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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76화 (76/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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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은 현대판 고려장? (4)

"첫째가 사업 때문에 돈이 급한 모양이야. 아무도 살지 않는 집, 그냥 팔아버리자고 하더라고. 부모가 자식들 주는 거야 아까울 것 하나 없지.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하지만 이 집은 그럴 수가 없는 집이야."

"무슨 사연이 있는 집인가 봐요?"

"있다면 있는 집이지. 영감이랑 내가 같이 노후를 보내려고 지은 집이니까. 이 집은 먼저 간 영감과 나에게는 아주 특별한 집이야.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아들놈이 그런 말을 하니까 기가 막힐 수밖에 없지. 그 집을 팔면 나는 어디로 돌아가느냐 말이야."

기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고길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어제 찾아온 둘째 놈도 처음에는 제 형을 말리는가 싶더니 그새 돌아서서 제몫으로 얼마가 떨어질지를 걱정하더란 말이야. 내가 이 꼴을 보려고 두 아들놈을 키웠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더라고."

어느 순간부터 고길자의 목소리에서는 물기가 베어 나고 있었다.

"이제 나도 돈이 별로 없어. 여생 겨우 먹고살 만큼만 남았어. 그런데 그 사실을 아들들한테 말할 수가 없어. 왜인지 알아?"

기적은 그 대답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들어 봤을 때 두 아들들이 어떻게 변할지를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니까. 자신의 할아버지가 그랬듯이, 고길자 또한 같은 노선을 밟게 될 확률이 높았다.

약간의 시간 차를 두고 고길자가 말을 이었다.

"나한테 돈이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리고 이제 이 집마저 팔리고 나면 아들들이 어떻게 변할까 걱정이 되는 거야. 나 너무 우습지?"

고길자는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자조 섞인 웃음을 지었다.

"오늘따라 먼저 간 영감 생각이 나네. 우리 영감이 있었다면 이리 되지 않았을 텐데. 뭐가 그리 급해 먼저 갔수, 왜 이리 급히 갔느냐고! 다 내 잘못이야. 다 내가 지은 죄야."

남편에 대한 원망일까? 아니면 그리움일까?

고길자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지은 죄가 크다는 고길자의 그 말은 틀렸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푸는 것이 죄가 된다면 세상의 부모들은 대부분 무기징역 또는 사형을 선고받아야 할 테니까.

"자식에게 한없이 해 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 어떻게 죄가 되나요? 죄가 있다면 그런 부모의 마음을 이용한 자식이 잘못이지."

그렇게 말한 기적이 손을 뻗어 고길자의 두툼한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집이니까 집을 팔자고요? 그럼 고길자 님이 얼른 퇴원하셔서 그 집에서 사시면 되겠네요. 가만있어 보자. 그럼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겠는데? 빨리 치료받으셔야겠어요."

과장된 동작으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적의 너스레에 고길자가 빙그레 웃었다. 이전과는 달리 진정성이 느껴지는 미소였다.

오전 치료를 끝낸 기적은 팀원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했다.

특수치료실 실장으로 부임한 기적은 가급적 아침 조회와 종례를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사람들이 출퇴근 시간을 여유 있게 쓸 수 있도록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다만 전달 사항을 전달할 시간은 필요했다. 때문에 기적은 그 대안으로 점심시간을 활용했다. 함께 점심을 먹으며 자연스레 전달 사항을 전달하는 방식이었다.

"이제 치료실도 안정을 찾은 것 같고 해서 다음 주부터 스터디를 시작하려고 하는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정수정이 가장 먼저 대답했다.

"너무 좋아요! 안 그래도 교육이 절실했거든요. 그러면 기존 치료실처럼 수요일 저녁에 하는 건가요?"

"일단은 수요일을 생각하고 있는데요. 혹시나 선생님들 중에 수요일에 시간이 안 되시는 분 계신가요?"

그 말에 정수정, 맹동식, 윤세진, 임정도가 이구동성으로 '없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강한수만큼은 이의를 제기했다.

"그런데 그 교육 무조건 참석해야 하는 겁니까? 근무 외 시간인데도요?"

"아닙니다. 참여하기 싫으시면 참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말씀하신 대로 업무 외 시간이니까요."

"그러면 저는 빠지겠습니다. 제가 저녁에 스케줄이 있어서요."

