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추락하는 평판에는 날개가 없다? (2)
명성 병원 근처에 위치한 어느 카페 안.
그곳으로 1명의 여자가 들어서고 있었다. 화려한 복장과 액세서리로 치장한 여자였다.
'분명 이 카페 맞지? 아, 저기 있네.'
아는 얼굴을 발견한 여자가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의 발걸음은 한 남자 앞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오빠,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지금 근무시간 아니야? 게다가 카페라니, 완전 안 어울리거든?"
그 말에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명석한이었다.
"이야, 김유진, 오랜만이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잘 지냈어?"
여자, 즉 김유진이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럭저럭? 오빠는?"
석한은 얼음이 가득 든 음료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나도 뭐 그럭저럭? 음료 뭐 마실래?"
"나? 나는 여기서 제일 비싼 거 아무거나?"
"가방에 옷에 악세에 커피까지 명품으로 드시겠다? 그럼 뭐 하냐, 정작 네가 명품이 아닌데?"
석한이 유진의 가방과 옷, 그리고 명품을 차례로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유진이 발끈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 이 오빠 말하는 것 좀 봐? 내가 왜 명품이 아닌데? 내가 어디가 어때서?"
"몰라서 물어? 머리에 든 것 없지. 얼굴은 페이스 오프 수준으로 뜯어고쳤지. 대체 어디가 명품인 거냐?"
"뭐? 이 오빠 시비 걸려고 불렀나? 나 갈래."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유진을 보며 석한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앉아."
그러나 유진은 앉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자 석한이 말을 바꿨다.
"돈 필요하지 않아?"
"뭐……?"
"돈 필요하지 않냐고, 돈 필요하면 앉아."
돈이라는 말에 유진은 못 이기는 척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피식 웃은 석한이 말을 이었다.
"일 하나만 해 주면 내가 큰 거 한 장 줄 수 있는데."
"일? 무슨 일? 나야 좋지. 그런데 무슨 일인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야?"
"할 수 있다마다? 네가 지금까지 해 왔던 일이고, 또 엄청 잘하는 일이지. 너한테는 엄청 쉬운 일이야."
언제 화를 냈었냐는 듯 유진이 고양이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뭐냐니까?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등받이에서 등을 뗀 석한이 가까이 오라는 듯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고는 마찬가지로 등받이에서 등을 뗀 유진의 귀에 대고 무어라 속삭였다.
"……!"
이야기를 듣는 내내 유진은 몇 번이나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이야기가 끝나기 무섭게 질문을 던졌다.
"어려운 일은 아닌데…… 나한테 피해는 없는 거지?"
석한이 여부가 있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뒤를 봐줄 건데, 무슨 걱정이야? 너 뻔뻔하게 우기는 거 잘하잖아. 나머지는 다 내가 알아서 할 거니까 너는 그냥 뻔뻔하게 우기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래도 어째 좀 찜찜한데…… 아무래도 병원이라……."
"매번 하는 일이면서 왜 그래? 아, 싫음 말아. 너 말고도 돈 좋아하는 애들 많으니까."
그 말에 유진의 얼굴이 다급해졌다.
"누, 누가 싫대? 할 거야. 할 건데 대신에 뒤처리 깔끔하게 해 달라는 거지. 내가 피해 보는 일 없게."
석한이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 너한테 피해 가는 일 없을 테니까."
"그럼……."
말꼬리를 흐린 유진이 이내 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확실하게 해 볼게."
수정은 특수치료실에서 비품 담당을 맡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소모품을 구입하거나, 가끔은 직접 밖으로 나가 물품을 구매하기도 한다. 아직 치료가 별로 없어 한가한 대신 비품 담당을 하게 된 것이었다.
"덥다……."
내리쬐는 7월의 햇살을 받으며 걸음을 옮긴 수정은 마트 안으로 들어갔다. 특수치료실에 비치할 다과를 구입하기 위해서였다.
안으로 들어간 수정은 장바구니 하나를 들고 장을 보기 시작했다.
"어? 이거는 원 플러스 원이니까 무조건 담고…… 이거는 할인 행사 중이네. 이것도 2개 담고."
"커피는…… 30봉지 더 주는 맥스로 하면 되겠다. 역시 5년 연속 1위인 데는 이유가 있네."
수정은 꼼꼼하게 장을 봤다. 법인 카드라고 해서 사치를 부리지 않고 행사 상품을 공략하는 알뜰함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게 물품 구매를 끝낸 수정이 밖으로 나섰을 때였다. 문득 스마트폰에 불이 들어오며 진동이 울려왔다. 전화가 온 것이었다. 버튼을 누르자마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루돌프 사슴코, 뭐 하고 있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절친 장지수였다.
장지수, 정수정.
비슷한 성씨가 맺어 준 두 사람의 우정은 중학교 때부터 사회에 나온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흐흥, 쇼핑하고 있지?"
-일하는 중 아니야?
"일하는 중인데 병원 다과 쇼핑하고 있지."
- 비품 담당! 큭큭큭! 혼자서?
"혼자지 그럼?"
-그분은 같이 안 왔어?
장지수가 말하는 그분이란 바로 기적을 말하는 것이었다. 수정과는 모든 것을 공유하는 그녀는 당연히 기적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헐! 그분이 여기서 왜 나와? 당연히 같이 안 오셨지. 실장님 엄청 바쁘셔."
-왜? 같이 나오면 좋잖아. 날씨도 좋은데, 데이트도 할 겸.
데이트라는 말에 수정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 자꾸 그래?"
-오리발을 내미시겠다? 평생 남자 얘기라고는 안 하던 애가 매일같이 그분 이야기를 하는데도?
