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내가 있어야 할 곳 (2)
"저희 어머님께서 소개시켜 준 친구인데 유학 마치고 한국에 온 지가 얼마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명의진의 말 때문이었다. 그가 말하는 석한의 여자 친구는 차지은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기적의 얼굴이 굳었다.
굳이 묻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명석한이 바람을 피우고 있거나, 아니면 차지은과는 이미 헤어졌거나. 둘 중 하나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
마음 같아서야 당장 연락해서 이것저것 캐묻고 싶었다. 번호는 이미 지워 버렸지만 뇌리에는 번호가 선명하게 남아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미 끝난 사이야. 다시는 얽히지 않는 편이 서로에게 좋아.'
기적이 그렇게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일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혹시 힘든 점이 있으세요?"
명의진이었다.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기적이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주변을 살피자 김철용이 웃으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원장님이 새로 입사한 강한수 선생님은 잘 적응하고 계시냐고 물어보시는데요? 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문화적으로 힘든 부분이 있지 않느냐고요."
아무래도 기적은 꽤 오랜 시간, 또 꽤나 깊숙이 상념에 빠져든 모양이었다. 기적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강한수 선생님이야 잘 적응하고 있지요. 오가며 치료하는 것도 봤는데 치료도 잘하시더라고요. 역시 RPT를 폼으로 딴 건 아닌가 봅니다."
명의진이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잘 적응하고 있다니 다행이네요. 하긴 뭐 미국에서 있었다고 해 봐야 머문 기간이 겨우 3년 정도니까요. 문화적으로 그렇게 힘든 부분은 없겠네요."
그 말에 기적이 아연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3년이라고 하셨습니까?"
"예. 제가 알기로는 3년이 조금 안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왜요,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기적은 아아…… 하고 묘한 탄성을 내뱉었다. 무슨 말만하면 미국에서는 이렇게 한다는 강한수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아…… 그렇군요. 아닙니다, 문제는 없습니다. 저는 그것보다는 오래된 줄 알았거든요. 미국에서 살다 온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하셔서요."
"그래요? 허허, 아마 제가 맞을 겁니다. 직접 들은 이야기니까요."
명의진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노크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철가방을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배달시켰던 음식이 도착한 것이었다.
이후로는 기다렸던 식사가 진행되었다. 명의진과 김철용, 그리고 허선경은 즐겁게 음식을 먹으며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단 한 사람, 기적의 표정만큼은 그리 밝지 못했다. 많은 생각들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 * *
다음 날.
기적은 새로운 환자를 받았다. 퀘스트의 주인공 인정선이었다.
"실장님이시죠? 인정선 환자 내려왔습니다."
어제 만났던 보호자가 밝게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인정선도 늦지 않게 인사를 해 왔다.
"아프지 않게 잘 부탁혀요. 나는 시상에서 아픈 게 제일 싫은 사람이니까는."
보호자가 웃으며 부연 설명을 했다.
"엄마가 겁이 많으셔서…… 엄살도 엄청 심하시고. 다리 꺾는 과정이 그렇게 아프다는 말이 많아서 엄마가 겁을 엄청 먹으셨어요."
그러나 기적은 웃을 수 없었다. 엄살이 심하고 겁이 많고, 게다가 아픈 게 세상에서 제일 싫은 사람이 어떻게 무릎이 이 지경이 되도록 치료를 받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고통을 참아야만 했던 걸까? 도대체 무슨 사연이 있기에?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 묻지는 않았다. 아직 환자와의 라포 형성도 되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다짜고짜 그런 질문을 던진다고 해도 제대로 된 대답이 돌아올 확률은 높지 않았다. 일단은 라포를 형성하는 것이 먼저였다.
"물론이죠. 통증은 몸이 보내는 신호입니다. 이 이상 하면 몸에 문제가 생길 수 있으니 하지 말라는 거죠. 그걸 무시하고 치료를 하는 것은 엄청난 위험 수를 두는 겁니다. 통증이 발생하는 것을 무시하고 치료하는 것은 옛날식 치료예요. 요즘에는 절대 아프게 안 합니다."
