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다시 사는 인생 (4)
* * *
세가와병 진단을 받은 뒤, 백지훈에게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일단 강직 현상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소량의 약물만 복용했음에도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근육이 몰라보게 호전된 것이다.
이전의 지훈의 몸이 딱딱한 통나무 같았다면 이제는 대나무처럼 어느 정도 유동성이 생겼다.
발음도 몰라보게 정확해졌다. 여전히 힘든 발음은 잘하지 못했지만 어눌했던 발음이 상당 부분 사라져 있었다.
자연히 물리치료에도 가속도가 붙었다. 기본적으로 스탠딩 자세가 되니 여러 가지 경험을 체험케 할 수 있었고, 백지훈의 몸 상태는 더욱 빠르게 호전되기 시작했다.
백동만은 기적을 은인 대하듯이 했다. 만날 때마다 90도 인사를 하는 것은 물론, 과도한 찬양으로 기적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조금만 더 나가면 기느님이라고 부를 기세였다. 기적은 그런 백동만이 부담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얼마나 좋으면 한참 어린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할까 싶어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그런데, 마냥 좋을 것만 같던 분위기는 며칠이 지나지 않아 깨져 버렸다.
휠체어를 밀며 나타난 백동만이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었다. 백지훈의 표정 또한 무척이나 어두웠다. 힘든 상황 속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던 백지훈이었기에 의아함은 배가 되었다.
그것은 치료가 시작된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좀처럼 치료를 따라오지 못하는 것 같아 기적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있어? 분위기가 별로네?"
백지훈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우물거렸다. 아무래도 곤란하게 만든 것 같아 기적이 이내 말을 바꿨다.
"말하기 힘든 거면 말하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치료에 집중을 못 하는 것 같아서 물어본 거야."
백지훈은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내 뭔가를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세가와병 진단을 받고 아버지가 15년 전 뇌성마비 진단을 내렸던 병원을 찾아가셨어요.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우리 잘못이 아니다. 우리는 어떤 책임도 질 수 없다는 말이었어요."
백지훈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그날부터 아버지가 병원 앞에서 1인 피켓 시위를 하고 계세요. 그런데 어제는 병원 관계자들과 몸싸움이 있었는가 봐요. 그 사람들과 실랑이를 벌이시다가 넘어지면서 발목을 접질렸나 봐요. 아무래도 오늘 또 나가실 모양인데……."
백지훈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새 그의 눈에는 눈물방울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북받치는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저를 위해서 이렇게 노력하시는데…… 저는 아버지를 위해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저는 이 세상에 왜 존재하는 걸까요? 주변 사람들을 힘들게 하기 위해서일까요? 제 존재 가치를 모르겠어요……."
"……."
환자들은 대부분 저마다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가지고 있다. 이유는 분명하다. 아프기 때문이다. 아프기 때문에 사연이 있고, 그 사연은 구구절절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나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불행해진다고, 나는 존재 가치가 없다고.
하지만 백지훈의 그 말은 틀렸다. 단언컨대 세상에 존재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가 있고, 또 해야 할 일이 있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다. 어쩌면 백지훈과 백동만을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를 떠올린 기적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을 것도 같은데…… 내 말대로 한번 해 볼래?"
"정식으로 고소를 하라고요?"
백동만과 백지훈이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되물었다.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1인 시위를 하신다고 해서 병원에서 입장을 달리할 것 같지도 않고, 그것보다는 정식으로 고소를 하고 결과를 받아 보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백동만이 다소 무거운 얼굴로 그 말을 받았다.
"그렇기는 합니다만…… 소송비가 많이 나올 텐데……. 솔직히 지금 치료비도 부담스러운 상황이라 감당이 될지……. 법에 대해서 아는 것도 없고…… 원래 법이라는 게 저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법 아닙니까? 선생님 말씀이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만…… 조금 망설여지네요."
물론 기적도 무턱대고 고소를 하라는 것은 아니었다.
"제가 변호사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변호사요? 선생님이 변호사를 소개시켜 주시겠다고요?"
백동만이 의아한 표정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기적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변호사가 계셔서요."
기적이 말하는 변호사는 바로 소영이의 아버지인 강성준이었다. 언제든 도움을 드리겠다며 명함을 건넨 강성준을 떠올린 것이었다.
"제가 치료했던 환자의 아버지인데 대형 로펌에서 일한다고 들었습니다. 적극적으로 돕겠다고 하셨으니까 한번 상담이라도 받아 보시는 게 어떠세요?"
"그렇게 해 주시면 저야 너무 감사합니다. 하지만 폐를 끼치는 것은 아닐지……."
"그런 거 아닙니다. 저는 전화 한 통만 하면 되는 건데요. 그쪽도 의뢰인을 받아서 좋을 거고요."
"정말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그렇게 거창하게 표현하실 것 뭐 있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요. 더불어 사는 세상 아닙니까? 돕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가 힘든 상황에 있으면 아버님도 저를 도와주실 거잖아요?"
백동만은 더욱 감동받은 얼굴이 되어 고개를 절래 절래 저었다.
"어떻게 말 한마디까지 이렇게 고맙게 하시는지…… 염치가 없지만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기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변호사께 전화 드리겠습니다."
대화를 마친 기적은 곧바로 강성준에게 전화를 걸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 냈다.
