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꿈을 향해 던져라 (3)
"부팀장님, 두 분이 어떻게 아는 사이에요?"
기적이 의자에 앉기 무섭게 최진아가 어깨를 바싹 붙이며 물어왔다. 장원호 또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귀를 쫑긋 세운 채 기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기적은 솔직히 명석한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좋게 생각해도 석한과 얽힌 과거가 그다지 좋은 추억은 아니었으니까. 아니, 단순히 좋지 않은 추억 정도가 아니었다. 악연이라 표현에도 좋을 만큼 둘의 사이는 좋지 못했다.
그러나 기적은 기꺼이 최진아의 질문에 답해 주었다. 앞서 석한을 대할 때 그랬듯이 마냥 피하는 것만이 상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동창요,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했고요."
"동창에 같은 동아리? 그럼 친하겠네?"
장원호가 좋겠다는 듯 물었다. 그러나 기적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개인적으로 별로 친한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최진아가 어쩐지,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이상하더라. 아까 보니까 그 사람 표정은 웃고 있는데 분위기는 그게 아니더라고요."
"그래? 난 몰랐는데?"
"아무렴요, 그러셨겠죠."
"뭐야, 지금 그 말투는?"
단지 그리 친한 관계는 아니라고만 말해서일까, 장원호와 최진아는 둘의 관계를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듯했다.
"……."
기적은 아무런 말없이 식사에 열중했다. 머릿속이 복잡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었다. 가운을 입고 나타난 석한을 봤을 때는 순간적으로 이 병원을 그만둬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내가 왜, 내가 왜 도망가야 하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사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당연히 도망갈 이유도 전혀 없었다.
걱정이 있다면 명석한과의 껄끄러운 관계인데…… 명성 병원은 단지 껄끄럽다는 이유로 그만둘 만큼 그저 그런 병원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병원 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병원을 그만뒀을 공산이 컸다. 하지만 지금의 그는 달라졌다. 레벨 업 시스템은 단순히 치료 능력만 전해 준 것이 아니었다.
사람 이기적도 한층 성장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는 기꺼이 명석한과의 한판 승부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었다.
말없이 입을 오물거리던 기적이 젓가락으로 돈가스를 툭툭 치며 말했다.
"이거 엄청 맛있네요."
***
"아니, 밥 맛 좋다고 더 퍼 온다던 사람이 왜 안 먹고 있어?"
"너무 욕심을 부렸나? 갑자기 배가 부르네요."
"그래도 퍼온 건 가급적 남기지 말고 먹어라, 알겠지?"
명석한을 향해 당부의 말을 전한 명의진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그나저나 방금 너랑 이야기 나눈 치료사 말이다. 제법 오래 이야기를 나누던데, 무슨 이야기를 나눈 거냐?"
"어, 보셨어요? 별 얘기 안 했어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그래, 두 사람이 고등학교 동창이야? 앞으로 잘해 봐라. 이기적 부팀장 치료 실력 좋더라."
명의진의 말에 식사를 하고 있던 각 과 과장들이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리액션을 했다.
석한은 사람들의 그런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원장님, 원래 치료사들 이름 다 외우세요?"
"부끄럽지만 다는 못 외운다. 그래도 이기적 부팀장 이름은 알고 있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이름이기도 하고. 저번에 케이스 컨퍼런스가 워낙 강렬하기도 했고."
아버지이자 원장의 칭찬은 석한의 심사를 더욱 꼬이게 만들었다. 저도 모르게 말이 삐딱해졌다.
"케이스 컨퍼런스를 뭐 얼마나 잘했는지 모르겠지만 물리치료사랑 잘해 볼 게 뭐가 있나요? 저희가 오더를 내면 그에 따라 움직이는 게 물리치료사인데?"
돌려 말했지만 직역하면 '의사가 까라면 까는 게 물리치료사다' 이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우선 이곳이 대학 병원이라면 그 말은 어느 정도 맞는 말이었다. 실제로 대학 병원에서는 석한의 말대로 의사와 물리치료사가 수직 관계로 일하고 있다. 대부분의 수익이 의사들의 수술에 의해 파생되기 때문에 의사의 파워가 막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재활 병원인 명성 병원은 달랐다. 재활 병원의 주 수입원은 의사의 수술이 아닌, 물리치료사의 청구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많은 돈을 벌어다 주니 자연히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식사를 하고 있던 박영규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했고, 명의진도 정색하고 충고를 건넸다.
