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62화 (62/205)

# 62

다시 사는 인생 (3)

평소보다 일찍 일과를 시작한 기적은 바쁜 하루를 보냈다. 예약된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남는 시간에는 뇌성마비에 관한 전문 서적을 살피며 조금도 쉴 틈 없는 오전 시간을 보냈다.

그가 뇌성마비에 관한 전문 서적을 살피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이른 아침 백지훈을 치료하며 느꼈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계속해서 매달린 끝에 기적은 나름의 답을 내렸다. 그리고 그 답을 오후에 다시 나타난 백지훈과 보호자에게 털어놓았다. 백지훈의 상태를 다시 한 번 살펴본 직후였다.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검사를 다시 받아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말에 백지훈은 눈만 드르륵 굴렸고, 보호자는 그 의아함을 입 밖으로 꺼내 놓았다.

"검사를 다시 받아 보라니요? 무슨 검사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뇌성마비 검사 말입니다."

"뇌성마비 검사를 다시 받아 보라는 말씀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요? 조금 알아듣기 쉽게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영문을 몰라 눈만 굴리는 보호자를 향해 기적이 말했다.

"제가 보기에 지훈이는 뇌성마비가 아닙니다. 이 부분에 대해 재검을 받아 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네에?"

"네에?"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그렇게 되물었다.

솔직히 그들은 지금 기적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무려 15년 전에 받은 진단이었다. 그리고 그 후로 15년 동안 뇌성마비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뇌성마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난데없이 뇌성마비가 아니라니? 이 말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들의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기적이 부연 설명을 했다.

"아무리 봐도 뇌성마비에서 보이는 패턴과는 조금 다른 점들이 보여서요. 지훈이가 운동 조절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맞지만 그 양상이 뇌성마비와는 미묘하게 다릅니다. 아침에 컨디션이 좋아진다는 것도 이해가 가지 않고요."

보호자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지훈이가…… 뇌성마비가 아닐 수도 있다, 이 말입니까? 지금?"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물론 제 말이 틀릴 수도 있습니다. 확률은 반반이라고 생각합니다만…… 그래도 한번 해 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백지훈과 보호자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보아하니 머릿속이 백짓장으로 변해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는 듯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 보호자가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더 좋아지는 건가요? 아니면 나빠지는 건가요? 아니…… 그럼 무슨 검사를 받아야 하는 건지……."

그렇게 말하는 보호자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혹시라도 더 안 좋아지는 것은 아닐까 겁이 나는 모양이었다.

백지훈의 경우는 더했다. 그래도 대답을 하는 보호자와 달리 그는 내내 아무런 말이 없었다. 초점이 없는 눈빛으로 하늘과 땅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많은 생각이 드는 듯했다. 시시각각 표정에 변화를 일으키던 백지훈은 종내에는 헛구역질까지 토해 냈다.

결국 파리하게 질린 그는 보호자의 도움을 받아 재빨리 화장실로 이동했다. 그가 다시 나타난 것은 대략 10여 분이 지난 후였다.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백지훈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죄송해요. 가, 갑자기 속이 메스꺼어어서……."

기적은 말없이 지훈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 혼란스럽지 않겠는가? 당연히 많은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본인이 아닌 이상 절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기적은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기적은 지훈의 어깨를 강하지도, 그렇다고 약하지도 않은 강도로 툭툭 두드렸다. 그러면서 말했다.

"데스크에 말하면 알아서 필요한 검사를 해 줄 거야……. 결과는 뭐…… 하늘에 맡겨야겠지만……. 다만 뇌성마비보다 안 좋은 병이 또 있겠어? 무슨 진단을 받든지 지금보다는 좋을 거야. 마음 편하게 먹고 검사 받아 보자."

어떤 결과가 나오든지 나빠질 것은 없다. 기적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은 어깨에 닿은 손을 통해 지훈에게 전달되었다. 지훈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검사, 다시 한 번 받아 볼게요. 아빠, 그래도 되지?"

보호자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되고말고."

지훈의 재검은 그렇게 결정되었다.

지훈의 재검을 담당한 의사는 명의진이었다. 기적으로부터 자초지종을 전해들은 그가 진료를 자청했고, 직접 나서서 지훈의 재검을 담당한 것이다.

명의진은 신경외과와 신경내과로 나눠지는 신경계 중 내과에 특화된 전문의로, 이쪽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다.

명의진은 언제나처럼 세심하고 편안하게 진료를 진행했다. 덕분에 지훈은 불안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덜어 낼 수 있었다.

"자, 그럼 반사 반응부터 볼게요."

진찰용 망치를 든 명의진이 지훈의 무릎을 툭툭 두드려 보았다. 그러자 지훈의 다리가 격한 떨림을 일으켰다.

"음…… 강직이 심하네요? 다른 곳도 볼까요?"

명의진은 팔꿈치와 손가락을 추가로 확인한 뒤 다시 의자에 앉았다. 곧바로 보호자의 질문이 쏟아졌다.

"선생님, 어떻습니까?"

"글쎄요. 긍정적이긴 한데…… 아직 어떻다고 잘라 말하기는 힘듭니다. 일단은 확실하게 하기 위해 MRI 촬영을 진행할 겁니다. 환자분이 해 주셔야 하는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냥 편하게 계시면 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검사가 진행되었다.

지이이잉.

MRI 촬영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다만 영상을 받아 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때문에 백지훈과 그 보호자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타들어 가는 속을 달래면서 말이다.

기다리는 도중에 기적도 도착했다. 치료를 마친 그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찾아온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다음 순간.

"백지훈 환자 들어오세요. 검사 결과 나왔습니다."

마침내 기다리던 결과가 나왔다.

