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
시간아 멈춰라 (4)
두 번째 응시자는 그래도 모범적인 답변을 내놓았다. 조금 더 많은 시간을 얻은 덕분인지 전형적인 스트록 환자를 예로 들며 괜찮은 치료법을 제시했다.
다만 기적이 원하는 케이스는 아니었다. 이번 면접에서 그가 원하는 치료사는 자신이 할 수 없는 분야에 전문성을 가진 치료사들이었다.
마지막으로 윤세진이 입을 열었다.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밝았고, 또 확신에 차 있었다.
"슬링을 이용하면 정말 다양한 환자들을 치료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하기 힘든 운동인 열린 사슬 운동을 쉽게 할 수 있죠. 우선 말씀하신 대로 1명의 케이스를 잡겠습니다. 저는 다음과 같은 가상의 환자를 만들어 보았습니다. 어깨 수술 이후 견관절에 통증과 가동 범위 제한을 겪고 있는 40대 여자 환자입니다."
그렇게 말한 윤세진이 자리에서 일어나 직접 시범을 보였다.
"일단 무릎을 바닥에 대고 상체를 세웁니다. 그리고 양쪽 팔꿈치 밑에 슬링을 받쳐 웨이트를 제거한 다음, 팔을 들어 올리면서 몸을 앞으로 기울입니다. 이렇게 슬링을 이용하면 환자 스스로 관절을 가동시킬 수 있으면서도, 중력이 제거되어 통증이 잘 발생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 모습에서 자신의 실력에 대한 의구심 같은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순간을 즐기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면접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서로 말을 주고받지는 않았지만 그녀에게 높은 점수를 주고 있었다.
실력 있는 치료사의 등장에 셋은 좋은 기분으로 면접 심사를 이어 나갔다.
12번째 조를 맞이한 기적의 표정에 이채가 어렸다.
'저 사람들은?'
면접 대기실에서 만났던 3명, 즉 이진수, 이준휘, 그리고 임정도였다.
기적은 모른 체하며 입을 열었다.
"왼쪽에 34번 이진수 선생님부터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남자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답했다.
"안녕하십니까? 준비된 남자, 이진수입니다. 서울대를 졸업했고, 현재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저의 최고 장점은……."
학력과 현재 근무지를 말하는 이진수의 표정은 자신감이 넘쳤다. 어필이 먹혔는지 주호식과 임중기의 표정도 덩달아 좋아졌다.
한국 최고의 명문이라 할 수 있는 서울대, 서울대 병원 코스를 밟아 왔다는 사실에 플러스 점수를 주는 듯했다.
하지만 기적은 조금 달랐다. 선입견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이진수가 어떤 마음으로 지원했는지를 알고 있는 그에게는 서울대 출신이라는 사실이 오히려 마이너스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런 식으로 고대를 나온 이준휘와 신국대학을 나온 임정도의 자기소개가 끝났다.
기다렸다는 듯 임중기가 질문을 던졌다.
"서울대 병원도 그렇고 오성 병원도 그렇고 한국 최고의 병원인데, 그런 병원에서 일하면서 우리 병원에 지원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이진수와 이준휘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거짓말을 했다.
"서울대 병원도 좋은 병원이지만 명성 병원 또한 재활치료 쪽으로는 최고라고 알고 있습니다. 서울대 병원은 재활치료실이 지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반면 명성 병원은 지상 층에 위치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물리치료사를 바라보는 눈높이의 차이가 제가 이 병원에 지원한 이유입니다."
"오성 병원은 물론 최고의 병원입니다. 한국 최고 기업의 후원을 받는 만큼 복지도 좋고, 연봉도 많습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물리치료사가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습니다. 치료사들을 중시하는 명성 병원에 입사 지원서를 넣게 된 이유입니다."
두 사람의 그럴 듯한 대답에 임중기가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로도 질문은 대부분 이진수와 이준휘에게 집중되었다. 학벌이 주는 선입견 때문인지 임중기와 주호식은 임정도에게 별다른 기대감이 없는 듯했다.
'좋아!'
좋은 분위기에 이진수와 이준휘가 내심 쾌재를 부를 때였다. 기적이 의미심장한 얼굴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같은 별이어도 오성이랑 명성은 급이 다르지 않습니까? 단지 그 이유만으로 저희 병원에 지원하신 겁니까?"
임중기와 주호식은 그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기적이 딱딱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한 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반면 이진수와 이준휘는 완전히 얼어붙었다. 면접관이 자신들이 대기실에서 했던 말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혹시 대화를 들은 것이 아닐까? 그들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떨리는 가슴을 어찌하지는 못했다.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식은땀이 흘러내렸고, 페이스가 흐트러졌다.
"다, 단지 그 이유만은 아닙니다."
"맞습니다. 이유가 또 있습니다."
창백한 얼굴로 대답하는 두 사람을 보며 기적이 또 한마디를 던졌다.
"그 다른 이유를 들을 수 있겠습니까? 아, 혹시 두 분이 말하는 다른 이유라는 게 이전 병원은 계약직이고, 우리 병원은 정직이라서는 아니겠죠?"
의미심장한 말은 두 사람의 얼굴을 아예 창백하게 만들어 버렸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그렇다면 우연일 확률은 높지 않았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아무래도 눈앞의 면접관이 자신들의 대화를 들은 것 같았다.
눈을 마주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부터였다, 두 사람의 면접이 완전히 망가지기 시작한 것은. 횡설수설 말을 더듬던 둘은 이내 자신감을 완전히 상실해 아예 입을 닫아 버리고 말았다.
"이진수 씨? 왜 아무런 말이 없습니까?"
"이준휘 씨? 할 말 없습니까?"