"일이 있다면 하는 수 없죠. 그렇게 하세요."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다른 사람에게도 의중을 물었다.

"혹시 일이 있으신 분은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아니…… 일이 없으셔도 하기 싫으신 분은 그냥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업무 외 시간이니까요."

그러나 4명은 약속이라도 한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저는 무조건 들을 거예요. 돈 주고도 못 듣는 교육인데요."

"저도요. 어차피 돈 내고도 들으러 다니는 교육인데 실장님한테 배울 수 있으면 완전 감사한 일이죠."

"이하동문입니다. 실장님 교육은 돈 내고도 못 받는 교육이죠."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강한수의 표정은 심드렁했다.

'누가 보면 어느 종교 교주라도 되는 줄 알겠네. 치료 그렇게 잘하지도 못하던데 뭘 저렇게 신격화하지? 딸랑이 짓도 적당히 해야지…… 과유불급이라는 말 모르나? 쯧쯧'

그가 보기에 기적의 실력은 자신보다 한참 아래였다. 아니 애초에 비교하는 것조차 자존심이 상했다.

치료실에서 환자에게 마사지를 하고, 10분 넘게 앉아 이야기만 나누다 치료를 끝내는 치료사와 자신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라 생각했다.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치료라고 할 수 있나? 신개념 치료야, 뭐야? 날로 먹는 것도 정도껏 해야지.'

그러나 그의 그런 마음과는 다르게 치료사들은 적극적이기만 했다.

"그런데 교육은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요?"

"일단은 저희 5명이서 한 주씩 자신이 담당하는 환자를 케이스로 잡아서 데모도 하고 토론도 하는 방식으로 진행하려고 합니다. 일단은 제가 제일 먼저 시작하고, 그다음 주는 임정도 선생님, 그다음 주는 윤세진 선생님, 그다음 주는 맹동식 선생님, 그다음 주는 정수정 선생님이 하는 것으로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강한수는 이내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잠시 말이 끊어진 틈을 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전달 사항 다 말씀하셨으면 저 먼저 가 봐도 될까요? 점심시간에 볼 일이 좀 있어서 말입니다."

기적은 번번이 흐름을 끊는 강한수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목소리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러세요."

하지만 강한수는 신경도 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치가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거침이 없는 모습이었다.

기적은 멀어져 가는 강한수의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식당에서 나온 강한수가 찾아간 곳은 한 진료실이었다. 가벼운 노크를 한 뒤 안으로 들어가자 진료실의 주인이 그를 반겨 주었다. 명석한이었다.

"강 선생님 왔어요? 어서 오세요."

"다행히 계셨네요. 답답해서 하소연 좀 하려고 왔습니다."

"하소연이요? 무슨 하소연을 하려고…… 일단 여기 앉아 보세요."

자리에 앉은 강한수가 곧 입을 뗐다.

"그 이기적 실장 말입니다. 실장이라는 사람이 치료실에서 마사지를 하질 않나, 10분 넘게 이야기나 하고 있질 않나. 아주 가관입니다. 대체 언제까지 이 꼴을 지켜봐야 할지……."

이기적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명석한이 눈을 빛냈다.

"뭐요? 마사지요? 병원이 무슨 마사지방도 아니고……."

"그러게 말이에요. 아주 미치겠습니다. 이사장님은 아직 별말 없으십니까? 언제까지 실력도 없는 어린 친구를 상사로 모셔야 하는지……."

"원장님이 너무 완고하셔서…… 그러니까 선생님이 수고 좀 해 봐요. 지금처럼 책잡을 만한 일들은 죄다 보고해 주시고…… 필요하면 선생님이 이렇게도 해 보고, 저렇게도 해 보고. 예? 이사장님도 그러라고 비싼 연봉을 주면서 강 선생님을 우리 병원으로 스카우트 한 것 아닙니까? 환자들도 많이 끌어들이고 이기적 실장보다 낫다는 것만 증명하면 실장 자리 차지하는 게 뭐 어렵겠습니까?"

"그거야 그렇지요. 최선을 다해 보겠습니다."

"어차피 평치료사나 하려고 우리 병원 온 거 아니잖아요. 그 어렵다는 RPT까지 따신 분이 이기적 실장 같은 사람에게 지면 안 되지. 한번 열심히 해 봐요. 그러면 이사장님도 힘을 써 주시겠지."

