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꿈 (5)
목소리의 주인공은 정수정이었다. 평상시와는 달리 편안한 차림으로 나타난 그녀가 기적을 향해 인사하고 있었다.
"옆자리 비어 있는 것 맞죠?"
"네, 앉아요."
신이 나서 이야기를 늘어놓던 성철이 수정에게 반응했다. 석연찮은 표정의 그가 기적을 향해 물었다.
"어, 엄청 미인이시네? 직장 동료분이신가 봐?"
기적이 여전히 메마른 목소리로 답했다.
"어."
"그런데 부팀장님? 너 부팀장이야?"
"어."
"그, 그래? 이야, 출세했네. 그래서 어느 병원? 어차피 나는 들어도 모르려나?"
기적은 굳이 말을 섞고 싶지 않아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지만 수정은 조금 달랐다. 책상에 생수를 올려놓은 그녀가 대신 대답했다.
"아마 아실 걸요? 저희 병원 꽤 유명한데, 명성 병원이라고."
"명성 병원이 어디…… 명성 병원요?"
"네, 명성 병원요."
"양재역에 있는 그 명성 병원요?"
"역시 아시네요, 저희 병원 양재역에 있어요."
실실 웃던 성철의 얼굴이 일순간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마치 정지 화면을 보는 것처럼.
수정은 밝게 웃으며 초코 과자 하나를 기적에게 내밀었다. 기적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과자를 받아 입에 넣었다. 과자 맛이 유난히 달콤했다.
"기적이가 명성 병원 부팀장이라고요?"
"네, 지금은 부팀장인데 곧 실장으로 승진하세요."
"실장이요?"
"네. 곧 새로 생기는 부서로 승진 발령 나셨어요."
"아……."
성철은 충격을 받았는지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런 그를 향해 수정이 생수통을 내밀었다.
"땀을 많이 흘리시는데, 물 한 잔 드실래요?"
* * *
"아까 일부러 그런 거죠?"
성철이 바쁘다며 갑작스레 자리를 뜨고 난 뒤 기적이 수정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수정이 당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부팀장님은 다 좋으신데 그게 문제예요. 그러니까 항상 당하기만 하시잖아요. 필요할 때는 확실하게 말해 줘야 다시는 못 그러죠. 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부팀장님, 오늘 같은 일 되게 많으시죠?"
기적은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강동호부터 시작해서 오늘 만난 김성철까지. 사람들은 왜 자신에게만 이럴까, 하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이제와 보니 원인 제공을 한 사람은 자신이었다. 느끼는 바가 많았다.
"부정 못 하겠네요. 확실히 제 태도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요."
누구든 스승이 될 수 있다고 했던가, 그 말이 딱 맞았다. 윗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바른 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고,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항상 틀린 말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배울 만한 일이 있다면 편견 없이 배우는 자세가 필요했다.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런데 수정 샘은 여기 어쩐 일이에요? 소아 치료 관심 있어요?"
"네. 소아 치료에 관심 많아요. 그래서 소아 교육은 빠지지 않고 듣고 있는 편이에요."
"그렇구나. 좋은 선택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여자 선생님들은 힘이 부족해서 성인을 컨트롤하기는 힘들잖아요."
만약 최진아가 들었다면 성차별이라고 발끈했겠지만 사실이었다. 남자에 비해 여자가 힘이 부족한 것은 객관적인 사실이었고, 아무리 기술로 보완한다고 해도 덩치 큰 환자를 컨트롤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정도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환자만 맡는다면 좋겠지만 환자를 골라 받을 수는 없으니까요. 치료는 너무 어려워요…… 그런 의미에서 질문 있어요."
수정이 살짝 손을 들어 보이며 말했다.
기적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해 보라는 의미였다.
"스트록 환자랑 코드 환자랑 다른 점이 뭐예요?"
