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50화 (50/205)

# 50

시간아 멈춰라 (6)

"실장님, 방금 쓰신 게 PNF 스킬입니까? 이럴 줄 알았으면 저도 PNF를 들을 걸 그랬네요……."

"와! 진짜 신기해요! 저하고 나이 차도 얼마 안 나시는 것 같은데…… 실장님 실력 대체 무엇?"

그렇게 말하는 정도와 세진의 눈빛에는 기적에 대한 존경심이 흘러넘쳤다. 그 모습이 부담스러워 기적은 손사래를 쳤다.

"과찬입니다. 저도 선생님들 대답 들으면서 생각 많이 했어요. 같이 발전해 나가면 좋겠습니다."

빈말이 아니었다. 오늘 하루 동안 함께 치료를 해 나가면서 그에게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정도의 말을 들으며 보바스 치료법의 숙련도가 3까지 상승했고, 수정의 말을 들었을 때는 보이타 치료법을 조합 목록에 추가하겠느냐는 메시지가 들려왔으며, 세진으로부터는 슬링 사용법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 목록에 추가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름 바빴던 특수치료실에서의 하루가 지나갔다. 마지막 치료를 마친 기적은 실장실로 돌아가 컴퓨터를 확인했다.

컴퓨터에는 '메디넷'이라는 프로그램이 깔려 있어 배정받은 환자와 그 차트를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제법, 환자가 넘어왔네?'

예약 환자가 5명이나 넘어와 있었다. 기존의 환자가 2명, 신환이 3명이었다. 기적은 천천히 환자들의 차트를 확인했다.

-강소영 : 뇌성마비로 인한 성인형 편마비.

-김대규 : 심플 룸바 페인.

-정미옥 : 숄더 OP(수술)로 인한 ROM(관절 가동 범위) 제한. 통증 동반.

-함태식 : 뇌졸중으로 인한 편마비.

-박현숙 : 파킨슨 디지즈(파킨슨병).

'소영이는 나랑 수정 샘이랑 같이 보다가 차차 수정 샘에게 넘기는 것으로 하고…… 김대규 선수도 나랑 동식 샘이랑 같이 보다가 차차 동식 샘에게 넘기는 것으로 하면 될 것 같고. 정미옥 님은 세진 샘에게 맡기면 될 것 같고. 함태식 님은 정도 샘이 적임자일 것 같고, 마지막으로 박현숙 님은…… 어? 이분은 누구에게 넘길 수가 없는 환자였네……?'

처음 차트를 봤을 때, 기적은 박현숙 또한 윤세진이나 임정도에게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차트 하단에 적힌 메시지 때문이었다. 특이 사항을 적는 빈 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꼭 이기적 실장님이 치료해 주세요.

이미 담당은 기적으로 내정되어 있었다.

보호자가 원한 것인지, 아니면 담당의인 명의진의 개인적인 요청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겠지만…….'

그때였다. 불쑥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퀘스트 [시간아 멈춰라!]가 주어집니다.

-목표 : 시간을 멈추게 만드세요. (달성률 1/100)

-보상 : 1) 물리치료사로서 이름을 날릴 기회. 2) 대량의 포인트.

그런데 메시지의 내용이 심상치 않았다.

시스템 메시지를 읽어 내려가는 기적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뭐야? 시간을 멈추게 만들라니…… 이게 말이야, 당나귀야?'

당연한 말이지만 기적은 초능력자가 아니었다. 시스템의 도움을 받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치료 능력에 보정을 받는 것이지, 시간을 멈추게 하는 초능력 같은 것은 없었다.

그는 영화에 나오는 마법사 히어로도 아니었고, 각자 하나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아이돌 그룹의 멤버도 아니었다.

'정말 이게 가능한 일이야? 이걸 내가 할 수 있다고?'

그렇게 반문을 했지만 기적은 시스템의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불리한 일에는 항상 입을 다물어 버리던 시스템이었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질문을 던지기 무섭게 시스템의 대답이 들려왔다.

-시스템은 불가능한 퀘스트를 부여하지 않습니다.

'그, 그래? 불가능한 퀘스트가 아니라고? 내가 할 수 있다고?'

당황한 기적이 재차 물었지만 더 이상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재방송은 하지 않는다는 건가? 나 참…….'

시스템의 까칠한 태도에 헛웃음을 짓기도 잠시, 기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뭐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할 수만 있다면야 퀘스트를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단지 보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퀘스트를 완료할 때마다 따라오는 마약 같은 보람은 서서히 그를 중독시키고 있었다.

'그래, 한번 해 보자!'