"그렇지요. 치료 시간에 마사지나 하고 있는 치료사를 이기지 못한다면 RPT라는 간판이 아까운 일이죠. 곧 실력으로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좋아요, 아주 좋습니다."

명석한은 믿음직스럽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뒤, 손목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 내가 할 일이 좀 있어서 다음에 다시 이야기하죠."

"네네, 그럼 수고하세요. 혹시 아픈 곳 있으시면 치료받으러 오시고요."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인 강한수가 이내 진료실을 나섰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명석한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인사하는 꼬락서니하고는? 대접 좀 해 줬더니 나랑 맞먹으려고 드나? RPT? 그딴 게 무슨 의미가 있어. 한국에서 알아주지도 않는데. 그래 봤자 물리치료사 아냐?"

명석한에게 특수치료실 실장이 누구인지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에게 물리치료사는 그저 물리치료사일 뿐이니까. 다만 그 자리에 기적이 있는 것이 싫을 뿐이었다.

겨우 본래의 신색을 회복한 그가 작게 뇌까렸다.

'아픈 곳 있으면 물리치료 받으러 오라고? 의사인 내가 왜? 코미디하나? 죽으면 죽었지 물리치료사에게 치료받는 일은 없어.'

진료실을 나선 강한수가 치료실로 향하는 코너를 돌았을 때였다. 문득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어? 어딜 갔다 오는 길인가?'

정수정이었다. 빠르게 걸음을 옮겨 어깨를 나란히 한 그가 넌지시 말했다.

"어어, 수정 샘. 어디 다녀와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수정이 어색한 표정으로 그 말을 받았다.

"아, 네. 비품 담당이라 비품 사서 오는 중이에요."

"이리 줘요. 내가 들어 줄게요."

"아니에요, 괜찮아요. 제 일인데요."

수정은 한사코 거절했지만 강한수는 기어이 비닐 봉투를 뺏어 들었다.

"무거운 거는 남자가 들어 주는 거야. 미국에서는 그래요."

그렇게 말하는 강한수의 표정은 뿌듯해 보였다. 굉장히 멋진 말을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의 그런 표정이 깨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빼앗긴 비닐 봉투를 다시 빼앗아 들며 수정이 말했다.

"자기 일은 자기가 하는 거예요. 한국에서는 그래요."

예상외의 전개에 강한수는 크게 당황했다.

사실 그는 학교 후배 정수정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학벌도 그렇고, 외모도 그렇고, 성격도 그렇고 자신과 안성맞춤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그는 알게 모르게 수정에게 작업을 걸고 있었다.

"그, 그래요? 뭐 그렇다면…… 그건 그렇고 오늘 저녁에 뭐 해요? 학교 후배에게 식사 한번 사고 싶은데 시간 괜찮아요?"

"아니요. 오늘 친구 만나기로 했어요."

"그럼 이번 주말에는?"

"주말에는 교육 들으러 가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돼요. 학교 후배라고 해도 사실 얼굴도 못 본 사이인데요, 뭐."

하지만 수정은 매번 이렇게 철벽을 치고 있었다. 그 점이 강한수를 답답하게 만들었다.

'한 번만 따로 만나면 자신이 있는데…… 그 한 번이 안 되네. 남자에게 경계심이 많은 스타일인가?'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치료실로 들어서는 정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치료실 안에 있던 기적이 수정을 발견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수정 샘, 내가 생각해 봤는데 다음부터는 그냥 인터넷으로 사면 어때요? 인터넷이 더 싸기도 하고 지금처럼 수고할 필요도 없잖아요? 컴퓨터 필요하면 내 방 컴퓨터 써도 되는데."

그러자 수정이 전에 없이 밝아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인터넷이 싸기는 한데. 그래도 1+1행사가 더 싸요. 그냥 점심시간에 바깥바람도 쐬고, 커피도 한 잔 하려고 다니는 중이에요. 귀찮아지면 그렇게 할게요."

"아, 그래요? 그러면 무거운 거 살 때는 저랑 같이 나가요. 제가 들어 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수정과 기적.

두 사람은 서로의 마음을 느끼며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다. 다만 단 한 사람, 강한수만큼은 즐겁지 못했다. 두 사람이 즐겁게 대화를 나누면 나눌수록 그의 얼굴에 떠오른 불쾌함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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