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위기를 기회로 (1)
인사과장 임중기의 일상은 무척이나 바쁘다. 병원의 행정 업무는 물론, 기타 잡다한 일들을 모두 도맡아 처리하기 때문에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모를 정도다.
더구나 오늘처럼 방사선사가 갑작스러운 휴가라도 간 날에는 방사선사의 업무까지 봐야 한다. 방사선사 출신으로 인사과장이 된 임중기의 비애였다.
"에휴, 봐야 할 업무가 산더미 같은데."
진작 말했으면 대체할 방사선사를 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방사선사의 이번 휴가는 굉장히 급작스러웠다. 그 때문에 대체할 방사선사를 구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리고 그 부담은 오롯이 인사과장 임중기에게 돌아갔다.
"이 일을 왜 내가 하고 있어야 하냐고! 어? 뭐야?"
잔뜩 찌푸린 얼굴로 방사선 사진을 살피던 임중기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새로 입원한 신환의 골반 부위를 촬영한 사진이었는데 뭔가 조금 이상했다.
"대퇴골두가…… 조금 이상한데…… 이거 혹시 골두 미세 골절 아니야?"
대퇴골두란 골반에 붙는 대퇴골의 머리를 말한다. 원래대로라면 골절이 잘 일어나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질병으로 골이 약해진 환자에게는 심심찮게 골절이 일어나는 부위였다.
"이거 다시 촬영을 해 봐야 할 것 같은데?"
미세 골절이 의심된다면 재촬영을 하는 것이 맞았다. 그런데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이거 벌써 이상 무라고 판명 난 사진이잖아. 담당의가…… 명 닥터네? 이거 곤란한데……."
이미 담당의로부터 이상이 없다고 판명된 사진이었다. 그런 환자를 두고 방사선사가 이견을 제시하면 담당의가 고깝게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괜찮다고 했는데, 네가 태클을 걸어? 이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더구나 이 환자의 담당의는 명석한이었다. 이사장의 손자이자 병원장의 아들. 그런 사람을 상대로 이견을 단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가 어떻게 해야 하나 고심을 거듭할 때였다. 문이 열리며 익숙한 얼굴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재활치료과장 박영규였다.
"인사과장이 왜 방사선실서 이러고 있어?"
종이컵 하나를 내밀며 박영규가 말했다. 종이컵 안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가 들어 있었다.
"내 말이. 인사과장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나도 모르겠다. 으휴!"
한숨을 내쉰 임중기가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따뜻한 커피가 들어가자 마음도 조금은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박영규가 피식 웃었다.
"아주 죽상이구만, 죽상이야. 남의 일 하려니까 죽을 맛인가 봐?"
그 말을 들은 임중기가 억울하다는 듯 눈썹을 모았다.
"아니, 그게 아니거든? 이거 봐 봐. 신환인데 대퇴골두에 살짝 미세 골절이 의심되는 상황이란 말이야. 그런데 담당의가 이미 이상 무라고 판결을 내렸단 말이지. 그래서 이걸 그냥 넘어가야 하나 이견을 달아야 하나 고민돼서 그런 거라고."
말을 듣던 박영규의 눈빛이 일순 반짝 빛났다. 무언가 기발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세 골절? 그리고 신환이라고?"
"어어. 신환인데 아마 재활치료도 들어갈걸?"
"오호, 그래? 그거 잘됐네."
"잘돼? 뭐가 잘됐다는 거야? 환자가 골절이라는데."
"아니, 잠깐 딴생각 좀 했어. 재미난 생각이 떠올랐거든."
"뭐? 뭐가 어째?"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는 임중기를 향해 박영규가 말했다.
"임 과장, 그거 미세 골절 담당의한테 말하지 마."
"뭐, 왜?"
"괜히 말했다가 담당의한테 좋은 소리 듣겠어? 만약 골절이 발견돼도 좋은 소리 못 들을 거고, 없으면 더더욱 까일 테고. 어느 쪽이든 임 과장만 싫은 소리 듣고 밉보이는 거지. 어차피 임 과장 책임도 아니잖아. 담당의가 이미 이상 무라고 진단했다며. 나 같으면 절대 말 안 해."
커피를 한 모금 마신 임중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 일리 있네. 안 그래도 담당의가 명 닥터라서 조금 마음에 걸렸거든."
"명 닥터? 그럼 더 말하면 안 되지. 괜히 말했다가 완전 찍히고 싶어? 이 왕국의 왕자님한테?"
"그러려나?"
"아무렴. 절대 말하면 안 되지. 그런데 그 환자 이름이 뭐라고?"
"이름? 어디 보자…… 그러니까…… 어, 문선규 님이네."
"문선규? 오케이."
고개를 끄덕인 박영규가 손에 힘을 줘 들고 있던 종이컵을 구겼다. 구겨진 종이컵 사이로 남아 있던 커피가 뚝뚝 떨어졌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기발한 생각이 그의 뇌리에서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치료과장실로 들어온 박영규는 급히 주호식을 불러들였다.
"주 실장, 이번에 들어온 신환 배정 끝났어?"
난데없는 질문에 주호식이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박영규가 신환 배정에 관심을 끊은 것은 실로 오래전 일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호출해서 그런 질문을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눈치 빠른 박영규가 괜히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니, 뭘 그렇게 봐? 내가 물어보면 안 되는 거라도 물었나?"
주호식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직 배정 안 했습니다. 안 그래도 오늘 내로 하려고 하던 참입니다."
"그래? 어디 차트 좀 줘 봐."
무슨 바람이 불었나 싶었지만 주호식은 순순히 차트를 내밀었다.
차트를 넘기던 박영규가 눈을 빛냈다.
"어라, 김대규? 이 사람 야구 선수 아니야?"