치료를 하기로 결정한 순간, 기적이 처음으로 느낀 감정은 부담감이었다.

파킨슨병.

대표적인 난치병으로 알려진 이 병에 대해서 기적은 잘 알고 있었다. 신경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병이고, 직접 치료를 해 본 적도 여러 번 있었으니까.

하지만 잘 알고 있는 것과 별개로 이 병을 치료하는 것은 쉽지 않다.

치매, 근력 약화, 강직, 경련, 진전, 우울증 등, 다양한 증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난치병으로 불리는 것은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더구나 박현숙은 보통의 파킨슨 환자가 아니었다. 차트에 적혀 있는 각종 사항을 참고했을 때 그녀는 중증 파킨슨 환자에 해당되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시스템을 호출했다.

'어이, 시스템! 예전에 실장님도 그렇고…… 원장님도 그렇고…… 날 너무 과대평가하는 거 아니야? 아니면 네가 나를 과대평가하고 있거나?'

물론 대답 같은 것은 들려오지 않았다. 불리한 일에는 입을 다물어 버리는 시스템의 특성이 다시 발동한 것이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인 기적은 책장에 꽂아 두었던 전문 서적을 꺼냈다. 그리고 파킨슨병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

'파킨슨 디지즈…… 신경 세포 파괴로 인한 도파민의 부족으로 발생하는 질병…… 근력 약화는 기본이고, 체간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제한되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 등 정신적 질환이 동반되며…… 혼&야르 스케일로 평가한다…….'

손과 눈이 빠르게 움직임에 따라, 환자에 대한 치료 계획이 서서히 형태를 갖춰 가기 시작했다.

기적이 지식의 바다에 몸을 던진 지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기적은 문득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집중에서 깨어났다.

"들어오세요."

그러자 문이 열리며 정수정이 빼꼼히 고개를 집어넣었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자 이내 그녀가 입을 열었다.

"실장님…… 퇴근 시간이 지났는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셔서요. 다들 회식 기다리고 있는데……."

"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요?"

기적은 깜짝 놀라 시계를 확인했다. 어느새 시계는 5시 1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퇴근 시간이 10분이나 지난 것이었다.

"어? 이런…… 내 정신 좀 봐. 자료 좀 모으느라…… 잠깐만 기다려요, 금방 나갈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황급히 옷을 갈아입었다, 탈의실까지 멀리 갈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라고, 조금은 뜬금없는 생각을 하면서.

'늦었다. 빨리 나가자…….'

옷을 갈아입은 다음에는 황급히 가방을 메고, 잽싸게 치료실 밖으로 나갔다.

누군가 본다면 뭘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겠지만, 물리치료사에게 칼퇴근이란 굉장히 중요했다.

대부분의 물리치료사들이 물리치료사의 최고 장점으로 칼퇴근을 꼽을 정도니 말 다 했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기적은 첫날부터 꽤나 큰 실수를 한 셈이었다.

밖으로 나서자 4명의 치료사들이 퇴근 준비를 마친 채 기적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적은 밀려드는 미안함에 양손을 모았다.

"정말 미안해요. 제가 일을 좀 보느라…… 전달 사항이 몇 개 있는데 그거는 내일 아침에 하도록 하고……. 빨리빨리 회식하러 갑시다."

다행히 치료사들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네 사람은 기분 좋게 기적의 말을 받아 주었다.

"갑시다~!"

* * *

"실장님, 제 잔 한 잔 받으세요."

"그런데 실장님은 연세…… 아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아직 서른 안 되셨죠?"

"실장님은 치료 어디서 배우셨어요? 진짜 잘하시는 거 같아요."

"그러니까요. 오늘 환자들 치료하는 거 보고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신세계를 경험하는 느낌이었어요. 앞으로 많은 가르침 부탁드립니다."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선생님들은 실장님 케이스 컨퍼런스 못 보셨죠? 진짜 장난 아니었어요. 그때부터 실장님의 전설이 시작되었죠."

"그 전설은 휠체어 농구에서 절정을 찍으셨죠. 그때 같이 뛸 수 있어서 그저 영광이었습니다."

"그래요? 그거 녹화된 거 없어요? 한번 보고 싶은데……."

"제 얼굴에 금칠 제대로 하네요, 정말……."

기적이 곤란하다는 듯 이마에 손을 짚으며 쏟아지는 찬사에 응답했다.

여기는 명성 병원 인근에 위치한 한우정, 지난번 기적이 처음 입사했을 때 온 적이 있는 고급 식당이었다.

회식 분위기는 좋았다. 사람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누구 하나 소외되는 사람 없이 웃음꽃을 피울 수 있었다.

