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위기를 기회로 (3)
지이잉.
의자에 드러눕듯 앉아 있던 임중기는 갑자기 나타난 명석한을 보고 퍼뜩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 선생님?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방사선실에 무슨 볼 일이라도……?"
"그러는 임 과장님은 여기 어쩐 일이십니까?"
임중기가 애써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허허, 방사선 선생이 휴가를 가셔서 대타로 왔지 뭡니까."
"그래요, 그럼 오늘 사진 전부 과장님이 찍었습니까?"
"예. 오늘 사진 전부 제가 찍었습니다."
석한은 손가락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급히 오긴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좋을지 잘 계산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한시가 급한 마당에 언제까지고 이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번을 망설인 끝에 석한이 입을 열었다.
"그…… 문선규 님 방사선 사진 말입니다. 제가 오더를 냈었는데……."
문선규라는 말에 임중기가 눈치 없이 아는 체를 했다.
"아! 명 선생님도 미세 골절 의심되셔서 오신 겁니까? 안 그래도 제가 말씀을 드……."
물론 그의 말은 채 끝을 맺기도 전에 잘려 버렸다. 칼처럼 날카로운 석한의 말에 의해서였다.
"골절이라뇨? 지금 제 진단이 틀렸다고 말하시는 겁니까?"
실수했다는 것을 느낀 임중기가 급히 입을 다물었다. 엄밀히 따지면 과장인 자신이 평직원인 석한의 상사가 되는 셈이었지만 석한은 보통의 평직원이 아니었다. 상대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재활치료과에서 미세 골절을 발견 못 한 것 아니냐고 전화가 왔더라고요. 참, 우스운 일이 아닙니까? 자기들이 의사입니까, 방사선 사진을 판독할 줄 아는 겁니까? 의사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무슨 말들이 많은지, 참."
동의한다는 듯 임중기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를 본 석한이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저자세로 나오는 임중기를 보아하니 조금 더 뻔뻔해져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짧은 시간 이어진 대화로 임중기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파악한 것이다.
처음에만 해도 조심스러웠던 석한의 말투가 몰라보게 편안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임 과장님이 저를 좀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당연히 도와야죠. 제가 어떻게 도우면 되겠습니까? 말을 해 보세요."
"뭐,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레더럴로 찍은 문선규 환자 방사선 사진 삭제해 주세요."
"……."
속이 뻔히 보이는 말이었다. 그러나 임중기는 모르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점수를 잃는 것은 곤란했다.
"제가 일이 서툴러서 오더를 받았는데, 깜빡하고 안 찍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환자야 어느 자세에서 찍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못 할 거고…… 그렇게 하면 완벽할 것 같은데요?"
"아!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낸 석한은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모든 근심 걱정이 사라졌다. 레더럴로 찍은 사진이 지워지는 것으로 자신의 실수 또한 완전히 지워질 것이므로.
* * *
"부팀장, 이거 곤란하게 됐네…… 문선규 환자 조금 전에 재검했는데 대퇴골두 미세 골절이 맞대. 그리고 이전에 찍은 방사선 사진 다시 확인했는데, 그 사진상으로는 아무리 봐도 이상 소견이 없다고 그러네."
주호식의 말에 기적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정말 이상이 없었다고 합니까? 저 진짜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다리 살짝 들었다 놓은 것이 다인데, 그 정도로 골절이 생길 수가 있습니까? 만약 그런 환자라면 애초에 치료하라고 오더를 내지 말았어야 맞는 것 아닙니까?"
"그거야 그렇지. 나도 이상해서 알아봤는데…… 일이 좀 꼬였더라고."
주호식은 기존의 방사선사가 휴가를 가는 바람에 임중기가 대타를 뛰었고, 임중기의 실수로 환자의 측면 사진을 찍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명 닥터가 오더를 냈는데, 임 과장님이 바쁜 와중에 빠뜨린 모양이야. 그 사진만 있었더라면 책임 소재를 확실히 할 수 있었을 텐데…… 일단은 과장님이 어떻게 된 일인지 경위서 써 오라고 그러시네. 시말서 쓰라고 하는 거 내가 간신히 막았어……."
