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
위기를 기회로 (2)
'위기를 기회로라…….'
퀘스트에서 풍기는 느낌이 뭔가 심상치 않았다. 위기를 기회로 바꾸라니. 다르게 생각하면 위기가 찾아온다는 말이 아닌가,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무슨 위기가 온다는 거지? 환자를 받은 다음에 퀘스트가 떴으니 환자와 관련이 있는 건가? 그렇다면 김대규 선수와 관련이 있는 걸까? 아무래도 유명 선수니까. 그만큼 위험이 따른다는 뜻이겠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렇게 생각하니 퍼즐이 착착 들어맞았다.
'아무리 그래도 승진할 기회라니…… 병원에 입사한 지 아직 세 달도 안 됐는데…… 너무 빠른 것 아닌가? 이래도 되는 거야, 정말?'
그러나 시스템은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유리할 때만 반응하는 시스템의 성향이 이번에도 발동된 것이었다.
'뭐, 나쁜 건 아니니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고. 그보다는 위기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네. 아무래도 미리 준비를 해 둬야겠어.'
기적은 스마트폰을 꺼내 김대규에 관한 자료를 수집했다. 호크스의 김대규라면 야구팬이 모를 리 없을 만큼 유명한 선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것이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요즘 2군에 있네? 타율도 0.220 밑으로 떨어졌고, OPS도 0.700을 못 넘기는 수준이면…… 내가 감독이어도 2군에 보낼 수밖에 없겠어. 부상이 있다는 말은 없는데…… 아무튼 체크 포인트.'
그런 식으로 기적은 김대규에 대한 정보를 하나하나 체크해 나갔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치료에 들어갈 시간이 되어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어차피 김대규 선수는 내일부터니까 지금은 이쯤 해 두자.'
스마트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은 기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치료실로 이동해 치료를 시작했다.
한 타임, 두 타임, 세 타임.
열심히 치료를 하다 보니 못 보던 얼굴이 나타났다. 새로 입원한 문선규 환자였다. 휠체어를 타고 내려온 그는 아주 정확한 발음으로 기적에게 인사를 해 왔다.
"안녕하세요? 문선규입니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차트에서 본 것처럼 별다른 문제가 없는 환자였다. 발병한 지도 오래되었고, 상태도 그리 심하지 않아 게이트도 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반갑습니다. 앞으로 문선규 님을 담당할 이기적 부팀장입니다."
반갑게 인사한 기적이 치료 계획을 설명했다.
"새로 입원하셨기 때문에 오늘은 간단한 평가와 인터뷰를 진행할 겁니다. 음…… 그런데 왜 휠체어를 타고 오셨나요? 역시 골반 통증 때문인가요? 차트에 가벼운 골반 통증이 있다고 적혀 있던데요."
"예. 체중을 실으면 골반에 통증이 있어서…… 체중 실리는 동작을 자제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고개를 갸웃했다.
"방사선 촬영은 하셨고요?"
"예. 오자마자 했는데 이상이 없다고 하더군요. 뼈에 문제는 없는 모양입니다."
"그래요? 그나마 다행이네요. 어디 한번 볼까요? 이쪽으로 누워 보세요."
베드를 툭툭 치며 말하자 문선규가 휠체어에서 일어나 몸을 눕혔다. 잠깐의 동작이었지만 통증이 있는지 그의 얼굴은 꽤나 일그러져 있었다.
"음……."
기적은 조심스레 문선규의 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그러자 통증을 느낀 문선규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
"조금 아프네요."
기적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했다.
"옷을 조금 내려 봐도 될까요? 바지만 살짝 걷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맨날 주사 맞는 엉덩이인데요, 뭐."
허락을 얻어 낸 기적은 옷을 살짝 들어 옷 안을 살폈다. 오래 씻지 않았는지 시큼한 냄새가 풍겨 왔지만 그는 환부를 살피는 데 온 신경을 집중했다.
몇 초간 유심히 살피자 조금 이상한 점이 보였다. 골반 관절 부위가 살짝 부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것이었지만 매직 아이의 도움을 받는 기적의 날카로운 눈썰미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기적은 걷었던 옷을 원상 복구한 뒤 손으로 환부를 살짝 만져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세하지만 살짝 부은 느낌이 들었다.
'이건 아무래도 이상한데?'
물론 붓기가 있다는 것만으로 골절을 의심할 수는 없었다. 환부의 붓기에는 단순 타박상이나 염좌가 원인이 되는 경우도 많으니까. 하지만 다른 곳도 아닌 골반이었다. 일반인이, 그것도 반신마비 환자가 염좌를 입기는 힘든 부분이었다.
그렇다고 타박상도 의심하기 힘들었다. 타박상을 입었다면 멍 자국이 있어야 하는데 환부는 깨끗하기만 했다.
'이건 다시 검사해 보는 게 좋겠어.'
모든 정황이 골절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재검을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환자분, 제가 보니까 미세 골절이 의심되거든요? 방사선 검사를 다시 한 번 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골절이라는 말에 문선규가 이마에 잔뜩 주름을 만들었다.
"고, 골절이요? 하지만 방사선 사진은 퇴원 전날에도 찍었었고, 이 병원에 와서도 찍었는데, 방사선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셨는데……."
물론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그래도 한 번 짚고 갈 필요는 있었다.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확실히 하고 가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한 기적이 베드에서 일어났을 때였다. 마침맞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팀장, 무슨 문제라도 있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박영규였다. 하루에 3타임, 치료할 때가 아니면 좀처럼 치료실에 얼굴을 보이지 않는 그가 어찌 된 셈인지 기적의 뒤편에 서 있었다. 주호식과 함께였다.
