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
시간아 멈춰라 (3)
기적은 그녀를 제지하기 위해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어떻게 오셨나요? 여기는 관계자 외 출입 금지 구역입니다."
그러자 여자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앗! 출입금지인 줄 몰랐어요. 면접 응시생인데…… 지나다가 일하게 될 곳이 보여서……."
여자는 또 화들짝 놀라 말을 바꿨다.
"아니, 그…… 합격하게 되면요……."
"아, 면접 보러 오신 분이었군요. 일찍 오셨네요. 미리 봐두면 좋죠. 원래는 안 되는데, 지금은 제가 있으니까 둘러보세요."
"앗, 감사합니다."
여자는 당황한 와중에도 꼼꼼하게 치료실 내부를 둘러보았다. 때로는 탄성을 내뱉기도 하고, 때로는 고개를 갸웃하기도 하면서 나름의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기적에게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뭘 보고 탄성을 내뱉고, 뭘 보고 고개를 갸웃하는 거지? 이따 면접 때 물어봐야겠다.'
그렇게 동상이몽이 계속되는 사이, 여자의 특수치료실 견학이 끝이 났다. 문을 걸어 잠그며 기적이 말했다.
"행운을 빕니다."
"감사합니다."
마지막 인사를 주고받은 기적은 다시 걸음을 옮겨 면접실로 향했다.
면접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면접실 앞 대기실에는 벌써 제법 많은 숫자의 면접생들이 몰려들어 곧 있을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적을 힐끔 쳐다보았지만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짐작컨대 그들은 기적을 자신들과 같은 면접 응시생으로 보는 듯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가뜩이나 영한 인상이었던 기적은 매직 페이스의 레벨이 오른 뒤, 더욱 영해졌고, 이는 면접생들이 생각하는 중후한 면접관과는 전혀 닮아 있지 않았다.
기적은 면접실로 들어갈까 하다가 이내 대기실 소파에 주저앉았다.
'잠시 동향을 살펴볼까? 사람들도 조금 살펴보고.'
면접생들은 자신만의 방법으로 다가올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어떤 이는 끊임없이 자기소개를 반복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연신 심호흡을 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람들도 있었다. 어디선가 걸어온 남자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번호가 바로 제 옆 번호시네요. 이진수입니다. 현재 분당 서울대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앉아 있던 남자가 역시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어? 그러네요. 저는 이준휘입니다. 고대 물리치료과 나와서 지금은 오성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이야, 오성 병원이요? 대단하시네."
"대단하긴요. 서울대 병원에서 근무하는 선생님이 더 대단하죠. 그리고 뭐 어차피 계약직인데요."
"하긴. 정직이면 오성에서 명성으로 올 리가 없죠. 같은 별이어도 엄연한 클래스 차이가 있는데."
"그러니까요, 큭큭."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기적은 쓴웃음을 지었다. 두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이 면접 자리에 나왔는지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명성 병원이 대학 병원인 분당 서울대 병원이나, 한국 굴지의 기업 오성 그룹이 소유한 오성 병원과 비교해 급이 떨어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병원에 대한 존중심도 없으면서 굳이 면접을 보러 온 것은 무어란 말인가?
그런데 두 사람의 대화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도 저희 옆 번호시네. 선생님은 어디서 오셨어요?"
이진수의 말에 오른쪽에 앉아 있던 더벅머리 남자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임정도라고 합니다. 저는 경기도에 있는 강남 성심 병원에서 왔습니다."
"강남 성심? 강남 성심 병원이 왜 경기도에 있어요? 강남에 있어야지?"
이진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이준휘가 고개를 살짝 흔들며 팔꿈치로 이진수를 툭툭 쳤다. 그러더니 뭐라고 작게 중얼거렸다.
"아……."
그 이후로 두 사람은 더 이상 임정도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그쪽을 철저히 외면하며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눌 뿐이었다. 그런데 자기들끼리 하는 얘기치고는 그 목소리가 너무 컸다.
