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65화 (65/205)

# 65

다시 사는 인생 (6)

"15년 전에는 우리가 지훈이를 지켜주지 못했습니다. 고의는 아닐지라도 15년 전의 오진은 지훈이를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둠으로 내몰았습니다. 하지만 지훈이는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끊임없이 햇빛을 찾아 걸음을 옮겼습니다. 저는 산증인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지훈이가 걸어온 길이 곧 증거입니다. 지난 15년의 세월이 그 증거입니다. 이제는 지훈이가 다시 어둠으로 들어가지 않도록 우리가 지켜줄 수 있습니다. 지훈이의 '다시 사는 인생'에 찬란한 서광이 비칠 수 있도록 재판장님의 현명한 판단을 기다리겠습니다."

기적은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닫았다.

재판장은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였고, 사람들은 박수를 보내며 소소한 응원의 메시지를 던져 왔다.

"백번 맞는 말이다!"

"병원이 잘못했다!"

조용히 해 줄 것을 요청한 재판장이 다시 재판을 진행했다.

"양측 변호사들, 최후 변론해 주세요."

이에 원고, 피고 측 변호사들이 최후 변론을 펼쳤다. 지난 15년을 보상해 달라는 원고 측과, 잘못을 일부 시인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는 피고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오늘의 재판을 맡은 재판장에게로 향했다.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재판장은 덤덤한 목소리로 판결을 내렸다.

"15년 전에는 세가와병을 구분하기 어려웠다는 병원 측의 주장을 일부 인정한다. 하지만 부실한 검사로 원고 측에 막대한 정신적, 신체적 타격을 입혔다는 것 또한 부정하기 힘들다. 이에 피고는 원고에게 1억 5천만 원의 배상금을 배상할 것을 선고한다."

선고를 마친 재판장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며, 오늘의 재판이 끝났음을 알렸다.

다음 순간 장내는 딱 두 가지 반응으로 나뉘어 있었다. 백지훈을 응원하는 사람들과 병원을 꾸짖는 사람들로.

"힘내라! 백지훈!"

"굳세어라! 백지훈~!"

"양심이 있다면 병원은 항소하지 마라!"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모든 사람들이 백지훈의 다시 사는 인생을 응원하고 있는 것이었다.

"……."

재판에서 패배한 병원 측 관계자들은 빠르게 재판정을 빠져나갔다. 고개를 푹 숙인 모습이 주변의 분위기를 적잖이 의식하는 듯했다.

반면 재판에서 승리한 백지훈과 백동만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물론 고통으로 점철됐던 지난 15년을 돈으로 보상받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들은 웃을 수 있었다. 희망찬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적은 조용히 몸을 일으켜 출구로 향했다. 적당한 타이밍에 뒤로 빠지려는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그의 귓전으로 백지훈의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생님!"

기적은 고개를 돌렸고, 백지훈은 다시 힘주어 외쳤다.

"선생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 정말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 해서, 선생님 덕분에 다시 살게 된 인생, 정말 멋지게 살아 볼게요."

"……."

그때였다.

-위대한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220(+20)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습니다.

-퀘스트 [다시 사는 인생]의 달성 조건을 완료했습니다.

-보상으로 유명해질 수 있는 기회를 받았습니다.

-보상으로 3,300(+300)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를 완료했다는 메시지였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으라는 퀘스트 목표가 백지훈의 고백과 함께 달성된 것이었다.

시스템 메시지를 지워 낸 기적은 백지훈을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자 백지훈도 곧 그를 향해 씨익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두 남자의 교감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기적을 향해 몰려들고 있었다.

"선생님이 오진을 밝혀낸 담당 물리치료사입니까?"

"뇌성마비가 아니라는 것을 어떻게 발견하신 겁니까? 인터뷰 가능하십니까?"

"네이빈 뉴스입니다. 선생님을 주인공으로 특집 기사를 내고 싶습니다. 병원에도 그렇고 선생님 개인으로도 그렇고 이름을 날릴 기회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에 응하실 의사가 있으십니까?"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해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퀘스트 보상 이름을 날릴 기회를 받았습니다. 이에 응하시겠습니까? 응하게 되면 스타 물리치료사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거절하게 되면 기존의 길을 계속해서 걷게 됩니다.

'어? 이건 또 뭐야?'

지금까지 보상이 주어지면서 선택지가 뜬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시스템은 선택에 따라 앞으로의 길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기적은 잠시 대답을 하지 않고, 신중히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대답은 바뀌지 않았다.

"아니요. 저는 할 일을 했을 뿐이고, 그 일을 통해서 제 이름을 알리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인터뷰는 지훈이와 그 아버지를 상대로 해 주세요."

기적이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스타 물리치료사의 길을 거절했습니다. 기존의 길을 가게 됩니다.

-보상으로 5,000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보상으로 레벨 업 확정권 2장을 얻습니다. 1주일 내로 사용하지 않을 경우 랜덤 적용됩니다.

스타 물리치료사의 길을 포기하고 기존의 길을 가게 됐다는 메시지였다.

한편으로는 스타 치료사의 길이 궁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봐도 후회는 없었다.

돈과 명예를 좇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일이 조금 더 자신에게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레벨 업 시스템을 얻었지만 그를 이용해 꼭 엄청난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이다.

"정말 거절하시는 겁니까? 우리 네이빈 뉴스는 초거대 인터넷 매체입니다. 일단 뉴스가 올라가기만 하면 선생님이나 병원이나 엄청난 홍보 효……."

뉴스 관계자는 계속해서 뉴스의 영향력을 언급했지만, 기적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안 합니다, 비켜 주세요."

