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꿈을 향해 던져라 (4)
"수정 샘!"
수정을 부른 것은 기적이었다.
사실 기적과 수정은 출근길에 만날 일이 없었다. 8시 50분까지만 아침 조회에 참석하면 되는 기적과, 늦어도 8시 20분까지 도착해야 하는 수정 사이에는 30분 가까운 시간 차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둘이 만나게 된 것은 기적의 성격 때문이었다. 여유 있게 도착하는 것을 좋아하는 기적의 성향 때문에 둘이 같은 열차를 타게 된 것이었다.
수정은 목소리의 주인공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부팀장님."
"일찍 출근하네요?"
일찍이라는 말에 수정이 입을 앙다물었다.
"일찍은요, 겨우 맞출 것 같은데요."
"어? 아…… 혹시 선생님들은 조금 일찍 출근하나요?"
기적은 일부러 인턴이라는 말을 빼고 말했다. 수정에 대한 소소한 배려였다. 그러자 수정이 옅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저희는 8시 20분까지요."
"아이고, 엄청 빠르네요. 그래서 머리도 제대로 못 말리고 나온 거예요?"
아닌 게 아니라 수정의 웨이브진 머리칼에는 아직도 물기가 촉촉했다. 손으로 머리칼을 만져 본 수정이 멋쩍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어서 앞머리만 말렸어요. 제가 아침잠이 좀 많아서요."
아침 인사를 주고받은 둘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플랫폼을 빠져나갔다.
병원까지는 대략 8분 거리.
걸음을 옮기며 둘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대화는 주로 기적이 주도했다.
"갑자기 생각난 건데……."
"네? 뭐가요……?"
"저번에 같이 입사하게 되면 신세진 건 꼭 갚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혹시 밥이라도 한 끼 사는 거예요?"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수정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어디까지나 동기로 입사하게 될 경우를 가정해서 한 말이었다. 아니, 애초에 동기인 줄 알고 한 말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돼 버렸다. 말을 무르기도 그렇고, 또 밥을 산다고 하기도 뭐해서 수정은 어색한 웃음만 흘렸다.
그때 기적이 말했다.
"농담이에요. 오히려 제가 사야죠. 말 나온 김에 이번 주에 퇴근하고 밥 한번 먹어요, 동식 샘, 지숙 샘이랑 같이."
맹동식과 구지숙은 정수정과 같이 3팀에 속해 있는 인턴 치료사들이었다. 기적의 의도를 알아챈 수정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는요?"
"세 분이서 의논해서 알려 주세요. 세 사람이 한 사람에게 맞추는 것보다는 한 사람이 세 사람에게 맞추는 게 편할 테니까요."
"아…… 알겠습니다."
약속을 잡으며 걷다 보니 둘은 어느새 병원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병원 복도를 걸어갈 때였다. 문득 기적의 눈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머리를 질끈 묶은 40대 초반의 여자, 어제부터 담당하게 된 김성우의 보호자였다. 김성우는 보이지 않았고, 보호자 홀로 커피를 마시며 이름 모를 책을 읽고 있었다.
"수정 샘, 먼저 들어갈래요? 나는 커피 한 잔 하려고 하는데."
"네, 알겠습니다."
수정을 먼저 올려 보낸 기적은 보호자가 있는 커피 전문점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안으로 들어가자 아르바이트생이 환한 미소로 인사를 해 왔다. 기적은 평소 즐겨 마시는 바닐라 카페 라테를 주문한 뒤, 직원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신용카드처럼 결제가 가능하고, 병원 시설에 한해 30% 할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신통방통한 카드였다.
"준비 완료되면 진동 벨 통해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카드와 함께 진동 벨을 받은 기적은 적당한 자리를 찾는 것처럼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했다는 듯 예의 보호자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어, 안녕하세요? 김성우 환자 보호자 맞으시죠?"
그러자 잠시 눈을 깜빡이던 그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인사를 해 왔다.
"선생님? 여기는 어쩐 일이세요?"
"커피 마시려고 왔죠."
기적이 손에 들린 진동 벨을 흔들며 말하자 그녀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적이 그녀의 질문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어머님은 여기 어쩐 일이세요?"
심플하게 물었지만 환자는 어디에 두고 혼자 이곳에 있느냐는 말이었다. 이를 철석같이 알아들은 그녀가 대답했다.
"애가 아침에 잠이 많아서 이 시간에는 안 일어나거든요. 야간에는 애 아빠가 있기도 하고. 뭐, 좀 있으면 교대하러 가야 하지만요."
"그렇군요. 좀 앉아도 될까요? 어머님도 좀 앉으시고……."
"그럴까요?"
자리에 앉으며 기적은 보호자가 읽고 있는 책을 살폈다. 제목을 보니 SCI 환자에 관련된 책이었다.
"공부하시나 봐요?"