백지훈과 보호자, 그리고 기적을 앞에 두고 명의진이 말을 이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습니다. 백지훈 님은 뇌성마비가 아닙니다."

선언과도 같은 한마디.

그 말을 들은 백지훈과 보호자의 얼굴에는 기대감과 불안감이 동시에 어렸다.

뇌성마비가 아니라는 말에 기대감이 생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엄습하는 것이다.

백지훈의 손을 꽉 움켜쥔 보호자가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는 숨길 수 없는 감정의 동요로 인해 덜덜덜 떨리고 있었다.

"뇌성마비가 아니면…… 대체 뭡니까?"

명의진이 영상 속 뇌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 부분이 잘못되면 도파민 생성에 문제가 생기거든요? 그런데 백지훈 님은 이 부분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그 주변 효소에 문제가 생겨서 도파민 전달이 안 되고 있는 겁니다."

"선생님, 그 말씀은……?"

"어려운 설명은 그만두고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백지훈 님은 세가와병이라고 하는 유전 질환입니다."

보호자와 백지훈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세가와병이라는 말을 처음 듣는 그들은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는 듯했다.

하지만 기적은 달랐다. 세가와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입니까? 정말 세가와병이 맞습니까?"

명의진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세가와병입니다. 확실합니다."

돌아가는 상황에서 힌트를 얻은 백지훈과 보호자가 뒤늦게 대화에 끼어들었다. 기대가 가득한 목소리로 둘이 동시에 물었다.

"세가와병이 조은 겁니까?"

"결과가 좋게 나온 겁니까?"

물론 세가와병을 좋은 병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좋은 병은 없으니까. 게다가 세가와병은 보기 드문 희귀병이었다.

하지만 뇌성마비를 앓고 있던 백지훈이 대상이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뇌성마비에 비한다면 세가와병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세가와병은 약물치료와 물리치료가 병행된다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는 병이었다.

"쉽게 말해 다시 걸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경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약물치료와 물리치료가 병행된다면 완치 판정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 맙소사……."

다리에 힘이 풀린 것일까? 보호자는 '하느님 맙소사'라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뜨거운 눈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어허허헝……."

그야말로 대성통곡이었다. 처음에만 해도 흐느끼는 수준이었던 보호자는 아예 대놓고 눈물을 쏟아 내고 있었다, 마치 봇물이 터진 것처럼.

그 모습을 보며 기적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것은 단순한 눈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고. 뇌성마비 진단을 받은 아들을 그저 지켜봐야 했던 아버지의 15년 한이 담긴 회한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이 눈물을 통해 쏟아 내고 있는 것이었다. 15년간 그의 마음을 좀먹고 있던 깊고 깊은 한을 말이다.

"으흐흐흑…… 어허허헝!"

보호자는 이제 콧물까지 줄줄 흘리고 있었다. 마치 아직 학교에 들어가지 않은 어린 아이처럼.

하지만 누가 감히 이 모습을 보고 그를 비웃을 수 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목 놓아 울고 있는 이 남자를 보고 말이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백지훈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과 안쓰러움, 앞으로에 대한 기대감, 지난날의 아픔 등 복잡한 감정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

진료실이 눈물바다로 변모한 지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눈물과 콧물로 옷을 흠뻑 적신 보호자가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선생님 너무 감사합니다. 이 백동만이 평생 은인으로 모시겠습니다."

누가 말릴 틈도 없이 기적을 향해 큰절을 올렸다. 깜짝 놀란 기적이 황급히 보호자, 즉 백동만을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백동만은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았다.

스스로 만족한 뒤에야 백동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명의진을 향해서 또 한 번 큰절을 올렸다.

두 번의 큰절을 마친 뒤 자리에서 일어나는 백동만의 표정은 더없이 후련해 보였다. 비로소 지금의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처럼 보였다.

의자를 찾아 자리에 앉은 백동만이 백지훈의 손을 잡았다. 그러고는 붉게 충혈된 눈을 명의진에게 고정시켰다. 무슨 말이든 해 보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놀랍도록 침착한 모습이었다. 과연 15년간 다이내믹한 하루하루를 보낸 사람의 멘탈이 어떤 것인지를 제대로 보여 주고 있었다.

이에 따라 백지훈도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아버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의 마음을 따뜻하게 품어 주고 있었다.

그런 둘을 향해 명의진이 최종 진단을 내렸다.

"일단 도파민 약물치료를 해 봅시다. 소량을 복용하면서 이상 증상이 없으면 점차 늘려 나가는 것으로요. 그리고 물리치료를 병행하면서 경과를 지켜봅시다. 처방 내 드릴 테니까 약제과에서 약 받아 가세요."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후로 몇 마디 말이 더 오갔다. 그러는 사이 간호사를 통해 처방전이 전해졌고, 백동만은 마치 보물을 다루듯 조심스럽게 이를 받아들었다.

종이 한 장일 뿐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소중한 보물이 될 수 있다는 말이 절로 실감나는 장면이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몇 번이나 감사 인사를 끝낸 백동만과 백지훈이 약제실로 향하고,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명의진이 묘한 미소를 흘렸다.

"진료는 의사에게. 이 말도 실장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네요. 어떻게 생각하면 의사로서 부끄럽기도 하고……. 아무튼 실장님 존경합니다."

"네? 아닙니다. 저는 그냥 뭔가 다른 것 같아서 재검을 제안한 것뿐입니다. 결국 진단은 원장님께서 하셨잖아요. 이상이 있다고 느끼면 재검을 제안하는 것도 물리치료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적은 멋쩍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그러나 기적을 바라보는 명의진의 존경심 가득한 눈빛은 조금도 옅어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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