"네, 맞습니다. 이번에 외래로 우리 병원에서 진료받기로 했습니다. 재활의학과 과장님 지인이라서 추천받았다고 하더군요."
"그래? 그럼 내가 치료해야 하나?"
김대규 정도면 굉장한 VIP였다. 그 때문에 박영규는 당연히 자신이 치료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병원의 VIP는 항상 자신이 맡아 치료해 왔으니까.
그런데.
"과장님이 이기적 부팀장한테 맡겨 달라고 부탁하시던데요. 그래서 이기적 부팀장에게 맡길 생각입니다."
"뭐? 재활과장이?"
그렇게 반문하는 박영규의 목소리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불편한 마음이 목소리에 그대로 묻어났다.
재활의학과 과장이 자신의 팀에게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것도 기분이 나쁜데, 감히 자신을 제쳐 두고 이기적을 지목했다는 사실이 더욱 기분이 나빴다. 재활과장이 자신보다 이기적 부팀장의 치료 실력을 더 높이 사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심리를 읽었을까, 주호식이 재빨리 답했다.
"아무래도 사적인 일이니 과장님에게 부탁하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부팀장을 지목한 건 그 때문일 겁니다."
"누가 뭐라나? 그렇게 진행해."
여전히 날 선 목소리로 말한 박영규가 김대규의 차트를 옆으로 툭 던진 뒤, 다음 차트를 펼쳤다.
"다음 차트는…… 문선규 환자네. 스트록으로 인한 반신 마비 환자?"
"네, 맞습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주호식의 눈치를 살핀 박영규가 다시 한 번 헛기침을 했다.
"큼큼, 이 환자 이기적 부팀장한테 맡겨."
주호식이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네? 그러면 이기적 부팀장 환자가 너무 많아지는데요? 환자 2명을 추가하면 풀타임에 딱 한 타임이 빕니다."
치료실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는 박영규가 치료사들의 타임을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할 말이 없어진 박영규는 괜히 짜증을 부렸다.
"뭐야? 재활의학과장 말은 듣고 내 말은 안 듣겠다는 거야? 정말 그래? 주 실장, 자네 어디 소속이야? 재활의학과야, 아니면 재활치료과야? 어?"
"죄송합니다. 재활치료과입니다."
박영규는 일단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나 그 목소리에는 여전히 날이 서 있었다.
"그럼 내 말대로 배정해. 알겠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었다. 상사의 명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쑤라고 해도, 하는 시늉을 해야 하는 것이 직장 생활이니까. 주호식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 봐."
박영규는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축객령을 내렸다. 인사를 한 주호식이 나가고, 박영규는 주먹으로 책상을 쾅 내리쳤다. 생각할수록 열이 받았다. 감히 자신을 제쳐 두고 다른 사람을 선택하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애송이 놈, 완전히 기고만장해 있겠군.'
박영규의 두 눈에서 불꽃이 피어올랐다. 질투라는 이름의 불꽃이었다.
과장실을 나선 주호식은 휴게실로 기적을 불러들였다.
"부팀장, 혹시 행복 호크스 소속의 김대규 선수 알아?"
"예, 압니다. 저 야구 완전 좋아해서요. 행복 호크스의 캐치프레이즈 스타 아닙니까?"
"그래? 그 환자가 우리 병원에서 외래로 치료를 받게 됐거든."
"와, 잘됐네요."
좋은 일이었다. 유명 야구 선수가 치료를 받게 되면 병원도 홍보가 될 테니까.
하지만.
"김대규 선수 부팀장이 좀 치료를 해 줘야겠어."
"네?"
그 사람이 자신의 담당 환자가 된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네? 저보고 김대규 선수를 맡으라고요? 아니, 어떻게 제가……?"
"보니까 부팀장, 센터 운영했었다며? 거기서 근골격계 환자들 많이 봤을 거 아냐?"
"그건 그런데…… 이건 조금 다르지 않나요? 저보다는 과장님이나 실장님이 하시는 게……."
기적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했다. 순간, 장난기가 발동한 주호식은 짐짓 마음이 상했다는 듯 말했다.
"나도 하고 싶지. 그런데 김대규 선수가 부팀장을 지목했다나 봐."
"네? 어…… 김대규 선수가 저를 어떻게 알고?"
"난들 알아? 뭐, 부팀장 치료 잘한다는 소문이 거기까지 갔나 보지."
"아……."
난감한 표정을 짓는 기적이 우스웠을까, 주호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농담. 재활의학과 과장님 지인이래. 조카사위라나? 뭐, 그래서 과장님이 부팀장한테 치료받으라고 했다나 봐. 부팀장 요즘 잘나가잖아."
"제가 무슨요……."
여세를 몰아 주호식이 말을 이었다. 아직 전달 사항이 남아 있었다.
"아무튼 그러니까 그런 줄 알고…… 그리고 또 하나! 문선규 님이라고 어제 입원한 환자가 있거든? 이 환자도 부팀장이 맡아 줘야겠어."
선전포고를 한 주호식이 재차 말을 이었다.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는데. 치료과장님이 화가 많이 나신 모양이야. 다른 과 과장이 우리 과 일에 관여하는 게 마음에 안 드신 거지. 내가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는데. 과장님이 다른 과 과장 말은 들으면서 내 말은 안 듣는 거냐고 무조건 부팀장한테 맡기라고 하더라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 거지, 뭐. 그래도 부팀장 환자 중에 한국영 님이 이번 주에 퇴원하잖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좀 고생해 줘."
그렇게까지 말하는데 기적이 거절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때였다.
-퀘스트 [위기를 기회로]를 부여합니다.
-달성 조건 : 위기를 기회로 바꾸세요.
-보상 : 승진할 수 있는 기회.
새로운 환자와 함께 새로운 퀘스트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