기적은 신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 과장님, 문선규 환자, 아무래도 골절이 의심돼서요."
그 말에 박영규는 정말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자식이 그걸 어떻게 알았지?'
의사가 방사선상 사진을 보고도 놓친 미세 골절이었다. 임중기가 이상을 발견해 내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의심이었지, 확신은 아니었다. 그런데 환자를 몇 번 만져 보지도 않은 기적이 골절이라 말하고 있었다.
'이거 진짜 무서운 놈이네?'
임수영에게 자리를 만들어 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달라졌다. 어쩌면 기적이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르겠다는 위기감이 그의 마음속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박영규의 얼굴과 말투가 절로 딱딱해졌다.
"뭐, 골절? 그게 무슨 말이야, 신환이잖아? 분명 방사선 촬영하고 왔을 텐데?"
"네, 하고 왔답니다. 방사선상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말도 들었고요. 그런데 환자 상태를 보니 골절이 의심됩니다. 다시 한 번 검사를 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바로 그때 박영규가 의미심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부팀장이 골절시킨 것은 아니고?"
"네?"
기적이 황당하다는 듯 반문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한 일이라고는 다리를 몇 번 들었다 놓은 것이 다였다. 그런 이유로 골절이 된다면 재활치료를 받는 환자의 뼈는 산산조각이 나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었다.
"제가 골절을 시키다니요. 제가 한 일이라곤 다리를 살짝 들었다 놓은 것이 다입니다. 통증은 원래부터 있었다고 들었고요."
그러나 박영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분명 오기 전에 방사선상 촬영을 했고, 담당의가 이상이 없다고 했잖아. 그런데 갑자기 골절이 됐다고 하면 그런 생각이 들 수밖에 없잖아?"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는데 진짜 아닙니다. 무리한 동작을 하지도 않았고 아무런 징후도 없었습니다."
기적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박영규는 할 말 다 했냐는 표정이었다.
"원래 사고는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야. 아무튼 지금 상황에서는 더 말할 필요 없을 것 같고. 일단은 부팀장 말대로 재검해 보자고. 골절이 아닐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설마, 담당의가 골절이 아니라고 했는데 골절이 있으려고? 아무것도 안 했다며?"
단어만 조합해 보면 골절이 아닐 테니 미리부터 겁먹지 말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말은 잘 들어 봐야 안다고 했다.
기적은 박영규의 말투에서 묘한 뉘앙스를 느꼈다. 동시에 그는 깨달았다. 시스템이 말한 위기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말이다.
'시스템이 말한 위기가 김대규 선수가 아닌 문선규 환자일 줄이야.'
완전히 당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아니지. 이번 퀘스트는 위기를 기회로야. 그렇다면 위기는 무조건 찾아올 수밖에 없어. 그래야 퀘스트가 성립이 되니까. 그리고 그 위기를 기회로 바꿀 어떤 방법이 있다는 말이겠지. 달성할 수 없는 퀘스트를 주지는 않았을 테니까.'
위기는 필연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불안하게 떨리던 심장이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박영규가 흠칫 놀랄 정도로 침착한 목소리로 기적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 * *
따르르릉.
갑작스레 울리는 데스크 전화에 석한은 수화기를 들었다.
"재활의학과 닥터 명석한입니다."
그러자 재활의학과 과장 김준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명 닥, 바쁜가?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별건 아니고 명 닥 환자 중에 문선규 님이라고 있잖아?
"네, 있죠. 오늘 입원하신 분 아닙니까? 오전에 제가 진료 봤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방금 전에 재활치료과에서 요청이 들어왔는데 대퇴골두에 미세 골절이 의심된다고 다시 한 번 방사선 사진 찍어 달라고 그러네? 거기 말로는 방사선 사진 판독에 뭔가 착오가 있는 게 아니냐고 그러는데?
"에이, 그럴 리가요. 그 사진 아직 제가 가지고 있어요. 골절로 의심되는 부분은 없었는데? 그러면 제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그래, 그렇게 하자고.
그것으로 수화기를 내려놓은 석한이 신경질적으로 방사선 사진을 찾아 판독기 위에 올려놓았다. 감히 자신이 이상 무라고 판독한 사안을 가지고 일개 물리치료사가 왈가왈부한다는 사실 자체가 굉장히 기분이 나빴다.
"의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지…… 제깟 놈들이 뭐라고 감히. 봐, 아무 이상도 없…… 어?"
신경질적으로 방사선 사진을 살피던 석한의 동공이 일순 지진이라도 일어난 듯 흔들렸다. 아침에는 보이지 않았던 가느다란 실선이 골두에서 포착된 것이다. 정면으로 찍은 사진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측면 사진에서는 분명히 의심되는 면이 있었다.
'이게 뭐야? 조금 더 세심하게 살폈어야 하는 건데……. 이거 정말 미세 골절인 것 같은데, 이거 어쩐다?'
하루에도 수백 장씩 확인해야 하는 방사선 사진, 타성에 젖어 사진을 대충 살핀 것이 화근이었다. 까딱하면 개망신을 당하게 생긴 것이다.
명석한은 똥 마려운 개처럼 진료실을 왔다 갔다 했다. 그러다가 이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급히 방을 뛰쳐나갔다.
타다다닥!
다급한 발걸음은 방사선실로 이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