그렇게 대화가 이어지던 어느 순간.

"저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눈치를 살피던 맹동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1시간 넘게 술을 마신 덕분에 화장실이 급한 듯했다.

"그러세요."

바깥쪽에 앉아 있던 기적은 기꺼이 길을 비켜 주었다.

맹동식은 급히 화장실로 달려갔고, 대략 3분이 지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난 그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의 양옆에는 안면이 있는 여자 2명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2명이 기적을 향해 반갑게 웃으며 인사했다.

"실장님, 안녕하세요? 저희 아시죠?"

기억을 더듬은 기적이 어? 하고 대답했다.

"어…… 재활의학과 간호사 선생님들이시죠?"

"맞아요, 맞아요. 화장실 앞에서 맹 선생님을 만났는데, 여기서 회식하고 있다고 하셔서…… 저희 재활의학과도 저쪽 자리에서 회식하고 있거든요. 여기 계시다기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잠깐 앉아도 될까요?"

"자리가 될까 모르겠는데……."

기적은 에둘러 거절의 뜻을 밝혔다. 이 자리는 특수치료실의 첫 회식 자리인 만큼 방해를 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술이 얼큰하게 취한 간호사들은 거침이 없었다. 그녀들은 다소 비좁은 자리를 망설임 없이 파고 들어왔다.

"잠깐인데요, 뭐. 이렇게 가까이 앉으면 되죠. 호호호."

그리고 붙임성 좋게 술병을 들었다.

"한 잔 받으세요. 저는 이정아라고 해요. 제 이름 잊어버리지 마세요."

"아, 네……."

그렇게 기적과 간호사들의 불편한 동석이 시작되었다.

"실장님, 올해 스물아홉으로 알고 있는데, 맞으세요?"

"제가 스물여섯이니까 저보다 딱 세 살 많으시네요?"

"저 실장님 케이스 컨퍼런스 보고 완전 팬 됐잖아요."

간호사들은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기적에게 관심을 표하고 있었다. 기적은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가 부담스러워 그저 곤란한 웃음만 흘렸다.

"그런데 간호사님들은 안 가 보셔도 되요? 동행한 사람들이 찾으시는 거 아니에요?"

보다 못한 정수정이 나섰다. 말투는 사근사근했지만 그만 가 보는 것이 어떠냐는 뜻이 담긴 질문이었다.

그러나 간호사들은 역시 강적이었다. 그녀들은 한마디로 그 말을 일축했다.

"사람이 많아서 괜찮아요. 아마 저희들 이대로 집에 가도 모를걸요?"

"어머, 그래요? 그래도 조금 불편해 보이시는데? 동식 샘도 아까부터 한쪽 엉덩이만 걸치고 있거든요."

조심스러운 말투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수정이었다.

"그래요? 어머, 몰랐네? 그럼 제가 실장님 쪽으로 조금 더 들어갈까요?"

정수정과 이정아는 어디까지나 웃으면서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하지만 마주보는 두 사람의 시선에서 스파크가 튀고 있음을 기적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두 사람 뭐 하는 거지? 혹시 싸우는 건가?'

기적이 신경전을 벌이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나서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할 때였다.

"뭐야? 한참 찾았네. 두 사람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구세주가 등장했다. 나타난 이는 간호과 팀장 성미진이었다.

그녀를 발견한 이정아가 곤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특치실 실장님하고 인사 좀 하고 있었어요, 왜요?"

"명 닥터님 오셨어. 거국적으로 한 잔 한다고 빨리 모이래."

"앗! 그래요? 안 그래도 일어나려던 참이었어요."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그녀가 이내 눈빛을 빛내며 기적을 돌아보았다.

"실장님, 다음에 또 봬요. 오늘 즐거웠어요."

멀어져 가는 간호사들을 보며 기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고, 부담스러워서 혼났네요. 미안합니다."

"실장님이 미안할 게 뭐가 있어요. 눈치 없는 저 사람들이 문제지."

윤세진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간호사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정수정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수정 샘, 마냥 순둥이인 줄 알았는데 성격 있네요? 언니들한테 한마디도 안 지던데?"

수정이 어느새 빨갛게 변한 콧잔등을 살짝 찡그리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헤유~ 남한테 민폐 끼치는 사람들 못 보는 성격이에요."

"그래요? 흐음…… 아무튼 멋있었어!"

"별말씀을."

간호사들의 이탈과 함께 특수치료실의 회식은 다시 원래의 좋았던 분위기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좋았던 분위기는 채 10분이 되지 않아 깨지고 말았다. 또 1명의 불청객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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