 싶으신가 봐요. 굉장히 열심히 하시네요?"
조심스레 묻자 인정선이 두말할 필요 있느냐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씀을 하십니꼬? 당연히 빨리 낫고 싶지요. 아닌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음…… 그거야 그렇지만……. 너무 조급하신 것 같아서요. 이렇게 하다가 자칫 잘못될까 봐 걱정돼서 드리는 말씀이에요."
그제야 기적이 말하는 바를 눈치챈 인정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거야 그렇지요. 그런데 내가 마음이 급한 거는 어찌 알았대요? 진짜 귀신같네."
"그거야 행동을 보면 다 보이니까요. 혹시 특별한 이유가 있으세요?"
"있지, 있고말고."
멀찍이 서 있는 딸을 슬쩍 살핀 인정선이 이내 이유를 털어놓았다.
"내가 염전 일 하는 거는 알지요?"
"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빨리 집으로 돌아가야 돼요. 그래야 대파를 밀 것 아니요."
"대파를 밀어요? 대파가 뭐예요? 먹는 파는 아닐 것 같고……."
"염전 일 할 때 소금 모으는 기구. 내가 빨리 집에 가서 그걸 밀어야 해. 지금도 놀고 있는 염전만 생각하면 속이 타들어 가요."
"아…… 염전 일이요? 누가 대신해 줄 분은 없고요?"
"없지, 없어. 그 힘든 일을 누가 있어 대신해 줘. 내가 빨리 돌아가야 해. 10월까지가 소금 생산 철인데…… 한창때 염전을 놀리고 있으니 통탄할 일이지 뭐예요. 내 마음 같아서는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고 싶은데."
"아직은 안 돼요. 무릎이 완전히 구부러지고 또 완전히 펴지려면 시간이 더 필요해요."
"무릎 좀 안 굽혀지고 안 펴지면 어때? 지금도 걷는 데는 문제없잖아요?"
"문제 있죠. 걸음걸이가 이상해지고, 걸음도 효율적이지가 않게 돼요."
"걷기만 하면 되지, 효율은 또 뭐단가? 내가 뭐 걷기 대회에 나갈 것도 아니고."
대화가 점차 이상한 쪽으로 빠질 때였다. 뒤에서 따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또 염전 얘기하고 있지? 그 얘기 좀 그만하라고 했어, 안 했어? 그게 뭐가 그렇게 중요해? 엄마 걷는 게 중요하지!"
딸이자 보호자, 주여진이었다.
그러나 인정선도 그냥 물러나지 않았다.
"중요하지, 그럼. 우리 집 삼대를 이어 온 가업인데. 내 걸음보다 더 중요해."
"어휴~ 저 고집 정말."
고개를 절래 절래 저은 주여진이 이내 기적을 향해 말했다.
"저 염전 얘기만 나오면 지긋지긋해요, 정말. 그만하고 팔아 버리지 무슨 영광을 보겠다고 붙잡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 염전 때문에……."
주여진은 무슨 말인가를 더 하려 했으나 이내 말을 돌려 버렸다.
"아무튼 염전 때문에 퇴원한다고 하기만 해 봐. 진짜 가만히 안 있을 줄 알아!"
주여진은 그렇게 으름장을 놓았고, 인정선은 가슴이 답답했는지 길게 한숨을 내쉬었으며, 기적은 어쩔 줄을 몰라 눈치만 살폈다.
이상한 삼각 구도가 깨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 치료실의 문이 열리며 남자 1명이 나타났다. 명석한이었다. 하얀 가운을 휘저으며 들어온 그는 곧장 기적 쪽으로 다가왔다.
"치료 잘하고 있는지 보러 왔습니다. 인정선 님, 좀 어떠세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담당하고 있는 환자인 인정선을 보러 온 모양이었다.
"좋아졌지요. 처음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요, 여기 선생님이 워낙 잘해 주니까는."
인정선이 기적을 가리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가락을 따라가던 석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뭐? 좋아진 게 나 때문이 아니라 저 녀석 때문이라고……? 이 할머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야?'
심기가 상한 석한이 기적을 바라보았다. 손에 들고 있던 차트를 넘기며 그가 물었다.
"아무래도 이상해서 왔습니다."
"뭐가 이상하다는 말입니까?"
"MMT, 근력 평가 말입니다. 어떻게 무릎 수술을 한 환자의 그레이드가 이렇게 좋을 수가 있죠? 나이도 있으신 분인데? 제대로 측정한 것 맞습니까? 도대체 이게 가능한 등급이에요?"
석한은 따지듯이 물었으나 기적은 태연하기만 했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근력이 나올 수가 없죠. 인정선 님은 특이한 케이스로 봐야 합니다. 워낙에 근력이 좋으셔서 실제로 이러한 근력이 나옵니다."
물리치료사와 의사 간에 흔히 있는 의견 다툼이었다. 의사가 주로 의학적 근거 같은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는 반면, 물리치료사는 직접 환자의 몸을 만지고 이를 통해 주관적인 정보를 얻기 때문에 도출해 내는 결과가 다소 차이가 나는 것이다.
얼핏 보면 의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는 의사의 말이 무조건 맞는 것처럼 보인다.
말 그대로 의학적 근거를 두고 있으니까. 주관적인 판단을 내리는 물리치료사보다는 정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의학적 근거라는 것이 항상 맞는 것은 아니다. 척추 디스크(추간원판 탈출증)로 수술한 환자를 예로 들면 이해가 편하다.
디스크(추간원판 탈출증)란 디스크 사이에서 윤활제 역할을 하는 디스크가 변형을 일으켜 주변 신경을 건드리며 생기는 질환이다.