"그, 그야 같이 일하다 보니 그런 거지…… 또 존경하는 상사기도 하고…… 어? 잠깐만……."
말을 하던 수정이 일순 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장지수가 또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얘 불리하니까 말 돌리는 것 좀 봐? 완전 자연스러웠어. 나 진짜 무슨 일 있는 줄 알았잖아. 소오름! 우리 수정이 많이 늘었네?
"그런 거 아니야. 잠깐 누굴 좀 봐 가지고. 아무튼 진짜 아니니까 자꾸 그러지 마."
-알았어. 얼른 들어가라. 나도 이제 오후 근무 준비해야겠다.
"그래, 너도 수고하고. 이따가 시간되면 보자."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은 수정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옆쪽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고개를 흔든 그녀는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까.'
그녀의 발걸음은 5분 거리에 있는 명성 병원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기적은 약속을 지켰다. 우수사원상을 수상한 다음 날, 약속했던 커피를 돌린 것이다.
상금으로 받은 50만 원을 오히려 초과하는 돈이 들어갔지만 기꺼이 돈을 지불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은 돈을 아낄 때가 아니었다.
상금 이상의 돈을 투자했기 때문일까? 직원들은 기대 이상의 반응을 보였다. 병원을 오가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기적에게 감사 인사를 해 왔다.
"실장님, 커피 정말 잘 마셨어요."
"실장님이 사 주셔서 그런가…… 엄청 맛있더라고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병원 내 평판이 소폭 상승합니다. 수치의 변화는 없습니다. (83/100)
-병원 내 평판이 소폭 상승합니다. 수치의 변화는 없습니다. (83/100)
-병원 내 평판이 소폭 상승합니다. 평판이 1 상승합니다. (84/100)
-병원 내 평판이 소폭 상승합니다. 수치의 변화는 없습니다. (84/100)
-병원 내 평판이 소폭 상승합니다. 수치의 변화는 없습니다. (84/100)
-병원 내 평판이 소폭 상승합니다. 평판이 1 상승합니다. (85/100)
그런데 메시지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돌발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추락하는 평판에는 날개가 없다?]가 주어집니다.
-목표 : 평판을 90 이상으로 올리세요.
-조건 : 평판이 50 이하로 하락하게 되면 퀘스트는 실패하게 됩니다. 실패 시 많은 것을 잃게 됩니다.
-보상 : 출장을 갈 기회 제공
기적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퀘스트의 내용이 영 심상치가 않았다. 보상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게 무슨 뜬금포지? 갑자기 추락하는 평판에는 날개가 없다니? 바꿔 말하면 곧 평판이 추락할 일이 생긴다는 건가?'
좋은 일에는 마가 낀다고 했던가? 승승장구하던 기적의 앞에 뜻밖의 암초가 자라나고 있었다.
'그런데 평판이 추락할 일이 뭐가 있지? 지난번 위기를 기회로처럼 의료사고라도 생기는 걸까? 하지만 매직 핸드와 매직 아이의 도움을 받는 내가 의료사고를 일으킬 확률은 높지 않은데…….'
그렇게 생각했을 때 기적은 2개의 이름을 떠올렸다.
첫 번째 이름은 박영규였다. 케이스 컨퍼런스부터, 골절 사고까지. 여러 번에 걸쳐 기적을 곤란하게 만들었던 그라면 충분히 다른 음모를 꾸밀 가능성이 있었다.
두 번째 이름은 명석한이었다. 기적에 대한 반감은 물론, 병원 이사장의 손자이기도 한 그는 충분히 그럴 만한 동기와 힘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기적은 석한의 뒤틀린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아닐 수도 있지만…… 아무튼 조심해야겠어.'
그렇게 기적이 갑작스러운 퀘스트를 두고 고심을 거듭할 때였다. 밖에서 인사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접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목소리의 주인공은 명의진이었다. 기적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대답했다.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러자 곧 문이 열리며 명의진이 모습을 드러냈다.
"실장님, 바쁘지 않으시면 저랑 잠시 얘기 좀 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할 말이 있어서요."
할 말이 있으면 잠시 들르라고 하면 될 텐데 직접 찾아오는 정중함은 또 뭐란 말인가? 기적은 황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실 말씀 있으면 전화로 부르시면 되는데…… 이쪽으로 앉으세요."
기적은 자신이 앉아 있던 의자를 기꺼이 명의진에게 양보했다. 그러나 명의진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이 스툴에 앉으면 됩니다. 어디까지나 손님이니까요. 실장님 자리는 실장님이 앉으세요."
명의진은 바퀴가 달린 스툴을 끌어다 앉으며 기적의 방을 주욱 살폈다.
"정리 정돈을 제법 잘해 놨네요? 남자 방치고는 엄청 깔끔하네요. 아니지, 굳이 남자라는 수식어를 달지 않아도 좋을 것 같네요."
기적은 뭔가 좋지 않은 말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제나 시원시원하게 말을 하던 명의진이 주저리주저리 딴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퀘스트가 나오기 무섭게 원장님의 방문이라…… 아무래도 불안한데?'
기적의 속내를 알 리 없는 명의진의 딴소리는 계속되었다.
특수치료실은 잘 돌아가는지, 건의 사항은 없는지, 직원들은 잘 적응하고 있는지, 힘든 점은 없는지, 우수사원 수상을 축하한다던지, 두서없이 질문을 던져 대고 있었다.
좀처럼 진전되지 않는 이야기에 기적이 답답함을 느낄 때였다.
"음…… 그렇군요……. 저기 실장님…… 이런 이야기가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명의진이 그의 시선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그의 기억은 조금 전 있었던 만남을 더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