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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22화 (22/205)

# 22

꿈을 향해 던져라 (5)

다음 날.

기적은 김성우와 마주했다. 반쯤 풀린 눈으로 허공만 보고 있는 성우의 다리를 기적은 열심히 풀어 주었다.

"잠은 잘 잤니?"

"몰라요."

"컨디션은 괜찮고?"

"몰라요."

첫 만남 이후, 성우는 대부분의 질문에 '몰라요'로 일관하고 있었다. 정말 몰라서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아니었다. 너와는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속마음을 에둘러 말하는 것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래도 꼬박꼬박 존댓말을 써 준다는 정도랄까, 예상은 했지만 역시 쉽지 않은 상대였다.

기적은 슬슬 비장의 무기를 꺼내 보기로 했다.

"어제 후배가 알려 줘서 게임을 시작했는데 재밌더라고. 하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넘었더라. 타임 워프한 줄…… 혹시 너도 게임하니?"

"……몰라요."

좋아하는 분야가 나왔기 때문일까, 몰라요라고 답하는 성우의 어감이 이전과는 조금 달랐다. 기적은 이를 느꼈지만 모르는 척 말을 이어 나갔다.

"나인 레인저스라는 게임인데, 혹시 알아? 어제 3성 캐릭 뽑았는데, 이거 세더라고. 변태같이 생긴 몸짱 기린 캐릭터인데 몸빵 쩔던데?"

"……."

무슨 말을 하고 싶었는지 성우의 입이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것만 있으면 스테이지 고속도로 뚫릴 것 같더라."

계속해서 게임 관련 말을 해 봤지만 성우는 입을 움찔거릴 뿐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기적이 다시 한 번 미끼를 던지려고 할 때였다.

"스테이지…… 몇까지 깼는데요……?"

지나가는 듯한 목소리였지만 분명 성우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분명 기적을 향해 있었다.

"어? 스테이지 33인가까지?"

33이라는 말에 성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무미건조하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란 것이 생겼다. 역시 애는 애인 것일까, 이렇게 쉽게 반응하는 것을 보니 새삼 사춘기 어린애라는 사실이 피부에 와 닿았다.

기적의 얼굴도 덩달아 밝아졌다.

"어, 왜 웃어? 너도 이 게임 알아?"

원래대로라면 볼 것도 없이 '몰라요'라는 대답이 돌아왔을 터였다. 그런데 뜻밖의 대답이 들려왔다.

"알죠."

짧았지만 처음으로 나온 긍정의 대답이었다. 기적은 찬스가 찾아왔음을 직감했다.

"몇까지 깼는데? 너도 3성 캐릭터 있어?"

그 말에 성우가 피식 웃었다. 한껏 올라간 입꼬리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요? 라고.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예상했던 대답이 돌아왔다.

"저는 4성 3개 있어요. 스테이지 51까지 깼고요."

어제저녁 기적은 지식과 1시간 넘도록 나인 레인저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벌써 모든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지식이 많은 정보를 알려 주었기에, 기적은 어렵지 않게 성우의 눈높이를 맞출 수 있었다. 물론 잘난 척을 하는 것은 금물이었다.

"이야, 4성이면 엄청 세겠네. 완전 부러운데? 나는 4성 죽어라 해도 안 나오던데, 리세마라라도 해야 하나?"

"리세마라해서 4성 하나 받고 사전 등록 쿠폰으로 4성 하나 뽑고 시작해야죠. 50 스테이지 넘어가면 4성도 그냥 아이스크림이에요."

"그냥 녹는다고?"

"네."

고개를 끄덕이는 성우의 눈동자가 밝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껏 본 적 없는 밝은 눈빛이었다.

"어제 24시간 무료 뽑기 했는데, 4성이 따악! 개이득!"

"진짜? 나는 1성 잡캐 나왔는데……."

치료를 하는 기적이나, 의지가 없는 성우나. 둘 모두에게 죽을 맛이었던 30분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네? 아…… 네."

기적의 말에 성우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솔직히 말해 한 15분쯤 흘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웬걸? 벌써 30분이 모두 흘러가 있었다.

