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53화 (53/205)

# 53

시간아 멈춰라 (9)

첫 만남 이후 박현숙은 열심히 치료에 임했다. 기적이 보여 준 치료에 고무되었는지 더는 무력감을 표출하지 않고 열심히 동작을 따라 했다.

그것은 비단 치료 시간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박현숙은 치료가 시작되기 30분 전부터 치료실에 도착해 기립기를 이용해 스탠딩 자세를 유지하고, 전기 치료기를 이용해 근육을 자극하기도 하며 운동 시간을 늘려 나갔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실력 있는 치료사를 만난 환자가 긍정적으로 변하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기적은 그 모습을 보며 크게 놀랐다. 박현숙 때문이 아니었다. 기적이 놀란 것은 박현숙의 보호자이자 남편, 한남훈 때문이었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할 수 있지, 백번을 생각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한남훈은 박현숙을 지극정성으로 돌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즐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사실 자식을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부모는 많다. 하지만 반대로 부모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자식은 그리 많지 않다. 그리고 배우자를 지극정성으로 돌보는 배우자는 더욱 드물다. 버리고 도망가지 않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호기심을 참지 못한 기적이 한남훈에게 다가갔다. 이날도 한남훈은 틸팅 테이블(기립기)을 통해 스탠딩 자세를 취하고 있는 박현숙의 맞은편에 서서 아이 콘택트를 하고 있었다.

"일찍 오셨네요? 오늘도 즐거워 보이세요."

"아무렴요. 사랑하는 아내와 이렇게 데이트를 하는데 즐겁지 않을 이유가 있겠습니까? 매일이 오늘만 같으면 좋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기적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데이트요?"

"네, 데이트가 뭐 별겁니까? 이렇게 두 눈을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누면 그게 데이트지요."

아내와 함께라면 장소와 상황 같은 것은 상관없다. 한남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또 시작이네……."

민망했는지 박현숙이 고개를 저었다. 기적의 눈이 빛난 것은 그 순간이었다. 가면을 쓴 듯 무표정했던 박현숙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란 것이 떠올라 있었다.

어떠한 약물로도 풀지 못했던 박현숙의 굳은 표정이 남편의 따스한 사랑 앞에서 눈 녹듯이 녹아내리고 있는 것이다. 의학, 또는 과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어? 박현숙 님 표정!"

기적이 짤막하게 외쳤다. 그러자 뒤늦게 변화를 발견한 한남훈이 '오오!'를 연발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앞서도 말했지만 거창한 동작만이 치료는 아니었다. 때에 따라서는 간단한 근력 강화나 진심을 담은 말 한마디도 훌륭한 치료 행위가 되는 법이었다. 앞서는 기적이, 오늘은 한남훈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시스템도 나섰다.

-퀘스트 [시간아, 멈춰라!]의 달성도가 2만큼 상승합니다. (27/100)

박현숙의 상태가 나날이 좋아지고 있었다.

"어떠세요, 이전에 찍어 두었던 동영상이랑 지금이랑 비교해 보니까 좋아진 게 느껴지세요?"

"네에, 그냥 막연히 하는 것보다는 이러케 비교해서 보니까는 좋네요.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생기고."

기적이 스마트폰 속 동영상을 보여 주면서 묻자 박현숙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이 박현숙을 치료한 지도 어느덧 2주일, 박현숙의 두 다리에는 힘이 붙어 있었다. 혼자만의 힘으로 기립이 가능했고, 무엇보다 자세가 굉장히 안정적으로 변해 있었다.

'무릎이 잠긴다면…… 더 이상 스탠딩 자세에 머무를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판단을 내린 기적이 박현숙의 손을 살짝 잡았다.

"오늘은 새로운 걸 해 볼 거예요. 도와드릴 테니까 한쪽 다리를 들어 볼게요. 우선 왼쪽 다리부터 들어 볼까요?"

"네? 네……."

마지못해 대답을 했지만 박현숙은 쉽사리 발을 올리지 못했다. 한 발로 서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의 전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한 발을 드는 것은 무리야. 이대로 왼발을 들면 그대로 넘어지고 말 거야.'

박현숙의 불안감이 손을 타고 기적에게 전해졌다. 이를 느낀 기적이 박현숙의 오른쪽 다리를 살짝 잡아 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떠세요, 조금 편안하세요?"

살짝 손을 댔을 뿐이었지만 기적의 촉진은 박현숙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6레벨에 달한 매직 핸드는 최적의 손 위치와 힘을 알려 주고 있었다.

안정감을 느낀 박현숙은 고개를 끄덕였고, 기적이 재차 말했다.

"그러면 한번 해 보세요. 제가 절대 넘어지지 않게 해 드릴게요."

"네……."

고개를 끄덕인 박현숙이 침을 꼴깍 삼킨 뒤, 왼쪽 다리에 힘을 주었다, 쇳덩이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다리를 들어 올리기 위해서.

그녀의 입에서 탄성이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어? 어!"

다리가 너무나도 쉽게 올라가고 있었다. 불안함 따위는 없었다. 조금만 움직이려 해도 힘이 풀려 버리던 다리가 오래된 고목처럼 단단하게 버티고 있었다.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아니면 환상?'

박현숙은 속으로 그렇게 자문했다.

물론 이는 꿈이 아니었다. 환상은 더더욱 아니었다. 다만 다리가 완전히 펴짐에 따라, 무릎 관절을 잠그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생긴 착각일 뿐이었다.

무릎을 살짝 구부리면 힘이 들지만, 무릎을 완전히 펴고 있으면 힘들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한편 한쪽에 서서 치료 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한남훈은 레이저를 쏠듯이 눈에 힘을 주고 있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었다. 흐르려는 눈물을 참다 보니 절로 그렇게 된 것이었다.

