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시간아 멈춰라 (7)
"그런데 이기적 실장님, 당황하는 거 귀엽더라."
"목소리 다정다감한 거 너무 좋았어."
특수치료실 회식이 한창인 한우정의 맞은편 홀.
거기에서는 재활의학과의 회식이 한창이었다. 사람들을 둘러보며 분위기를 주도하던 석한은 자꾸만 들려오는 지방방송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두 선생님들은 아까부터 무슨 이야기를 그리 재미있게 하십니까?"
석한이 불쾌한 마음을 웃음으로 포장해 말을 건넸다.
그 말에 잡담을 하고 있던 이정아가 멋쩍게 웃으며 이에 답했다.
"네? 아…… 저쪽에 이기적 실장님이 계시더라고요. 명 선생님도 아시죠? 이번에 특수치료실 실장으로 발령 나신."
자신이 말을 하는데 다른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석한은 심기가 불편했다. 그런데 자신의 이야기를 한 귀로 흘리며 기적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니…….
차오르는 분노로 인해 석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평온하지만, 조금만 수가 틀리면 심하게 속이 뒤틀리는 특유의 성격이 자꾸만 고개를 들려하고 있었다.
석한은 치미는 울분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그 말에 대답했다. 얼굴에 어색한 미소를 장착한 채였다.
"우리 병원 최고 유명 인사를 왜 모르겠습니까? 게다가 이기적 실장, 저랑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뒷말은 하지 않는 편이 나을 뻔했다,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
간호사들이 고교 동창이라는 말을 붙잡고 늘어졌다.
"고등학교 동창이셨어요? 실장님 고등학교 때 어떠셨어요? 인기 많았나요?"
"아, 몰라요. 별로 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요? 아쉽다……."
이정아는 그렇게 말하며 벽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기적의 테이블을 자꾸만 쳐다보고 있었다.
'빌어먹을…….'
석한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빠드득 이를 갈았다.
자신이 누구인가, 서울대학교 의대에 서울대 병원을 나온 슈퍼 엘리트였다.
학벌, 집안, 외모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스펙으로 항상 모임의 중심에 서 왔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앞에 두고 일개 물리치료사 이야기를 하고 있다니, 이 상황을 도저히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그 분노는 여지없이 기적을 향했다.
'새끼, 지금쯤 엄청 우쭐대고 있겠지? 안 되겠어. 내가 직접 가서 망신을 주고 와야겠어. 알려 주마, 너와 나의 차이를.'
마음을 먹은 석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선배 의사가 의아한 듯 물었다.
"갑자기 어디 가려고?"
석한이 웃으며 이에 답했다.
"고교 동창이 있다는데…… 아무래도 가서 인사라도 하고 와야 할 것 같아서요.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래야지, 다녀와."
"네."
얼굴을 돌리기 무섭게 잔뜩 얼굴을 굳힌 석한의 발걸음은 반대편 기적의 테이블로 이어지고 있었다.
* * *
들이닥친 불청객은 바로 명석한이었다. 그를 발견한 기적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명 선생님이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그러자 석한이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에이, 동창끼리 딱딱하게 굴 거야? 그냥 편하게 해. 사석이잖아?"
기적도 거절하지 않았다.
"뭐…… 좋을 대로."
둘의 관계를 알 리 없는 치료사들은 편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보고 보통의 친구 사이로 오해했다.
"두 분이 친구 사이이신가 봐요?"
"동창이면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와, 고등학교 동창이 같은 직장에서 만나다니 신기하다."
그러나 그들은 몰랐다, 겉으로는 우아하지만 수면 아래에서는 쉴 새 없이 발을 놀리는 백조처럼, 지금 두 사람 역시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물 밑으로는 치열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음을.
눈빛을 보내는 것으로 기적의 맞은편 자리를 확보한 석한이 자리에서 들고 온 소주잔을 내밀었다.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랑 술 한잔할까 싶어서 왔다."
"그래? 그럼 받아라."
기적은 잠자코 술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술을 받은 석한이 마찬가지로 기적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요즘 병원에서 소문이 자자하더라? 이야기 들었다. 늦었지만 승진 축하한다."
"고맙다, 너는 어때? 병원 생활 할 만해?"
"나야 뭐. 서울대 병원에 비하면 여기는 천국이지. 야근도 없고, 환자도 마일드하고, 갈구는 선배들도 없고. 아주 즐거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석한이 굳이 서울대를 거론하며 말했다. 이유가 있었다. 자신의 학력과 경력을 뽐냄으로써 기적을 깎아내리고, 또 주변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기 위함이었다. 조금 유치한 것 같아도 한국 사회에서 서울대 간판만큼 확실한 무기는 없었다.
그런데 주변의 반응이 생각과는 달랐다. 치료사들이 뭐 어쩌라고?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설명이 부족했나 싶어 석한이 재차 말했다.
"손 대는 족족 환자를 낫게 만든다며? 비결이 뭐야? 아버지…… 아니, 원장님이 엄청 칭찬하시던데?"
굳이 아버지를 앞에 붙인 것은 의도된 말실수였다, 자신의 아버지가 우리 병원의 원장이라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한.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옆자리의 맹동식에게 술을 따라 주며 기적이 말했다.
"특별히 내가 한 건 없는데…… 아무래도 주변에서 도와줘서 결과가 좋았던 것 같다."
