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누군가에게는 일상인 꿈 (4)
다음 날.
병원에 출근한 기적은 언제나와 같은 일과를 시작했다. 환자를 맞이하고, 또 치료하는 일상의 반복이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점이랄까?
기적은 어제 치료했던 소영이의 재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자신과는 상관없는 아이였다. 행여 오지 않더라도 그로서는 아쉬울 것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오지 않으면 그만큼 쉬는 시간도 늘어날 테니까. 하나, 그는 소영이를 기다렸다.
1명씩 환자를 치료할 때마다 그 시간이 다가왔다, 기다리는 그녀가 올 시간이.
3시 27분.
치료 시간까지 3분을 남긴 시점, 기적은 특수치료실로 이동했다. 그리고 치료 도구들을 준비한 채로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째깍째깍.
그러나 기다리던 얼굴은 나타나지 않았다. 예정된 3시 30분이 5분이나 지났음에도 환자가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기적은 베드에 걸터앉아 소영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치료 시간이 10분이 지났는데도 치료실 문은 열리지 않았다.
기적은 시스템을 향해 물었다.
'이런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거야, 퀘스트 실패야?'
그러나 시스템은 대답이 없었다.
한숨을 내쉰 기적이 베드에서 엉덩이를 들었을 때였다. 그토록 열리지 않던 문이 열리며 기다리던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영이와 그 보호자였다.
보호자가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하며 말했다.
"소영이 왔습니다, 늦었습니다."
기적은 왜 늦었냐고 묻지 않았다. 아무것도 못 하고 벌써 10분이 지나갔다. 보호자의 표정을 보자니 뭔가 이유가 있는 것 같았지만 지금은 이유를 묻는 시간조차 아까웠다.
"소영아, 이쪽으로 올래?"
그렇게 소영이를 부르는 것으로 치료가 시작되었다.
기적이 가장 먼저 한 것은 기립 자세에서의 균형 훈련이었다.
성인형 편마비를 가진 아이들의 대부분은 건측만 사용하려 하는 경향이 있다. 리글릭트(환측이 없다고 생각하는 병, 이 병을 가진 환자는 면도도 한쪽만 하고 세수도 한쪽만 한다.)까지는 아니더라도 환측을 무시하려 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환측에 대한, 인지를 시키는 것이 무엇보다 급했다. 근력 강화라든지, 관절 가동 범위 증진 등은 그다음의 문제였다.
기적은 2개의 체중계를 준비해 양쪽의 무게가 똑같이 나오도록 유도했다. 하지만 소영이는 환측으로 체중을 옮기는 것에 불안감을 느끼는지 쉽사리 균형을 맞추지 못했다.
'이렇게 환측에 불안감을 느끼는 애한테…… 게이트라니…… 걷지도 못하는 애한테 뛰라고 할 셈인가?'
사람들은 항상 지름길을 찾는다, 편법이라는 이름의 지름길을.
하지만 정도를 걷는 것이야말로 결국은 가장 빠른 길이 아닐까, 열심히 걸음을 옮긴 거북이가 토끼를 이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기적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무섭지? 그런데 선생님이 이렇게 잡아 주면 어때? 이렇게 해도 무서워?"
그러자 소영이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좀 나은 모양이었다.
"그래. 그러면 이쪽으로 조금 와 보자. 괜찮아, 계속 잡아줄 거니까."
함께 몸을 움직이자 왼쪽으로 과하게 치우쳐 있던 무게가 이내 오른쪽으로 넘어왔다. 물론 맞춰졌던 무게는 오래지 않아 시소가 넘어가듯 다시 왼쪽으로 넘어갔다. 아직은 중심을 유지하는 것이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치료사가 필요한 것이니까.
"자, 다시 한번 와 보자."
기적은 소영이와 장난을 치는 기분으로 치료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20분이 지나 치료를 종료할 시간이 다가왔다. 마음 같아서는 시간을 더 할애하고 싶었지만 다음 시간에 치료할 환자가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성공적인 치료를 끝냈습니다. 보상으로 15(+2)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환자의 상태가 호전되었습니다. (달성률 3/100)
그런데 보상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어느새 외투를 입고 가방을 멘 소영이가 기적에게 다가왔다. 배시시 웃으며 다가온 그녀는 가방에서 종이를 접어 만든 꽃을 꺼내 기적에게 내밀었다.
엉성하게 만들어진 꽃이었지만, 세상 어느 꽃보다도 아름다운 꽃이었다. 고맙다고 말하며 꽃을 받는 기적의 귓전으로 보호자의 음성이 들려왔다.
"사실 오늘 안 오려고 했어요."
난데없는 고백에 기적이 그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보호자의 말이 이어졌다.
"아무래도 못 믿겠어서…… 전에 다니던 병원으로 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병원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소영이가 그 꽃을 내밀더라고요. 선생님 주려고 만든 꽃이라면서요. 전에는 한 번도 그랬던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이쪽 병원으로 급히 방향을 틀었어요. 소영이가 선생님이 마음에 들었나 봐요."
늦게 도착했기에 뭔가 이유가 있겠구나 했는데,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몰랐다. 기적은 밀려드는 기특함에 소영이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맞잡은 손에 마음을 담아 의지를 전했다.
'잘했어. 그 선택 후회하지 않게 해 줄게. 꼭 유치원 가자.'
그날 이후 소영이와 보호자, 민선오는 성실하게 통원 치료를 받았다. 10분 전이면 병원에 도착해 준비를 마치고 기다렸기 때문에 기적은 버리는 시간 없이 알차게 시간을 활용할 수 있었다.