임중기가 재차 물었지만 이미 그들의 귀엔 아무 말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크흠……."
결국 호의적이었던 임중기와 주호식의 시선도 차갑게 변해 버렸다. 명문대, 명문 병원 출신이라고 하기에 두 사람의 모습은 굉장히 실망스러웠다.
반면 임정도는 달랐다.
사실 처음에만 해도 임정도를 바라보는 면접관들의 시선은 곱지 못했다.
어디에 있는지 모를 지방대 출신에다가 그리 좋지 못한 경력, 더구나 더벅머리가 만들어 내는 인상은 아무래도 좋지 못한 선입견을 가지게 만들었다.
하지만 낮은 기대치 덕분일까, 딱히 기대 없이 던진 질문에 그럴 듯한 대답이 돌아오니 면접관들의 만족도는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면접관들의 평가는 조금씩 뒤바뀌고 있었다.
"저는 병원에서 가장 흔히 볼 수 있는 스트록 환자를 케이스로 잡겠습니다. 치료 방법은 보바스 치료법을 사용하겠습니다."
임정도는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기적은 이 중 보바스라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앞서도 말했지만 보바스 치료법은 기적이 주로 사용하는 PNF와 더불어 신경계에서 양대 산맥으로 쳐 주는 치료법이었다.
PNF가 환자의 좋은 움직임을 촉진시켜 상태를 진전시키는 치료법이라면, 보바스는 환자의 좋지 않은 움직임을 억제시켜 상태를 진전시키는 치료법이었다.
상이하게 다른 콘셉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환자의 유형에 따라 장단점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PNF는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환자에게는 적용하기 힘들지만, 보바스는 운동 능력이 떨어지는 환자에게도 적용하기 편하고, 반대로 운동 능력이 어느 정도 나온다면 PNF가 보바스보다 훨씬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점이다.
기적은 판이하게 다른, 두 치료법을 합치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때였다.
-치료에 대한 고민이 깊어지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두 치료법의 완성도를 높이면 자신만의 치료법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현재 등록된 치료법 목록 : PNF (숙련도 71/100)
'뭐야, 이건?'
기적은 느닷없이 들려오는 메시지에 깜짝 놀랐다. 치료를 접목해 자신만의 치료법을 만들 수 있다니…… 정말이지 놀라운 일이었다.
메시지가 이어지는 와중에도 임정도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보바스 치료법을 이용해서 환자의 병적인 움직임을 제한하겠습니다. 일단은 환자를 이렇게 세운 다음……."
그는 보바스 치료법의 원리를 설명하기도 하고, 직접 행동을 펼쳐 보이기도 하며 설명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기적의 머릿속에서 또 한 번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보바스 치료법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보바스 치료법을 조합 목록에 추가시킬 수 있습니다. 추가하시겠습니까?
'아…… 이런 식으로 추가할 수 있구나. 오케이, 추가할게.'
-보바스 치료법이 조합 목록에 추가되었습니다.
-현재 등록된 치료법 목록 : PNF (숙련도 71/100), 보바스 (숙련도 1/100)
기적은 메시지를 듣는 순간, 뭔가 중대한 변환점을 맞이했다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 치료 접목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그보다는 눈앞의 응시생에게 집중해야 할 시간이었다.
면접 마지막 조는 현재 근무하고 있는 인턴 사원들이었다. 5명의 인턴들이 한꺼번에 들어왔고, 기존의 치료사들과 같은 방법으로 면접이 진행되었다.
분위기는 전과 달리 부드러웠다. 아무래도 아는 얼굴들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분위기가 부드러워진 것이었다.
"안녕하십니까? 하진수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안녕하십니까? 2팀 인턴 김진아입니다. 특수치료실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준비된 사람이 결과를 만든다. 안녕하십니까? 2팀 인턴 진성한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맹동식입니다. 특수치료실을 위해 제가……."
"안녕하십니까? 제 이름은 정수정입니다. 앞뒤가 똑같은 사람이 되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준비한 자기소개와 함께 면접이 시작되었다.
질의응답을 들으며 기적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이것 참 어렵네…….'
처음 5명을 대하며 기적은 몇 번이나 다짐했다, 공정한 면접을 보겠다고.
하지만 팔은 안으로 굽는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3팀 인턴인 정수정과 맹동식이 잘하는 것일까? 자꾸만 마음이 그 둘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어쩌면 둘 다일지도 모르겠지만…….'
해서 기적은 마음먹었다, 이번 조의 면접은 주호식과 임중기의 판단에 따르겠다고.
'이번 면접은 한 발 뒤에서 지켜보자.'
그래도 뿌듯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었다. 어리게만 생각했던 정수정과 맹동식이 보여 주는 자신 있는 모습이 그에게는 색다른 감흥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면접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아는 얼굴을 마주한 면접관들은 분위기를 최대한 편안하게 만들어 주었고, 응시생들은 그러한 분위기를 등에 업고 제 역량을 십분 발휘했다. 오히려 기존의 면접생들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느 순간 주호식이 손뼉을 탁 치며 말했다.
"좋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것으로 면접 종료.
응시생들이 나감과 동시에 주호식과 임중기가 기적을 향해 의자를 돌렸다.
"수고 많았어. 어떻게…… 회의를 좀 하는 게 좋을까? 아니면 평가지를 줄 테니까 이 실장이 알아서 뽑는 게 좋을까?"
주호식의 말을 받은 것은 임중기였다. 눈치를 살피며 그가 입을 열었다.
"이 실장 혼자 뽑았다고 하면 나중에 말이 나올 수 있으니까…… 그래도 회의를 하는 게 좋지 않겠어?"
기적도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