솔직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제 갓 치료를 진행한 수정이 던진 질문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수준 높은 질문이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기적이 이 같은 질문을 품었던 시기는 2년 차를 눈앞에 둔 시점이었다.
"와, 역시 스카이 출신은 다르네요. 질문부터가 수준이 달라."
그렇게 너스레를 떤 기적이 말을 이었다.
"정답이라기보다는 내 생각인데…… 일반적으로 사람은 누운 자세에서도 공을 던질 수 있고, 앉아서도 공을 던질 수 있고, 서서도 공을 던질 수 있잖아요. 이건 코드 환자도 똑같아요. 할 수만 있다면 누운 자세에서도 공을 던질 수 있고, 앉아서도 공을 던질 수 있고, 서서도 공을 던질 수 있죠. 우리는 이걸 흔히 모터 러닝이라고 말해요. 하지만 스트록 환자는 이 모터 러닝이 되질 않아요. 앉아서 가르친 걸 서서는 하지 못하고, 서서 가르친 걸, 앉아서는 하지 못하죠. 이 점이 가장 다른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죠?"
"코드 환자는 뇌에 손상을 받지 않았고, 스트록 환자는 뇌에 손상을 받았으니까요."
"아…… 그래서 그렇구나."
간단한 질문을 시작으로 둘은 심도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임상 신생아라 할 수 있는 수정은 궁금한 것이 많았고, 기적은 아는 것을 총동원해 그런 그녀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그러는 사이 오늘의 교육을 담당하는 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이크를 달고 나온 그녀는 오늘 교육 주제인 7세 뇌성마비 환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했다.
강의는 훌륭했다. 십수 년의 소아 치료 경력을 자랑하는 강사는 1시간가량 강의를 진행하고, 또 환자를 치료하면서 교육생들에게 많은 노하우들을 전해 주었다. 기적과 수정 모두에게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들이었다.
다시 일주일이 흘렀다.
그리고 그동안 소영이의 상태는 엄청나게 호전되었다.
우선 환측에 대한, 인지가 몰라보게 좋아졌고 이에 따라 근력이 강화되었으며, 다시 이에 따라 기립 자세가 몰라보게 좋아졌다.
처음 치료를 시작할 때 기적은 3단계로 단계를 나누었다.
1단계 : 환측에 대한 인지.
2단계 : 안정적인 기립 자세.
3단계 : 게이트.
그런데 그중 2단계가 완성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3단계를 시행할 시점이었다. 차트에 체크를 하며 기적이 말했다.
"어머니, 오늘부터는 조금씩 걸어 볼 거예요."
그 말에 민선오가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정말요? 이제 걸어도 되는 건가요?"
기적은 소영이의 발밑에 있는 체중계를 가리켰다.
"보시면 오른쪽 체중계가 9.7kg, 왼쪽 체중계가 9.9kg입니다. 약간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건 발달상의 차이라고 감안한다면…… 이제 소영이 혼자서도 균형을 유지할 수 있게 됐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제 조금씩 걸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감사해요! 정말…… 선생님 못 만났더라면 어떻게 됐을지…… 상상하기도 싫어요."
"별말씀을…… 소영이가 잘해 준 덕분입니다."
치료사와 보호자 간의 훈훈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전화벨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양해를 구한 민선오가 전화를 받았다. 이전과는 달리 딱딱한 목소리였다.
"무슨 일이야?"
"뭐?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떻게 해? 잠깐만 기다려……."
잠시 폰을 내린 민선오가 전화 좀 받고 오겠다며 치료실을 걸어 나갔다.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치료를 이어 나가려 할 때였다.
"엄마, 아빠 또 싸우나 봐요……."
소영이었다.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운 소영이가 그렇게 말을 하고 있었다.
기적이 아연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그게 무슨 소리야?"
어느새 소영이는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있었다.