그라고 왜 힘들지 않았겠는가, 왜 지치지 않았겠는가? 겉으로는 웃고 있었지만 그의 속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박현숙 만큼이나,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병적으로 실력 좋은 병원을 찾아다닌 것은 어쩌면 박현숙이 아닌 그의 욕심, 또는 자기만족일지도 몰랐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다는.

그런데 최근, 그는 믿을 수 없는 하루하루를 경험하고 있었다. 다시는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들을 아내가 다시 해내고 있었다.

두 발로 서고, 웃고(비록 그만 알아볼 수 있지만), 발을 들어 올리고. 이제는 희망이 생겼다. 잃어버린 아내의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는, 그러한 희망이 그의 가슴을 때렸다.

"감사합니다…… 또 고맙습니다……."

그는 홀린 듯이 그 말을 반복했다. 그 목소리는 단연 기적을 향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치료실의 문이 열리며 일남일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병원장 명의진과 그를 수행하는 간호사였다.

담당 환자인 박현숙을 보기 위해 이곳에 방문한 명의진은 기적이 치료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한쪽에 앉아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간호사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허 간호사님, 지금 박현숙 환자 서서 다리 드는 동작을 하고 있는 건가요?"

"그런 거 같은데요……?"

"허허, 분명히 제가 혼&야르 스케일 4단계로 진단한 것 같은데요. 그런데 왜 저분이 지금 서서 다리를 들고 있는 거죠?"

"그, 글쎄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4단계는 아닌 것 같은데요?"

"그러니까요. 그럼 제가 오진을 한 셈이 되는 건가요?"

"호호, 그러네요. 실장님이 원장님을 돌팔이로 만들었네요."

명의진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런가요? 허허허, 이런 돌팔이라면 몇 번이라도 되겠습니다. 이 실장님은 항상 저를 놀라게 만드네요. 물리치료도 이 실장님이 하면 예술이네요. 흠…… 갑자기 생각난 건데…… 재활치료는 예술이다. 우리 병원의 캐치프레이즈로 내거는 것 어떻겠습니까?"

둘이 기분 좋은 만담을 나누는 순간에도, 기적의 치료는 계속되고 있었다. 누가 왔는지도 모를 정도로 그는 치료에 집중하고 있었다.

힘을 주느라 어깨까지 올라온 박현숙의 팔을 내려 주며 기적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다리 들어 볼게요. 그런데 이번에는 들어 올린 다음 한 발 내딛는 것까지. 바닥에 내려놓은 패드 찍고, 다시 제자리로. 할 수 있겠죠?"

"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운동으로 지친 박현숙을 다시 자리에 앉힌 기적은 그것으로 치료를 끝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동시에 메시지가 울렸다.

-경이적인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환자가 크게 만족해합니다. 보상으로 110(+1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퀘스트 [시간아, 멈춰라]의 달성도가 10만큼 상승합니다. (57/100)

그리고 메시지가 끝나기 무섭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짝짝짝짝!

"치료 잘 봤습니다."

명의진이었다. 자리에 앉아 지켜보던 그가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기적을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기적은 곧 명의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굴 가득 뿌듯한 미소를 지은 기적이 명의진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원장님,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명의진이 기적의 어깨 너머로 박현숙을 바라보며 말했다. 예의 젠틀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어쩐 일은요, 박현숙 님 상태를 보러 왔죠. 그런데 박현숙 님, 정말 좋아지셨네요?"

박현숙이 좋아지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그였다. 그런데 그가 생각한 이상으로 박현숙은 좋아져 있었다.

기적은 어깨를 으쓱해 보인 뒤 대답했다.

"네. 보시다시피?"

"정말 신기하네요. 어떻게 손만 대면 좋아지는지…… 누가 보면 마법이라도 쓰는 줄 알겠어요."

마법이라는 말에 뜨끔한 기적은 머리를 긁적였다.

"마법은 무슨요, 박현숙 님의 노력과 보호자분의 헌신이 없었다면 이렇게 좋아질 수 없었을 겁니다."

"보호자 분이요? 아~ 네. 정말 헌신적으로 간호하시더군요."

명의진은 그쯤에서 목소리를 낮췄다.

"원래는 무슨 잡지사인가 신문사에서 일했다고 들었는데…… 몇 년 전부터 아예 직장도 그만두고 아내의 병간호를 도맡아하고 있다더군요. 정말 대단합니다……."

'저는 그러지 못했는데 말입니다'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명의진은 차마 그 말을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이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만약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는 다른 선택을 했을까? 석한이와의 관계도 조금은 달라졌을까? 아니면 이 실장님을 조금 더 일찍 만났더라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을까?'

그러나 그것도 잠시, 그는 이내 고개를 흔들어 엄습하는 잡생각을 떨쳐 냈다.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이제 와서 이런 생각을 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없을 터였다.

평소의 젠틀한 미소를 얼굴 가득 장착한 명의진이 말했다.

"이것저것 검사해 볼 것도 있고…… 아무래도 재진을 해야 할 것 같은데요. 박현숙 님은 운동 끝나고 진료실에 좀 들러 주세요. 실장님도 계속 수고해 주시고요."

그 말을 끝으로 명의진은 치료실을 빠져나갔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적이 다시 박현숙과 한남훈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 치료는 여기까지 할게요. 진료실 들렀다 가세요."

"예예, 선생님. 오늘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둘의 얼굴은 쾌청한 날씨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다. 먹구름이 잔뜩 드리웠던 첫 만남과는 상전벽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달라진 모습이었다.

"뭘요, 제가 할 일을 했을 뿐인데요."

그 모습을 본 기적은 느낄 수 있었다. 잃어버렸던 박현숙의 시간이 조금씩 돌아오고 있음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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