"……."
기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주호식은 그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었다.
"별일 없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일하다 보면 이런 일도 있고, 저런 일도 있는 거잖아."
맞는 말이었다. 치료하다 보면 정말 별일이 다 있다. 어쩌면 이 정도 일은 정말 아무것도 아닐 정도로. 하지만 억울했다.
분명 이 미세 골절은 자신으로 인해 생긴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자신이 경위서를 써야 하다니. 더구나 말이 경위서지 이 경위서를 쓰는 순간,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게 될 공산이 컸다. 모든 사고에는 책임질 사람이 필요한 법이니까.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는.
"알겠습니다."
미안했는지 주호식은 '나 이거 참…….' 하고 혼잣말을 하며 휴게실을 빠져나갔다.
다들 퇴근을 한 시간, 홀로 남은 휴게실에서 기적은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분명 이 골절은 전 병원에서 가지고 온 거야. 이건 그렇게밖에 설명이 안 돼. 그런데 증명할 방법이 없다는 이유로 내가 책임을 져야 하다니…… 어? 잠깐만, 전 병원?'
바로 그 순간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급격히 얼굴이 밝아진 기적이 급히 휴게실을 나섰다. 어쩐지 가벼운 그의 발걸음은 엘리베이터로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날 재활치료과 치료실.
조회를 위해 한데 모인 치료사들의 표정에는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유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치료과장 박영규가 주호식을 대신해 그들의 앞에 서 있었다, 그것도 잔뜩 찡그린 얼굴을 하고서.
"선생님들 요즘 정신 상태가 너무 해이해졌어. 내가 여러분들 불편할까 봐 어지간하면 조회에 안 나서려고 하는데, 오늘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여기 나온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어?"
좌중을 둘러보며 말하던 박영규가 기적을 향해 시선을 고정했다.
"요즘 치료실 돌아가는 분위기가 영 엉망이야. 오죽하면 의료사고가 터지겠어? 골절 사고라니, 골절 사고라니!"
의료사고라는 박영규의 말에 주호식이 깜짝 놀라 이의를 제기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이번 일은 의료사고까지 언급할 일이 아니었다.
"과장님, 이건 의료사고까지 갈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의료사고가 아니면? 환자가 골절을 당했는데 의료사고가 아니면 뭔데? 환자의 골절은 누가 책임질 거냐고!"
"……."
엄밀히 말해 의료사고는 아니었다. 아직 기적의 탓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박영규는 작심이라도 한 듯 의료사고로 몰아가고 있었다. 마치 그러기 위해서 이 자리에 나온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팀장! 경위서 써 왔어?"
"아직 안 썼습니다. 그리고 쓸 필요도 없을 것 같고요."
기적의 말에 박영규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그의 목소리에서는 살짝 떨림까지 느껴졌다.
"뭐야, 쓸 필요가 없어? 지금 내 말에 반항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분위기가 점차 험악해졌다. 흥분한 박영규가 붉어진 얼굴로 삿대질을 해 대기 시작했다.
"그럼 뭐야, 나한테 개기겠다는 의도가 아니면 대체 뭐야? 어? 뭐, 억울하니까 내 말쯤은 무시해도 좋다는 거야? 어? 정말 그래?"
"그런 거 아닙니다."
박영규는 흥분한 와중에도 너 잘 걸렸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잘만 하면 의료사고에 항명죄까지 엮을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다.
주호식을 비롯한 치료사들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기적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중에는 묘한 시선을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어쩌려고 저러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뭐야? 대체 뭐냐고! 입이 있으면 어디 말을 해 봐. 타당한 이유가 없으면 경위서 정도로 끝나지 않을 줄 알아!"
박영규가 작심한 듯 그렇게 쏘아붙였다.
이에 기적은 스마트폰을 꺼내 사진 한 장을 내밀었다. 그것은 단순한 사진 한 장이 아니었다. 불리한 상황을 단번에 역전할 수 있는, 그의 조커 카드였다.