"엄마, 아빠…… 나 때문에…… 맨날 싸우거든요. 아빠는 돈 번다고 힘들고…… 엄마는 저 돌본다고 힘들고…… 안 싸우면 좋은데…… 다 나 때문이에요."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적은 가슴이 먹먹해져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소영이의 고백이 이어졌다.
"그래서…… 나 정말 열심히 해요. 내가 안 아프면 엄마랑 아빠도 안 싸우겠죠?"
여섯 살.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뛰어놀아야 할 나이였다. 단언컨대 이런 걱정을 해야 할 나이가 아니었다.
'아픈 아이가 철이 일찍 든다더니…….'
하지만 다 나 때문이라는 소영이의 말은 틀렸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아빠의 잘못도, 엄마의 잘못도, 그렇다고 소영이의 잘못도 아니었다.
그래서, 만약 무언가가 잘못됐다면 그 잘못된 것을 반드시 바로잡아야 했다.
기적은 가만히 소영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 손을 매개체로 삼아 마음을 전달했다.
'선생님이 도와줄게, 잘못된 것이 있다면 같이 바로잡아 보자.'
그 마음이 전달된 것일까, 소영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부터는 치료할 때 어머님은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기적의 요청에 민선오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머, 왜요?"
"오늘부터 게이트를 할 생각인데, 보호자가 있으면 소영이가 자꾸 의지하려고 할 것 같아서요. 30분 동안 커피라도 한 잔 하시면서 조금 쉬고 오세요."
좀처럼 소영이에게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민선오였다. 하지만 하늘까지 치솟은 기적의 신뢰도는 그런 그녀마저 움직이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면 그렇게 해야죠. 말씀대로 커피나 한 잔 하고 와야겠네요. 얼마 만에 가져 보는 커피 타임인지 모르겠네요……."
막상 커피를 마실 생각을 하니 기분이 좋은지 민선오는 방긋 웃음을 지었다.
"소영아, 잘해!"
파이팅을 외친 민선오가 치료실을 나섰다.
이제 치료실에는 기적과 소영이, 이렇게 둘만 남았다.
고요해진 치료실 안에서 기적은 소영이를 바라보았다.
"오늘부터 서서 걷는 연습을 할 거야. 그런데 그냥 하면 재미없겠지?"
소영이는 그저 웃기만 했다.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준비한 게 있는데……."
그렇게 운을 뗀 기적이 자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소영이에게 꺼내 놓았다.
대략 2분의 시간에 걸쳐 기적의 말이 이어졌고, 소영이는 반짝 눈을 빛냈다.
"그렇게 하면은 엄마, 아빠가 좋아할까요?"
"그럼."
"그렇게 하면은 엄마, 아빠가 안 싸울까요?"
"그럼."
"그러면은 그렇게 할래요!"
기적이 완성시켜야 할 그림이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소영이와 모종의 이야기를 나눈 이후로, 치료는 더욱 활기를 띄어 갔다.
기본을 탄탄히 다지고 시작한 덕분에 소영이의 게이트 패턴은 처음과는 비교가 힘들 정도로 좋아져 있었다.
하지만 기적의 마음에 차는 정도는 아니었다. 기적은 소영이가 이보다 훨씬 더 잘 걸을 수 있다고 믿었다.
보호자 민선오에게 말했던 대로 90%까지 끌어올릴 수 있다는 것이 기적의 생각이었다.
"소영아, 상체에 너무 힘이 들어갔어. 힘을 빼고 걸어 볼래?"
"지금은 너무 왼쪽에 기대고 있잖아.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천천히 걸어도 좋으니까 똑바로 걸으라고 했지?"
만약 기적 혼자만 의욕이 넘쳤다면 치료는 지지부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소영이는 정말 열심히 걸음을 옮겼다. 걸음을 걸을 때의 진지한 표정을 보면 정말이지, 어른인지 아이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두 사람의 합이 맞아 떨어지며 소영이의 게이트는 몰라보게 좋아졌다. 기적은 슬슬 다음 단계를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