"명 닥터, 여기는 재활 병원이야. 누구보다 물리치료사의 역할이 중요한 곳이라는 말이지. 대학 병원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거야."
따끔한 충고는 석한의 정신을 제자리로 돌려주었다. 첫날부터 사람들과 분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사로잡았다.
"제가 잘 모르고 실언했네요. 앞으로 명심하겠습니다."
그제야 명의진이 정색했던 표정을 풀었다.
"좋습니다. 식사 다 했으면 다들 일어날까요? 가서 조금 쉬셔야죠."
명의진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각 과 과장들도 우르르 일어났다. 다만 석한은 자리에 남았다. 음식을 남기지 말라는 원장님의 말씀을 따르겠다는 너스레와 함께였다.
조용해진 식당 안에서 석한은 말없이 식판을 바라보았다.
'이기적…… 이기적…… 참 거슬린단 말이야.'
생각할수록 참 이상했다. 학창 시절이나 지금이나 기적은 자신에 비해 턱없이 모자란 존재였다. 학벌, 외모, 집안 어느 것 하나 자신보다 나을 것이 없었다. 관심조차 가지 않아야 맞았다.
그런데, 왜 자꾸만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그리고.
'왜? 사람들은 자꾸 그 자식을…… 좋아하는 걸까?'
학창 시절 석한은 짝사랑했던 차지은을 기적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엄밀히 따지면 빼앗긴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의 기억에는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아버지마저 기적을 칭찬하고 나서니 정말 참기가 힘들었다. 하마터면 이성을 잃고 아버지에게 말대답을 할 뻔했다.
'게다가 뭐? 서울대에 남아 있고 싶었을 텐데, 왜 궁상맞게 아버지 병원에 왔냐고? 건방진 새끼가 뚫린 입이라고…….'
감히 자신에게 그따위 말을 내뱉다니……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내 말 한마디면 너 하나쯤 자르는 건 일도 아니야. 할머니가 내 부탁을 거절할 리 없으니까. 하지만 그 정도로는 성이 안 차지. 곁에 두고 확실하게 괴롭혀 주마. 앞으로 병원 생활이 많이 고단해질 거다.'
씹어뱉듯 뇌까린 석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음식물 쓰레기통에 남은 음식을 쏟아부었다. 주저 없이 음식을 내던지는 그 모습에서 명의진의 조언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
인턴 치료사의 삶은 고달프다. 월급은 겨우 130만 원을 넘어가는 수준인데 반해, 참으로 힘든 업무가 주어진다.
옵저베이션을 할 때는 서 있어야 하며, 온갖 잡일은 도맡아 처리해야 한다. 정직원보다 퇴근이 늦고 출근이 이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명성 병원의 인턴 정수정 역시 다르지 않았다. 어제 가장 늦은 시간에 퇴근했던 그녀는 오늘도 7시 40분이 안 되어 집을 나섰다. 8시 20분까지는 출근하라는 선임의 말 때문이었다.
수정은 졸린 눈을 비비며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너무 피곤하다…… 오늘 하루는 또 어떻게 버티지?'
가뜩이나 아침잠이 많은 수정이었다. 학창 시절 학교 앞에 살면서도 겨우 지각을 면했을 정도로. 그런 천성을 가진 그녀였기에 인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뿐만 아니었다.
'좀 좋게 알려 주면 좋을 텐데, 다들 왜 그렇게 으르렁거리는 건지…….'
누구 하나 좋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 모르니까 배우기 위해서 인턴을 하는 것인데, 선배들은 자신들만큼 해 주기를 바라는 모양이었다.
'아, 다들이라는 말은 취소!'
누구를 떠올렸는지 끌려가듯 걸음을 옮기던 수정의 양 볼에 살짝 보조개가 피어올랐다.
-오금, 오금 가는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모두 안전선 밖으로 물러나 주세요.
마침맞게 열차가 들어왔다.
"럭키!"
이것으로 지각 걱정은 끝. 열차가 일으킨 바람으로 흘러내린 머리를 쓸어 넘긴 수정은 기분 좋게 만원 열차 안으로 들어섰다.
열차에 탄 이상 병원까지는 금방이었다. 7 정거장 거리이기 때문에 잠시 선잠을 자다 보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이날도 수정은 노약자석 옆쪽에 기대어 선잠을 잤다. 그러다 보니 열차는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해 있었다.
-이번 정류장은 양재, 양재 역입니다.
'앗!'
퍼뜩 정신을 차린 수정이 사람들을 헤치고 열차 밖으로 나섰다.
그때였다.
"수정 샘!"
누군가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