"네. 아무래도 제가 알아야 병간호도 할 수 있고, 홈 트레이닝도 시킬 수 있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는 중입니다."
가끔 보면 SCI 환자의 보호자가 어지간한 치료사보다 많이 알고 환자를 더 잘 다루는 경우가 있다. 기적은 아마 손현미도 그러한 보호자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보통 그런 경우는 환자의 부모인 경우가 많았으니까. 그러고 보면 내리사랑은 정말로 위대했다.
"그렇군요, 대단하시네요."
기적은 이야기를 나누며 보호자에 대해 알아 나갔다.
그 덕분에 그녀 이름이 손현미라는 것과, 본래 초등학교 교사를 하다 퇴직을 하고 아들을 병간호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만두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아들이니까요. 사실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아들이 저에게 집착이 심해서…… 아빠도 싫고 오로지 저만 찾으니까요."
"그렇군요…… 그럼 하루 종일 어머님하고만 이야기하나요? 뭐, 다른 건 좋아하는 거 없고요? 취미라든지……."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현미가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취미라고 해 봤자…… 폰으로 게임하기? 그게 걔 유일한 낙이죠. 하루 종일 폰 잡고 있어요. 다른 건 없어요. 몸을 쓸 수가 없으니까…… 예전에는 농구를 참 좋아했었는데……."
이야기를 경청하던 기적이 눈을 빛내며 끼어들었다.
"농구요?"
"예. 어릴 적에 농구를 엄청 좋아해서 유소년 농구를 시켰었는데 애가 키가 크질 않아서 그만뒀죠. 가만…… 그때 사진이 어디 있을 텐데…… 사진 보실래요……?"
바삐 손가락을 놀려 스마트폰을 뒤지던 손현미의 목소리가 급격히 작아졌다. 막상 사진을 보여 주려다 보니 자신이 너무 오버했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보여 주세요, 보고 싶어요."
기적이 담백한 목소리로 말하자, 손현미가 멋쩍은 표정으로 스마트폰 속 사진을 내밀었다. 겸연쩍은 목소리와 함께였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목소리가 참 좋네요. 듣고 있으면 뭔가 편안해져요."
레벨 업 시스템을 얻기 전에는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레벨 업 시스템은 정말 다양한 방법으로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런데 성우 농구 엄청 잘했나 보네요."
"어머, 왜요?"
"등 번호가 23번이잖아요? 이 번호는 에이스만 다는 번호거든요."
"눈썰미 좋으신 것 좀 봐. 농구 좋아하시나 봐요? 농구 대잔치 때 농구장 정말 열심히 다녔었는데…… 맞아요. 우리 성우가 농구 잘했었어요. 본인도 원했고…… 키만 컸으면 농구 선수까지 시키려고 했는데."
기적은 적당한 타이밍에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그런데 성우는 무슨 게임해요?"
"게임요? 글쎄요…… 이름까지는 모르겠는데?"
'어? 그럼 안 되는데…… 알아야 되는데?'
속으로 뇌까린 기적이 스마트폰을 돌려주며 말했다.
"어머님, 제가 퀘…… 아니, 미션 하나 내 드릴게요."
손현미와 대화를 나누며 기적은 이런 생각을 했다. 농구를 좋아하는 성우에게 휠체어 농구를 가르쳐 보면 어떨까? 잘하면 선수도 될 수 있지 않을까? 포기했던 꿈을 다시 꿀 수 있지 않을까?
어린 남자에, 유소년 농구를 했을 정도의 농구 실력까지. 조건은 충분하고도 넘쳤다.
다만 문제는 당사자의 생각이었다. 본인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또 그리 친하지도 않은 상황에서 무턱대고 그런 제안을 한다고 해서 긍정적인 대답이 돌아올 확률은 높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반감만 살 공산이 높았다.
'일단은 친해지는 게 먼저야.'
그렇게 생각한 기적은 성우의 취미를 공략하기로 했다. 그래서 손현미에게 성우가 즐겨하는 게임의 이름을 알아와 달라는 부탁을 했다.
다행히 손현미는 미션을 훌륭히 수행해 냈다. 성우가 치료를 위해 내려와 있는 동안, 폰을 뒤져 게임의 이름을 알아낸 것이다.
기적은 퇴근하기 무섭게 지식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밝은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고~ 무슨 일이십니까?
기적은 어쩐지 머리가 아파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뭐 좀 물어보자."
-뭔데? 뭘 물어보려고? 살다 보니 형이 나한테 뭘 물어보기도 하네? 뭔데, 어?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참 많은 말이 돌아왔다.
관자놀이를 누르는 기적의 손가락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너 혹시 나인 레인저스라는 모바일 게임 알아?"
-알다마다. 요즘 양대 마켓 1등하는 게임이잖아. 열심히 하고 있지. 8성 얻으려고 벌써 몇십 질렀어. 왜 형도 하게?
"그래? 그 게임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 봐."
기적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