옆을 돌아보니 엄마가 휠체어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가 오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올라갈 시간이야."

"어……."

성우는 손현미의 도움을 받아 치료 베드에서 휠체어로 이동했다. 그리고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직접 바퀴를 움직여 치료실을 빠져나갔다.

엄마 앞이기 때문일까,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시크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귀신은 속여도 기적을 속일 수는 없었다.

-만족스러운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12(+1)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현재 누적 포인트는 123포인트입니다.

-환자(김성우)의 만족도가 5 상승합니다. (-7/100)

그에게는 레벨 업 시스템이 있었으니까.

거짓말을 하지 않는 시스템은 성우가 만족했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일 보자."

"선생님, 정말 수고 많으셨어요!"

웃으며 인사하자 손현미가 대신 인사를 한 뒤 급히 성우를 따라나섰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기적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신경을 많이 쓴 덕분인지 몸이 뻐근하게 느껴졌다. 기적은 다음 환자가 의지가 없는 환자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걸음을 옮겼다.

***

병실로 돌아온 성우는 베드에 등을 기댄 채 앉아 있었다. 적당히 열린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햇살이 그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성우는 습관처럼 스마트폰을 집어 들었다가 이내 내려놓았다. 분명 내려갈 때만 해도 올라오자마자 게임을 플레이하려고 했는데, 어쩐지 마음이 동하질 않았다.

'신기하네.'

다리를 매만져 보았다. 단순히 떠들면서 30분을 보냈다고 생각했는데 다리가 무척이나 시원했다. 치료 후면 항상 찾아오던 경련 현상도 오늘만큼은 깜깜무소식이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사고를 당한 이후 콧노래를 부른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자신의 콧노래를 들은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뭐야, 내가 왜 이렇게 신이 났지?'

문득 담당 치료사의 얼굴이 생각났다.

'이름이 이기적이라고 했나? 이름 한번 특이하네. 이기적이 뭐야, 이기적이?'

특이한 이름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기적을 떠올린 성우는 피식 미소를 지었다.

"성우야, 왜 혼자서 웃고 있어? 무슨 재미난 일이라도 있니?"

화장실에 다녀온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던 손현미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성우는 깜짝 놀라 상념에서 깨어났다.

"뭐? 재미난 일은 무슨, 전혀 아니거든?"

"전혀 아니라고? 에이, 그런데 왜 웃고 있어? 허파에 바람이라도 들었니?"

"웃기는 누가 웃었다고. 생사람 잡고 있네. 나 게임할 거니까 말 걸지 마."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성우가 스마트폰을 조작해 게임을 실행시켰다. 기적과 지난 30분간 떠들었던 바로 그 게임, 나인 레인저스였다.

어느새 게임에 집중하는 아들을 보며 손현미는 보조 의자에 앉았다. 사실 그녀는 기적과 커피를 마신 이후 많은 반성을 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동안 그녀는 재활치료라는 것을 무시해 왔다. 치료사들이 하는 행동들이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였고, 치료실만 갔다 오면 경련을 일으키는 아들의 다리를 보면 속이 상하기도 했다.

의사의 오더만 아니라면 내려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SCI 책을 보며 공부를 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신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당연히 이번 치료사 역시 이전과 별반 다를 바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에 만난 치료사는 지금까지 만났던 치료사들과는 많이 달랐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 자신을 찾아오질 않나, 아들이 하는 게임 이름을 알아오라는 미션을 내주질 않나. 멀쩡하게 생겨서는 엉뚱한 구석이 있었다.

물론 기대는 생기지 않았다. 부탁을 무시할 수 없어서 알려 주기는 했지만 그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늘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폐쇄적으로 대하던 아들이 치료사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 것이다. 거리가 있어서 모두 듣지는 못했지만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게임 이름을 알아오라더니…… 그럴 줄은 몰랐네.'

미션을 내 드리겠다던 기적의 얼굴이 떠올라 손현미는 그만 웃고 말았다. 그 얼굴을 떠올리자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아직까지는 예감일 뿐이었지만 앞으로는 웃을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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