명확하게 거절 의사를 밝힌 기적은 인파를 헤치고 나갔다. 기자들은 몇 번 더 기적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지만 이는 길지 않았다.

빠르게 인터뷰를 포기한 기자들이 오늘의 진정한 주인공 백지훈을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 * *

특수 교사 1차 시험이 끝난 직후 고사장 앞, 그곳에서는 방송국 스태프들이 모여 촬영에 한창이었다. 카메라, 마이크, 조명 등 촬영용 장비를 든 십수 명의 스태프들이 휠체어를 탄 청년을 중심으로 모여 있었다.

"시험은 잘 치른 것 같나요? 느낌이 어떠세요?"

PD의 질문에 청년이 쑥스럽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글쎄요. 준비한 기간이 길지 않아서 아마 합격할 확률은 높지 않을 것 같습니다. 시험을 봤다는 데 의미를 둬야 할 것 같습니다."

PD의 질문이 이어졌다.

"보통의 경우라면 합격을 하기 위해 시험을 보잖아요. 불합격할 것을 알면서도 이곳에 온 이유가 있습니까?"

청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이유가 있습니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찾기 위해서 이곳에 왔습니다. 사실 제가 걷지도 못하고 집에만 있으니까 사람들이 제 존재를 잘 모르더라고요. 옆집 사람도 제가 있는 것을 잘 모르고…… 어느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렇게 아무 의미 없이 살면 안 되겠다. 내 존재의 의미를 찾아야겠다. 무언가를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대답이 이거였어요. 특수 교사! 비록 이번에는 불합격하더라도 끝없이 도전하다 보면 언젠가는 합격할 수 있겠죠. 꼭 합격해서 저같이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요."

사실 특수 교사 시험에 응하는 사람들은 많다. 지금 이 순간에도 카메라 앵글 밖에서는 시험을 치른 수많은 응시생들이 고사장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이 청년의 특수 교사 시험 응시를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가 따라붙은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것은 청년이 조금 특이한 이력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청년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뇌성마비 진단을 받고 긴 시간을 휠체어에 의지해 살아온 환자였다.

희망보다는 절망이 더 많았던 삶과 처절한 싸움을 벌여야 했던 환자였다.

하지만 얼마 전 한 물리치료사에 의해 뇌성마비가 아닌 세가와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그로 인해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다.

지금의 행복은 만약 청년이 포기했더라면 누릴 수 없었던 행복이었다.

하지만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비로소 이런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백지훈의 일화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절대로 포기하지 마라.

PD의 질문이 이어졌다.

"보니까 부끄럼을 굉장히 많이 타는 것 같은데 이 방송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것도 세상에 나를 알리고 싶다, 뭐 그런 이유인가요?"

"네. 그 이유가 가장 컸고요. 다른 이유도 하나 더 있습니다."

"다른 이유요? 그게 뭡니까?"

"뇌성마비가 아니라는 걸 처음 발견한 물리치료사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어서입니다."

"아! 참, 그렇죠. 안 그래도 오진을 밝혀낸 물리치료사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대단한데요. 그 선생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기적을 생각하는 백지훈의 얼굴에는 어느새 잔잔한 웃음이 매달려 있었다. 옅은 미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선생님은 참 바보 같은 사람입니다."

예상치 못한 말이었는지 PD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 바보요? 의사도 발견 못한 세가와병을 발견한 사람을 두고 바보라고요?"

물론 바보라는 말을 단어 그대로 해석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바다의 보배 같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네에?"

예의 PD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반문했고, 장내는 잠시 웃음바다가 되었다. 백지훈이 말을 이었다. 그의 표정은 이전과 달리 진지했다.

"근무시간도 아닌데, 자청해서 환자를 치료하고, 환자를 위해 변호사를 소개시켜 주고, 휴가를 내고 증인으로 출석하고, 대단한 일을 해냈음에도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요즘 세상에 이런 바보가 어디 있습니까?"

"듣고 보니 그러네요. 확실히 요즘처럼 각박한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바보라고 볼 수도 있는 사람이네요."

"하지만 반대로 각박한 세상이기 때문에 선생님 같은 사람이 더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저는 이번에 선생님을 만나고서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선생님 같은 사람들이 있기에 이 세상이 아름다울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요."

PD는 고개를 끄덕였다. 백지훈의 말이 딱 피부에 와 닿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가 말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휠체어에 앉아 있던 백지훈이 몸을 들썩였다. 그러다가 이내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켜 세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카메라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보고 계신가요? 저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서고 걸을 수 있게 됐습니다. 나라는 존재의 의미를 찾게 됐습니다. 선생님이 저에게 그랬듯, 저 역시 사람들에게 등대 같은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어둠에 빠진 저에게 선생님이 빛을 보여 주었듯이, 저 역시 특수 교사가 되어 어둠에 빠진 사람들에게 빛을 보여 주고 싶습니다. 저의 다시 사는 인생을 응원해 주세요."

그렇게 말한 백지훈이 이내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촬영은 그 모습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고, 그로부터 1주일 뒤 '다시 사는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전파를 탔다.

의학 다큐 '다시 사는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는 이가 있었다. 바로 기적이었다.

기적은 원룸 침대에 앉아 걸음을 옮기는 백지훈의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화면 속 백지훈은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당연히 그를 발견할 수는 없을 터였다. 그렇게 기적은 백지훈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백지훈이 발견할 수는 없는 곳에 있었다.

기적은 걸음마를 배우는 아기처럼 한 발 한 발 걸음을 옮기는 백지훈을 보며 가볍게 바라보았다.

'다시 사는 인생은 부디 따뜻하기를…….'

오늘도 기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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