가끔 보면 통증을 무시하고 무조건 꺾는 물리치료사들이 있다. 이것은 굉장히 위험한 방식이다. 누구라도 그런 치료를 받는 사람이 있다면 당장 병원을 옮겨야 한다.
일단 인정선을 안심시킨 기적이 대신! 하고 당부의 말을 전했다.
"대신에 정말 열심히 따라오셔야 해요. 게으름 피우지 마시고 열심히 하셔야 해요. 그러면 제가 책임지고 낫게 해 드릴게요."
인정선이 한결 편안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프지만 않다면야 열심히 하지 않을 이유가 있습니꼬. 당연히 열심히 해야지."
"좋습니다, 그럼 간단한 평가부터 시작해 볼까요?"
그 말과 함께 평가가 시작되었다. 기적은 인정선의 겉모습을 스캔하는 것으로 평가를 시작했다. 무언가를 발견한 그가 눈을 빛내며 질문을 던졌다.
"혹시 인정선 님, 지금 어디서 살고 계세요?"
"지금은 딸네 집이 요 근처라 거기 와 있고, 원래는 인천 소래에 살아요."
"아, 소래요? 혹시 염전 일 하세요?"
그 말에 인정선과 그 딸이 깜짝 놀라 반문했다.
"어떻게 알았대요?"
"와, 어떻게 아셨어요? 혹시 신기 있으세요?"
물론 기적은 신기가 있어 이를 맞춘 것이 아니었다. 다만 인정선의 얼굴이 심하게 그을렸고, 소래라는 곳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염전지였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찍어 봤을 뿐이었다. 정말 맞을 줄은 그 역시 몰랐다.
"어? 정말 염전 일 하세요? 얼굴이 많이 타셨고, 소래에 사신다기에 찍어 봤는데. 정말 맞을 줄은 몰랐네요."
"와, 선생님. 관찰력 완전 소름 돋네요. 역시 괜히 유명하신 게 아니네요. 환자들을 많이 대한 흔적이 묻어나네요."
수많은 환자를 대하는 기적에게는 별것 아닌 일이었지만, 이런 경험이 별로 없는 보호자와 인정선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모녀는 여전히 놀란 얼굴로 기적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다면 흐름을 이어 갈 필요가 있었다. 쾌조의 스타트를 끊은 기적이 본격적인 평가를 시작했다.
"우선은 관절 가동 범위랑 근력 평가를 할 거예요."
시작은 역시 ROM 검사와 MMT 검사였다.
여기서 ROM 검사는 Range Of Motion의 약자로 관절 가동 범위, 그러니까 각 관절의 각도를 측정하는 것이었고, MMT는 Manual Muscle Test의 약자로 환자의 전신 근력을 평가하는 검사였다.
또한 MMT는 그레이드 제로부터 노멀까지 6단계로 나누어지는데 그 단계는 다음과 같다.
ZERO : 근육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상태. 시진, 촉진 불가.
TRACE : 약간의 수축만 있는 상태.
POOR : 중력을 제거한 상태에서 전 관절 가동 범위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시 3단계로 나눠지기도 한다).
FAIR : 중력하에 놓인 상태에서 전 관절 가동 범위를 움직일 수 있는 상태(다시 3단계로 나눠지기도 한다).
GOOD : 중력하에 놓인 상태에서 전 관절 가동 범위를 움직일 수 있고, 어느 정도의 저항을 이겨 낼 수 있는 상태.
NORMAL : 중력하에 놓인 상태에서 전 관절 가동 범위를 움직임은 물론 최대한의 저항을 이겨 낼 수 있는 상태.
명확하게 단계가 나누어져 있지만 MMT는 논란의 여지가 많은 검사였다.
매뉴얼 머슬 테스트라는 말처럼 전적으로 치료사의 주관적인 판단에 의지하기 때문에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기적 역시 기적 나름대로 평가를 하고 결과를 적어 넣었다.
"무릎 관절의 가동 범위가 90도가 채 못 되네요. 인공 관절 수술을 받고, 4주 정도 되신 분이 일반적으로 100도 가까이 나오시거든요? 그러니까 인정선 님은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안 좋으신 편이에요."