그 때문에 탈출된 디스크를 잘라 내면 통증이 사라져야 맞다. 의학적 사실에 근거를 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수술을 했음에도 계속해서 통증에 시달리는 환자들이 많다. 의학적으로는 통증이 사라져야 맞지만 그렇지 않은 것이다.
물론 의학 이론이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환자 개인마다 차이가 존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의사들은 그러한 사실을 무시하는 경우가 많다. 명석한의 경우도 그랬다.
"실제로 이런 근력이 나온다? 그건 실장님의 개인적인 의견이 아닙니까? 의학적 소견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럴 경우 물리치료사는 난감할 수밖에 없다. 환자마다 차이가 있다는 것을 설명할 근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기적이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할 때였다.
"그럼 의사 양반이 직접 해 보면 알 거 아니유. 내가 근력이 약한지 강한지. 직접 손 대고 만져 보더라고. 내 몸에 손 한번 안 대 봤으면서, 매일같이 내 몸을 만지는 선생님보다 잘 안다고?"
인정선이 그렇게 말했다. 약간은 고조된 목소리에서 조금 전에 딸과의 대화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의 여파가 느껴지는 듯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공격에 명석한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지금 의학적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거잖습니까?"
그는 그렇게 외쳤으나 그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스스로 생각해 보아도 인정선의 몸을 만져 본 기억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래서일까? 명석한을 바라보는 인정선과 보호자 주여진의 시선은 싸늘하기만 했다.
'이 인간들이? 의사를 대체 뭐로 보고!'
앞서도 말했지만 병원의 서비스 만족도는 서비스의 대명사라 할 수 있는 호텔을 능가하는 수준까지 올라간 상태였다.
이는 명성 병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병원장 명의진은 직원들에게 친절, 친절, 친절을 강조한다.
하지만 명석한이 나온 서울대 병원은 사정이 달랐다. 우선 교수들부터 내 말이 곧 법이라는 권위주의로 똘똘 뭉쳐 있기 때문에, 이들로부터 보고 배운 석한 또한 권위주의로 똘똘 뭉칠 수밖에 없었다.
"의사는 접니다. 환자분은 제 지시를 따라야 해요. 아시겠습니까?"
물론 여기는 서울대 병원이 아니라 명성 병원이었다. 곧바로 주여진의 반격이 들어왔다.
"정 불편하시면 담당의를 바꿔 달라고 컴플레인을 할게요.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낫겠네요."
주여진이 컴플레인이라는 무기를 꺼내 들자 석한의 눈빛이 흔들렸다.
공식적으로 컴플레인을 받게 되면 아무리 과장의 비호를 받는 그라고 하더라도 인사 고과에서 감점을 당할 수밖에 없으니까. 이는 그가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물론 석한의 자존심은 그 정도에 꺾일 만한 것이 아니었다.
"마음대로 하세요. 컴플레인을 하든지 말든지."
불쾌하다는 듯 쏘아붙인 석한이 신경질적으로 몸을 돌려 치료실을 나섰다.
"어머? 뭐 저런 사람이 다 있어? 진짜 별일이네."
"그러게. 의사가 뭐 어쨌다는겨? 환자가 먼저 아닌겨?"
주여진과 인정선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기적 또한 안타까운 표정으로 작게 뇌까렸다.
'너…… 정말 가지가지 하는구나…….'
하루 일과를 마친 기적은 치료실을 나섰다. 언제나처럼 차트를 확인하고, 문단속을 마친 그는, 퇴근 도장을 찍은 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때였다. 걸음을 옮기는 그를 부르는 반가운 목소리가 있었다.
"이 실장!"
목소리의 주인공은 주호식이었다.
"지금 퇴근하는 거야?"
정말 오랜만에 만남이었기에 기적은 반갑게 인사했다.
"실장님! 네, 지금 퇴근하는 중입니다. 실장님도 지금 퇴근하시는 중입니까?"
"어어, 나도 퇴근 중이지. 퇴근이 좀 늦네?"
"네. 이것저것 정리하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둘은 이야기를 나누며 자연스레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손목시계를 확인하며 주호식이 말했다.
"이 실장, 혹시 일 없으면 간단하게 한잔 어때? 오랜만에 술 한잔이 당기네."
"어? 그럴까요? 마침 저도 약속 없습니다."
"그래, 그러자고. 내가 잘 아는 데 있거든. 거기 분위기가 좋아. 안주도 맛있고."
"그럼 그리로 가시죠."
그렇게 둘은 주호식이 자주 가는 단골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단골집은 병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더운 날씨에 지쳐 천천히 걸음을 옮겼음에도 채 5분이 지나지 않아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로 된 인테리어를 자랑하는 일본식 선술집이었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옆에는 못 보던 분이시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사장이 알은체를 해 왔다.
그런데 기적이 사장님의 응대를 보지 않고,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주호식이 그런 기적을 채근했다.
"이 실장, 어딜 그렇게 보고 있어. 사장님이 인사하……."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기적이 바라보고 있는 곳을 본 직후였다.
"뭐야, 저거? 저 두 사람 내가 아는 두 사람 맞지?"
기적이 여전히 눈을 떼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것 같은데요? 그런데 저 두 분은 뭘 하고 있는 걸까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요?"
"나만 그렇게 생각한 거 아니지? 어쩐지 둘이 맨날 붙어 다닌다 했더니 이유가 있었구먼."
전장에 나서는 장수처럼 소매를 걷어 올린 주호식의 발걸음은 예의 두 사람을 향해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