"문선규 님의 방사선 사진입니다."
사진을 내민 기적이 그렇게 덧붙였다. 박영규는 빼앗듯이 스마트폰을 잡아챘다.
"방사선 사진이 뭐 어쨌다는 거야? 이미 이상 무라고 판결 났……."
말을 하던 박영규가 순간적으로 말을 멈췄다. 자신이 봤던 사진과 뭔가가 달랐다.
'대체 뭐가 다르지?'
박영규는 흔들리는 눈으로 사진을 스캔했다. 하지만 당황했기 때문일까, 정확히 뭐가 다른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의 의문을 해결해 준 것은 기적이었다.
"레더럴로 찍은 방사선 사진입니다."
"레더럴? 어, 이게 레더럴이라고? 레더럴로 찍은 사진은 없다고 들었는데……?"
박영규는 당황했다. 분명 임중기는 그에게 레더럴로 찍은 사진을 지웠다고 말했다. 그런데 그 사진이 여기서 등장하다니…… 지금 이 상황이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영문 없는 표정으로 눈동자만 뜨르륵 굴리는 그의 귓전으로 기적의 차분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저희 병원에는 없죠. 하지만 전 병원에는 있더라고요."
"저, 전 병원?"
"아침에 문선규 님을 만나고 왔는데, 전 병원 측에서 사진을 보내오면서 과실을 인정했다고 하더라고요. 방사선상 사진에 미세 골절이 있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사과를 했다더군요."
박영규는 말문이 막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붉어진 얼굴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릴 뿐이었다. 조금 전처럼 분노로 인한 것이 아니었다. 해일처럼 밀려드는 민망함 때문에 얼굴을 붉힌 것이었다.
대신 주호식이 앞으로 나섰다.
"부팀장, 그게 정말이야?"
"예. 문선규 님에게 사진 원본이 있으니 확인해 보시면 될 겁니다."
"잘했어, 정말 잘했어. 그런데 전 병원에서 인정했다는 게 정말이야? 그쪽에서 쉽게 인정을 했어? 아니, 애초에 전 병원에서 사진을 찍었던 건 어떻게 안 거야?"
주호식의 질문에 기적은 떠올렸다.
"어제 실장님이 경위서 쓰라고 한 다음에 말입니다. 휴게실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는데, 문득 생각이 나더라고요."
"뭐가 생각이 났는데?"
"어제 치료를 할 때, 문선규 님이 퇴원 전에 방사선 촬영을 했다고 말했던 것이요. 그래서 무턱대고 병실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문선규 님께 부탁해서 전 병원에 전화를 했습니다.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입원하자마자 찍은 사진에서 미세 골절이 발견됐다. 퇴원 전에 찍은 방사선 사진 소견이 어떤지 확인 바란다. 레더럴, AP 뷰 모두 첨부 바란다. 이렇게 말했더니 금방 연락이 와서 인정을 하더랍니다. 물론 골절을 발견하지 못한 것은 맞지만, 그 골절이 자신들로 인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더군요. 스트록 환자에게 흔히 있는 골절이라면서……."
어제 저녁에 있었던 일을.
"오오, 그래? 하긴 환자의 요구를 거절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쪽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겠네. 잘했네, 잘했어."
거듭 칭찬한 주호식이 박영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과장님, 그렇다는데요? 이렇게 되면 부팀장이 경위서 쓸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박영규는 걷어 올렸던 소매를 슬쩍 내렸다. 그리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 말이 사실이면 그렇지. 이 사람아, 그런 일이 있으면 진작 말했어야지. 괜히 사람 무안하게 만들어?"
"죄송합니다."
기적은 고개를 숙여 사죄했다. 하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알 수 있었다, 이번 사건의 진정한 승자가 누구인지를.
"그럼 수고들 해."
박영규의 표정이 그 증거였다. 뒤를 돌아 걸어가는 그의 얼굴은 마치 똥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증거는 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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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 승진할 수 있는 기회.
이보다 확실할 수 없는 증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