"그래? 하긴 소문이란 게 원래 과장되기 마련이니까.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환자들이 좋아진 게 100% 물리치료 덕분이라고 할 수도 없는 거고. 사실 재활치료에서 물리치료가 전부는 아니잖아?"
탄력을 받은 석한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승진도 하고 했는데, 우리 재활의학과 선생님들에게 커피라도 한 잔씩 돌리면 어때?"
담당 환자들이 좋아진 것은, 사실 우리 재활의학과 의사들 덕분이다. 석한은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
주변에 앉아 있던 치료사들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그들의 얼굴에는 숨기기 어려운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석한의 말 속에서 그가 물리치료를 얼마나 깔보고 있는지를 느낀 것이었다.
그런 치료사들을 외면하기 힘들었을까, 마침내 기적이 반응을 보였다.
"내가 오해하는 건가? 물리치료가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말처럼 들리네?"
"어, 그게 그렇게 들렸나? 그랬다면 미안. 그런데 나는 잘 모르겠더라. 손만 대면 좋아진다는 게 조금 현실성이 없게 느껴진달까? 사실 대체가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한발 물러나는 듯했던 석한이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고 있었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지구 끝까지 갈 기세라 적당한 타이밍에 기적이 나섰다.
"너 물리치료 해 본 적도 없잖아. 그런데 현실성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석한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여유를 되찾았다.
"뭐? 나 의사야. 그것도 전! 문! 의! 그 정도는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지. 불이 뜨겁다는 것을 꼭 만져 봐야 아는 것은 아니잖아?"
"글쎄다…… 네 말대로 의사잖아. 의사는 사람의 생명을 대하는 사람이고. 그런데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니…… 그렇게 안이한 생각으로 임하면 안 되는 거 아냐?"
예상치 못한 반격에 석한은 당황했다. 최대한의 속도로 머리를 회전시켰지만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기적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의사가 생명을 구하는 전문가라면, 일상생활에서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전문가는 물리치료사라고 생각하는데?"
"뭐? 그야……."
염두를 굴린 석한이 답변을 위해 숨을 들이켰을 때였다. 기적이 그 찰나의 틈을 찌르고 들어왔다.
"너는 동의하지 않겠지만."
넌지시 내뱉는 기적의 말에 석한의 얼굴이 빨개졌다. 기적이 마치 '말해 봐야 소용없겠지. 너는 남의 의견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이니까.'라고 말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주변의 반응도 그를 더 화나게 만들었다. 주변에 앉아 있는 물리치료사들은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들이…… 감히 누구를?'
석한은 들끓는 속을 시원한 한 잔 술로 달래 보았다. 하지만 가슴속 분노는 가시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끓는 것 같았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그가 어떻게 빼앗긴 분위기를 되찾아 올까 고민할 때였다.
"먹을 만큼 먹었는데, 우리는 이제 그만 일어날까요?"
기적은 그럴 기회조차 주지 않을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치료사들이 기다렸다는 듯 보조를 맞추었다.
"네네, 너무 배불러요. 이제 그만 일어나요."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난 5명은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그대로 룸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석한의 눈빛이 분노로 불타고 있었다.
다음 날.
기적은 빨개진 눈으로 병원에 출근했다. 어제 있었던 회식의 후유증이었다. 그는 1차 회식에, 이어진 2차 회식으로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갔고, 파킨슨병에 대해 공부하고 치료 계획을 세우느라 거의 뜬 눈으로 날을 지새워야 했다.
피곤했지만 자신감을 얻었다. 곧 만나게 될 파킨슨 환자가 기다려질 정도였다.
'유비무환이라고 했어. 열심히 준비한 만큼 잘할 수 있을 거야.'
더 이상 기적에게 유비무환은 '비오는 날에는 환자가 없다'가 아니었다. 시스템이 가져다준 긍정적인 변화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도착해 있던 치료사들이 반갑게 인사를 해 왔다.
"실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어제 잘 들어가셨나요?"
늦게까지 회식을 한 것이 효과가 있었는지 치료사들은 기적을 조금 더 편하게 대하고 있었다.
치료사들 간에 흐르던 어색한 분위기도 상당 부분 흐려져 있었다. 그들은 어제 회식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주제로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스스럼없이 서로를 대하고 있었다.
'뭔가 치료실이 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네.'
그 덕분에 기적은 좋은 기분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뜨거운 모닝커피로 밀려드는 졸음을 떨쳐 낸 그는, 9시 타임인 소영이를 치료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어제와 같은 일과가 이어졌다. 기적은 치료를 했고, 담당 환자가 거의 없는 치료사들은 그 치료를 지켜보고, 또 도우며 시간을 보냈다.
변화가 찾아온 것은 오후 2시 무렵이었다. 점심 식사와 춘곤증의 여파로 졸음이 몰려들 무렵, 잠을 깨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체구를 가진 40대 초반의 남자가 휠체어를 밀며 치료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휠체어에는 그보다 조금 더 나이가 들어 보이는 여자가 앉아 있었다.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한 얼굴을 보는 순간, 기적은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어서 오세요, 박현숙 님이시죠?"
그 말에 반응한 것은 박현숙이 아닌 보호자였다.
"여기 이기적 실장님 계십니까?"
"네, 제가 이기적입니다."
기적이 그렇게 대답했을 때였다. 거구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와 양손으로 기적의 손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