안 좋다는 말에 인정선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실망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기적이 바로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을 덧붙였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근력 상태가 좋아요. 아마도 염전 일을 꾸준히 하셔서 그런 것 같은데…… 아무튼 근력이 좋다는 거는 엄청난 호재거든요? 지금은 각도가 조금 안 나오지만 근력이 좋기 때문에 능동 운동을 하실 때 효과가 잘 나올 거예요. 그러니까 결론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다는 말입니다."
아무래도 약 주고 병 주는 것보다는, 병 주고 약 주는 것이 나은 모양인지 어두워졌던 인정선의 얼굴은 금세 다시 밝아졌다. 그것은 인정선의 말투에서 잘 드러났다.
"아…… 다행이네요.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처음에만 해도 반말과 존대를 오가던 인정선의 말투는 어느새 극존칭으로 변해 있었다. 기적과 치료를 시작한 지 채 20분이 못 되어 일어난 변화였다.
기적이 자연스레 평가를 이어 나갔다.
"다른 방법으로 각도 평가를 해 볼게요. 일어서 보세요."
그렇게 말한 그가 미리 준비해 두었던 치료 도구를 인정선의 앞에 설치했다. 바닥에 미끄럼 방지 기능이 있는 네모난 보드 판이었다.
"이쪽에 왼쪽 다리 먼저 올리고, 무릎을 최대한 구부려 보세요. 그러니까 펜싱할 때 찌르듯이 체중을 왼쪽 다리에 실어보는 거예요."
"아……."
그제야 무슨 말인지 이해한 인정선이 동작에 들어갔다.
기적은 인정선이 좋은 모습을 보여 줄 것이라 생각했다. 각이 적게 나오긴 했지만 근력이 좋으니 이번 동작에서는 일반적인 경우보다 더 각도가 나오리라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인정선의 다리 각도는 그의 기대에 훨씬 못 미치고 있었다.
기적은 즉시 원인 파악에 나섰다.
'다리가 떨리지는 않아. 그렇다는 것은 아직 힘이 달리는 단계는 아니라는 건데…… 겁이 많으시다고 했는데…… 아무래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
하나의 가설을 세운 기적이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고는 인정선의 무릎을 살짝 보조해 주었다.
"자, 다시 해 볼게요."
아니나 다를까? 기적의 예상은 적중했다. 인정선의 무릎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각도를 만들고 있었다.
"와, 각도가 훨씬 좋아졌네요? 보세요. 제가 이렇게 손을 떼도 아무 상관없죠?"
기적이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인정선은 손을 뗀다는 말에 살짝 당황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이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기적의 표정은 여전히 침중했다. 이전과 비교해 훨씬 각도가 좋아졌지만 여전히 그가 원하는 각도는 나오지 않고 있었다.
'음…….'
다시 한 번 기적의 매직 아이가 열일을 시작했다. 그러고는 오래지 않아 해답을 내놓았다. 도구함에서 길쭉한 막대를 가지고 온 그가 말했다.
"진짜로 펜싱을 한다고 생각하고 해 보세요. 이걸 펜싱 칼이라고 생각하시고 진짜 찌른다는 생각으로 한번 동작을 해 보세요."
그렇게 말한 기적이 막대를 인정선에게 넘겼고, 막대를 넘겨받은 인정선은 정말로 펜싱을 하듯 앞으로 막대를 내밀었다.
그러자 또 한 번 변화가 일어났다. 인정선의 무릎이 또 한 번 새로운 수준의 각도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축구공을 찰 때 양손을 붙이고 하면 공을 멀리 차지 못하지만 팔 스윙을 함께 하면 더 멀리 찰 수 있다는 점을 인용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효과가 나오고 있었다.
이를 느꼈는지 보호자가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엄마! 순식간에 무릎 각도가 확 좋아졌어!"
인정선도 그것을 느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좋아진 거지? 내가 보기에도 그런 것 같아."
인정선과 보호자가 경외심이 담긴 눈빛으로 기적을 올려다보았다. 치료를 시작한 지 불과 30분 만에 태도가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단 한 번. 기적이 환자와 라포를 형성하는 데는 단 한 번의 치료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