민선오도 완전히 기적의 편으로 돌아섰다. 그간의 경험으로 기적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것을 느낀 데다, 무엇보다 소영이가 좋아했기 때문에 무장을 완전히 해제해 버렸다. 정말 헌신적으로 치료를 돕는 모습에서 처음의 까칠했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당연히 성과도 따라왔다. 환측에 대한 두려움과 인지가 눈에 띄게 좋아졌고, 이에 따라 몸의 밸런스도 좋아졌다, 밸런스 훈련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만의 착각은 아니었다. 어느새 10%를 넘어간 달성도는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아니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다음 주부터는 밸런스 훈련을 줄이고 근력 강화, ROM(관절 가동 범위)을 늘리는 훈련을 추가할 거예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민선오가 깍듯한 태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이 부담스러웠던 기적이 질색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휴, 뭐 그렇게까지 인사하세요, 허리 접히시겠어요."
"어머, 제가 그랬나요? 존경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랬나 봐요."
"아이고, 존경까지…… 진짜 왜 이러십니까? 어머님……."
"민망해하시는데…… 여기까지만 할까요?"
"제발요."
고개를 저으며 말한 기적이 소영이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영아, 주말에 푹 쉬고 다음 주에 보자."
그러자 소영이가 예의 해맑은 미소로 화답해 왔다. 정말이지 중독될 것 같은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며 기적은 생각했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주말을 맞이한 기적은 이른 시간에 집에서 나왔다. 오늘은 그가 듣기로 마음먹었던 교육이 있는 날이었다. 그 교육에 늦지 않으려면 이 시간에는 집에서 나와야 했다.
메이저리그를 보느라 늦게 나온 덕분에 겨우 지하철에 오른 기적이 한숨을 내쉬었다.
'차 한 대 있으면 좋을 텐데…….'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는 것이 싫은 것은 아니었다. 지하철만의 맛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가끔씩은 지하철을 타는 것이 힘들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 빈도는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나도 나이를 먹은 건가? 자꾸 차 생각이 나는 걸 보니…….'
안정적인 수입처도 생겼겠다. 돈도 꽤 모였겠다. 이제는 뚜벅이를 탈출해도 좋을 것 같았다.
'차, 한번 알아봐야겠어, 뭐가 좋을지.'
불현듯 떠오른 차 생각에 기적은 스마트폰을 뒤졌다.
그러는 사이 지하철은 열심히 내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안내 방송에 놀라 황급히 몸을 일으킨 기적은 사람들 틈에 섞여 지하철을 빠져나갔다.
지하철역에서 목적지인 21세기 병원까지는 도보로 5분 거리였다. 시간이 충분했기에 기적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21세기 병원 강당으로 들어섰다.
"와, 사람 많이 왔네."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건만 벌써 강당 안에는 수많은 물리치료사들이 몰려들어 강의 들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물리치료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거 공부 조금 해서 자격증 한번 따 두면 거저먹는 직업 아니냐고. 하지만 그 말은 틀렸다.
애초에 자격증이 아닌 면허증일뿐더러 치료사들은 임상이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렇듯 주말에도 병원을 찾아 공부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것도 교육비로 적지 않은 돈을 투자하면서까지 말이다.
잠시 강당 내부를 둘러본 기적은 중간 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더 빨리 오지 못한 죄로 로열석인 앞자리를 뺏긴 것이었다.
'뭐, 여기도 잘 보이니까.'
기적이 자신의 자리와 무대의 거리를 가늠해볼 때였다.
"어이, 이게 누구야?"
누군가가 반갑게 외치며 그렇게 말했다. 고개를 돌려 보니 기적도 잘 아는 얼굴이었다. 대학교 동기인 김성철이었다.
"어어, 그래. 반갑다."
기적이 높지도, 그렇다고 낮지도 않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솔직히 성철과 대화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다. 대학 시절부터 그렇게 친하지도 않았고, 촉새라고 불릴 만큼 말이 많은데, 또 그 대부분이 자기 자랑이었다.
"설마, 소아 치료 들으러 온 거야?"
난데없이 말을 꺼내는 성철의 저의를 기적은 단번에 간파했다. 얼마나 할 게 없었으면 소아 치료 교육까지 왔냐는 말이었다. 보통 소아 치료는 여자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으니까.
기적은 딱히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건성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데도 성철은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어놓고 있었다.
"아아, 나는 오늘 강의하실 팀장님 보조로 왔거든. 팀장님이 나를 무척 맘에 들어하셔서…… 자꾸 소아 치료로 끌어들이려고 하는데. 알잖아, 나 애들이랑 별로 안 친한 거. 그래서 거절하느라 요즘 죽을 맛이라니까?"
"그렇구나."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대답하는 기적의 표정은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성철은 별로 알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를 침까지 튀겨 가며 늘어놓고 있었다.
성철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노골적으로 질문을 던졌다.
"너는 어느 병원에서 근무해? 혹시 쉬고 있는 거는 아니지?"
"어어, 근무하고 있지."
"그래? 그거 다행이다, 야. 그럼 어느 병원에서 일하는 거야?"
기적은 대화가 어쩐지 유치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아 그냥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러나 제 잘난 맛에 사는 성철은 그 말을 제 편한 쪽으로 해석했다.
"야야, 괜찮아. 다 그런 거지. 어떻게 이 많은 물리치료사가 다 좋은 병원에서 일하냐? 그러고 보면 나는 운이 좋았어. 인턴으로 들어갔다가 정직 전환이 돼서 21세기 병원에 취직됐으니 말이야. 알잖아, 이 병원 인턴도 어렵지만 정직 전환은 진짜 하늘의 별 따기인 거."
신이 난 성철은 이제 대놓고 제 자랑을 늘어놓고 있었다. 기적이 그런 성철의 모습에 한숨을 내쉴 때였다. 또 1명의 인물이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
"부팀장님!"
그를 부팀장님이라고 부르는 인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