"강남 성심이 뭐 하는 병원이지? 인터넷에 찾아봐도 안 나오는데, 혹시 알아요?"
"아, 뭘 또 그걸 찾아보고 그러세요? 어딘가에 있겠죠. 그래도 다행 아니에요?"
"뭐가요?"
이준휘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작게 말했다.
"일단 경쟁자 하나 줄었잖아요."
"아…… 맞네요, 큭큭큭."
두 사람은 오늘 처음 만난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최상의 합을 선보이고 있었다.
재미있는 것은 임정도의 반응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불쾌할 만도 한데 마치 아무 일 아니라는 듯이 들고 있던 자료로 시선을 돌리는 것이다. 태연한 얼굴에서는 초연한 느낌마저 전해졌다.
'이런 일을 자주 겪었던 건가?'
기적은 슬쩍 시선을 던져 임정도가 보고 있는 자료를 살폈다. 거기에는 예상 질문지와 모범 답안, 그리고 자기소개가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준비를 착실하게 해 왔네. 그럼 나도 슬슬 준비를 하러 가 볼까?'
기적의 동향 살피기는 거기까지였다.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기적은 코너 너머 면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몇몇 응시생들이 그 모습을 일별했지만 크게 신경 쓰는 이는 없었다. 내 코가 석자인 그들에게 지나가는 면접생을 신경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시간이 되자 공동 면접관 주호식과 임중기가 나타났다. 이번 면접의 인사권은 어디까지나 기적에게 있었지만 조언을 받기 위해 주호식과 임중기가 공동 면접관으로 배정된 것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주호식이 인사를 해 왔다.
"부팀장…… 아니지. 이제 이 실장이라고 불러야지. 이 실장, 기분이 어때?"
임중기도 웃으며 인사를 해 왔다.
"그렇지. 이 실장이라고 불러야지. 이 실장, 축하해?"
기적은 손사래를 치며 인사를 받았다.
"아닙니다. 아직 정식으로 실장이 된 것도 아닌데요. 아무튼 감회가 새롭네요. 이 병원에서 면접을 본 게 엊그제인데……."
"그러니까 더 대단한 거지. 아무튼 오늘 잘해 보자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 임중기가 함께 들어온 인사과 직원에게 신호를 보냈다.
"자, 시간 됐는데 시작하자고. 빨리 끝내고 쉬어야지."
"알겠습니다."
대답을 한 인사과 직원이 응시자들을 호출했다.
"면접 번호 1번 강서영 선생님, 면접 번호 2번 고중기 선생님, 면접 번호 3번 구선아 선생님 들어오세요."
면접은 가나다순으로 3명씩 조를 이뤄 진행됐다. 부름을 받은 3명이 자리에 착석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면접이 시작되었다.
"1번부터 준비해 온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기적의 요청에 1번 응시생 강서영이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안녕하십니까, 실력으로 무장한 물리치료사 강서영입니다. 저는……."
응시생들은 사력을 다해 자신을 어필했다. 그러나 면접관들의 표정은 평이했다. 그들의 자기소개에서 별로 특별한 것을 발견하기 힘들었다.
3명의 자기소개를 모두 들은 기적이 말했다.
"자기소개 잘 들었고요. 그러면 선생님들이 가장 자신 있게 치료할 수 있는 환자를 하나씩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 환자를 주제로 치료를 하시게 될 거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주세요."
그 말에 의자에 앉아 있던 응시생들의 얼굴이 흙빛으로 물들었다. 얼마 전 면접을 보며 느꼈던 당혹감을 그대로 돌려준 기적이었다.
물론 그때의 면접 방식과는 조금 차이가 있었다. 응시생이 워낙 많아, 그들이 원하는 케이스를 모두 준비할 수가 없는 관계로 치료는 구술로 대체했다.
그러나 응시생들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당황했다. 3명 중, 2명은 제대로 된 치료법을 내놓지 못했고, 그나마도 1명은 자신의 전문 분야가 무엇인지조차 말하지 못했다. 생각할 시간을 주었는데도 말이다.