-그런 사연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환자의 일로 전화를 하시다니…… 역시 선생님은 제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시네요. 제가 무조건적으로 돕겠습니다.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변호사의 시선으로 봤을 때 이 사건은 굉장히 화제성이 있습니다. 회사 입장에서 봐도 도움이 될 만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일단 회사에 보고를 해 봐야겠지만 형편이 어렵다고 하니 저렴한 수임료로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그는 기적의 퇴근 시간에 맞춰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이야기가 잘됐습니다. 회사에서도 이번 사건을 수임하는 데 아주 긍정적인 입장입니다. 아무 문제도 없을 것 같으니까 저희 회사로 한번 찾아와 달라고 해 주세요.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였다. 돌연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도움을 받을 기회'를 사용했습니다.
보상을 사용한다는 메시지였다. 기적은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어 그런 마음을 떨쳐 냈다. 이를 사용해 이번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다면 도움을 준 기적도, 도움을 받은 백지훈도 모두 윈윈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은 기적은 다시 백동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강성준에게 들은 이야기를 그대로 전달해 주었다.
그러자 백동만은 한껏 상기된 목소리로 고맙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단순 통화라 그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연신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 눈에 선했다.
그것으로 전화를 끊은 기적은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퇴근 도장을 찍었다.
병원 밖으로 향하는 그의 얼굴은 후련해 보였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했으니 치료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침 때는 금요일 저녁이었다. 어쩐지 소주 한 잔이 생각나 기적은 지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지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이게 누구야? 바쁘신 분이 어쩐 일이야? 또 게임에 관한 이야기하려고? 나 요즘 게임 잘 안 하는데. 뭐, 소주? 좋지. 언제, 어디서 만나? 오늘? 더 좋지. 퇴근하고 바로 보자 그럼. 형이 먼저 퇴근했으니까 내 쪽으로 넘어와.
꽤나 오랜만의 통화였기 때문일까? 지식의 목소리는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지고 있었다. 어쩐지 오늘밤은 긴 밤이 될 것 같았다.
또 한 번의 1주일이 시작되었다. 기적은 아침부터 특수치료실 전 직원을 집합시켰다. 전달 사항도 전달하고 오늘부터 출근하는 강한수를 소개시키기 위함이었다.
모두의 앞에서 강한수가 입을 열었다.
"강한수입니다. 나이는 올해로 서른하나고, 보시다시피 남자입니다."
남자라는 말에 모두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은 강한수가 본격적인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오늘 입사한 신입이라고 하기에는 믿기 힘들 정도로 자신감에 찬 모습으로.
"뉴욕 주에서 RPT를 패스했고, 그곳에서 일하다 한국으로 들어온 지 이제 2개월 정도 됐습니다. 서울대 출신인데, 혹시 저랑 동문 계십니까?"
서울대라는 말에 수정이 조심스레 손을 들어 올렸다.
"어? 선배님, 저도 서울대예요."
"오? 역시 계셨네요. 저 학교 다닐 때 못 봤죠? 내가 12년까지 학교 다녔는데."
"네? 아뇨. 저 14학번이에요."
헉!
하고 비명을 낸 강한수가 이번에는 기적을 콕 집어 질문했다.
"그럼 실장님은 어디 학교 나오셨나요?"
아메리칸 스타일이라고 해야 할까? 다소 실례가 될 수 있는 질문이었지만 질문을 던지는 강한수는 거침이 없었다. 기적이 멋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저는 세광대 물리치료과 나왔습니다."
세광대는 인 서울 대학으로 서울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꽤나 알아주는 대학교였다.
그런데 강한수의 기준에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고개를 갸웃한 강한수가 말했다.
"저는 실장님이 당연히 서울대나 연, 고대 나오신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요? 그럼 완전 실력파신가?"
아니었네요? 까지가 질문, 그럼 완전부터가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그 목소리는 모두에게 전달되었고, 이에 기적을 비롯한 직원들의 표정이 살짝 굳어 버렸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강한수가 강하게 손을 저었다.
"아아아아?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닙니다. 그냥 이 정도 병원의 실장님이니 그런 줄 알았다는 말입니다."
이어 그는 합장하듯 손을 모으고 모두를 향해 말했다.
"제가 미국에서 와서 가끔 실례가 되는 말을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세요."
문화적 차이에서 온 실수다.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기적도 옹졸하게 굴 수는 없었다.
"네네, 이해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모두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그럼 소개는 이쯤 해 두고, 다들 오늘 하루도 파이팅합시다."
"네, 실장님!"
대답을 마지막으로 모두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고는 저마다의 목적을 가지고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그 모습을 눈에 담던 기적이 강한수를 향해 말했다.
"선생님은 잠깐 제 방에 들러 주실래요? 이것저것 드릴 것도 있고 해서요."
그 말에 딴 곳을 보고 있던 강한수가 이내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네. 그런데 그 전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조금 긴장해서 그런지 화장실이 급하네요."
'오래 안 걸리는데…….'
기적은 내심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괜히 꼰대 기질을 발휘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그렇게 강한수가 화장실로 달려가고, 기적은 실장실로 들어와 강한수에게 지급할 보급품과 환자 차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노크 소리와 함께 사람 1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적은 그가 당연히 강한수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타난 이는 강한수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