기적은 가차 없이 빨간 줄을 그었다.
"잘 들었습니다, 여기까지 듣겠습니다."
신졸이라면 몰라도 경력이 있는 치료사들이다. 그런데 임의로 정해 준 것도 아니고, 자신이 정한 케이스조차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다른 질문을 던질 필요도 없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뻔하니까.
"다음 조 들여보내 주세요."
상황은 다음 조라고 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 기적이 원하는 전문성 있는 대답은 좀처럼 나오지 않았고, 그저 교과서에 나오는 원론적인 치료법만 나올 뿐이었다.
어떤 응시생은 질문에 상관없이 자신이 준비해 온 대답만 늘어놓는 경우도 있었다. 무슨 말이든 하자는 마음이었겠지만, 별로 플러스 점수가 되지는 못했다.
10개 조의 면접이 끝난 후, 잠시 쉬는 동안 기적이 입을 열었다.
"생각보다 수준이 별로네요. 죄다 유명한 대학에 좋은 병원에서 일하고 계신데 말입니다."
임중기가 그 말을 받았다.
"이 정도면 양호한 거지. 뭐가 됐든 말이라도 하잖아. 저번에 인턴 면접 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앉아 있다가 돌아간 치료사들이 태반이었어. 울고 간 사람도 1명 있었지, 아마?"
주호식도 고개를 끄덕였다.
"눈높이를 조금 낮추는 게 어때? 죄다 빨간 줄 그어 버리던데. 아까 동성구 선생님 어땠어? 나는 괜찮은 것 같던데. 대학 때 학점도 좋고, 영어도 잘하고. 무엇보다 아이들 병원 출신인데, 이 병원 치료사들 잘 교육하기로 유명하거든."
"그런가요? 그래도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호명을 받은 3명이 면접실로 들어왔다. 기적의 눈빛이 반짝 빛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3명의 얼굴 중에 아는 얼굴이 하나 있었다.
'어? 저 사람은…… 아까 특수치료실에서 봤던…… 이름이 윤세진 선생님이구나.'
치료실을 꼼꼼하게 살피던 윤세진의 모습은 기적의 뇌리에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31번 윤세진 선생님부터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반면 윤세진은 기적을 알아보지 못하는 눈치였다.
"물이 반 밖에 안 남았네. 아니, 물이 반이나 남았네? 발상의 전환이 결과를 바꾼다! 안녕하십니까? 긍정적 마인드의 소유자 윤세진입니다. 저는 다른 분들과 다르게 병원에서 일한 경험이 없습니다. 하지만 다년간, 슬링 센터에서 일하며 얻은 노하우는, 모집 요강에서 말한 전문성에 정확히 부합한다고 생각합니다. 면접 전에 우연히 특수치료실을 살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저는……."
그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임중기가 '어? 어떻게…….'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기적은 그런 임중기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제가 특수치료실에 갔을 때 우연히 만났습니다."
"아, 그래? 오케이."
그녀의 자기소개가 이어졌다.
"저는 누구보다 슬링 사용에 능하다고 자부하며, 이력서에 적혀 있다시피 필라테스 관련 자격증도 다수 보유하고 있습니다. 저를 선택하신다면 분명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앞서 특수치료실을 둘러봤기 때문일까, 윤세진은 확신에 찬 표정과 음성으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말이 절로 생각날 정도였다.
그 박력에 압도된 것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자신이 없는 것인지, 나머지 2명은 실수를 연발하며 윤세진을 주연으로 만들어 주고 있었다.
세 면접관 모두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공통 질문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자기소개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선생님들이 가장 자신 있게 치료할 수 있는 가상의 환자를 하나씩 생각해 주시겠습니까? 그 환자를 주제로 치료를 하셔야 되니까 잘 생각하고 대답해 주세요. 정확히 1분 뒤에, 이번에는 역순으로 이준성 선생님부터 진행할게요."
기적은 최대한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기가 죽은 이준성은 부담감을 이기지 못하고 횡설수설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