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꿈을 향해 던져라 (2)
-치료를 끝냈습니다. 보상으로 3(+1)포인트를 얻었습니다.
-환자(김성우)의 만족도가 2 감소합니다. (-12/100)
-경고! 경고! 만족도가 ?20이 되면 퀘스트에 실패합니다.
기적은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구는 김성우와 30분간 씨름을 했다. 그럼에도 김성우의 만족도는 올라가기는커녕 오히려 내려갔다. 만족도가 -20이 되면 퀘스트에 실패한다는 경고 메시지와 함께였다.
'앞으로 4일 후면 퀘스트에 실패하게 되는 건가?'
자조 섞인 평가가 엄살은 아니었다. 김성우는 생각 이상으로 비협조적이었다. 중간중간 말하는 것을 들어 보면 심사가 단단히 꼬여 있었다. 세상에 대한 증오로 가득 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래 봐야 본인만 손해일 텐데. 한참 중요한 시기에 시간을 쓰레기통에 처박고 있으니…….'
스트록 환자가 그렇듯이 SCI 환자 역시 급성기가 굉장히 중요하다. 특히 운동 신경이 좋은 어린 남자 같은 경우에는 엄청난 회복을 기대할 수 있다. L2 레벨이던 환자가 L4 레벨까지 회복되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다.
여기서 L4라는 레벨은 상당히 중요하다. 만약 L4 레벨까지 회복할 수 있다면 환자는 스탠딩 자세를 유지할 수 있게 되니까. 보조기의 도움을 받아야겠지만 말이다.
'동기만 부여하면 엄청난 진전을 끌어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뭔가 방법이 없을까?'
기적은 김성우를 양날의 검이라고 생각했다. 동기만 부여한다면 엄청난 호전을 끌어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컨트롤에 실패하면 자신의 손을 베일 수도 있는.
조금은 무거운 마음을 안고 기적은 다음 환자를 찾아 이동했다.
다행히(?) 다음 환자는 어렵지 않은 환자였다. 보험 수급 문제로 열심히 치료하는 것을 꺼리는 데다, 발병 시기도 오래된 환자였기 때문에 기적 또한 적당히 시간을 보내면 그만이었다.
패기로 가득 찬 2년 차, 3년 차였다면 환자의 의사와 상관없이 그저 열심히 했겠지만, 그래 봤자 돌아오는 건 컴플레인 뿐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오늘은 조금 일찍 끝낼게요. 내일 또 뵐게요."
그저 시간을 때운다는 마음으로 치료했는데, 환자는 대단히 만족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보상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만족스러운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6(+1) 포인트를 얻었습니다.
'만족스러운 치료라…….'
문득 치료라는 게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환자는 최선을 다해 치료해도 오히려 불만을 품는데, 어떤 환자는 대충대충 시간을 보내도 만족을 하니 말이다.
'사람마다 맞는 치료법이 따로 있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짜릿한 전율이 기적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맞아! 사람마다 맞춤 치료법이 있는 건데…… 나는 짜놓은 틀에 맞춰 성우를 치료하려고 했어.'
스트록 환자도 그렇겠지만 SCI 환자는 치료법이 굉장히 획일적이다. 손상된 레벨에 따라 그에 해당되는 핵심 근육을 강화시키고, 이를 잘 활용해 일상생활 동작(ADL)으로 연결시키는 방식이다.
기적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김성우를 치료했다. 안타깝지만 그 결과는 좋지 않았다. 그렇다면 치료 방법을 바꿔 보면 어떨까?
'어쩌면 이런 방법이 성우에게는 맞지 않을지도 몰라. 우선은 성우가 좋아하는 것이 뭔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부터 알아내야 해.'
물론 좋아한다는 것을 물어본다고 해서 김성우가 순순히 답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든든한 우군인 어머니를 공략하면 그만이었다.
'좋아. 한 번 해 보자.'
뭔가 실마리를 풀어냈다는 생각에 기적은 살짝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잠시 후 자신에게 벌어질 일을.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만남은 오전 근무가 끝난 시점, 즉 점심시간에 일어났다.
점심시간이 되기 무섭게 치료사들은 발 빠르게 구내식당으로 이동했다, 절로 나오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면서.
기적 또한 어쩌다 보니 멤버가 된 장원호, 최진아와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으흐흥, 부팀장, 오늘 그 환자 어땠어? 보니까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 같던데?"
"누구요?"
"지금 네가 생각하는 그 사람?"
"아, 성우요? 지금으로썬 노답이죠, 뭐."
장원호는 풀죽은 목소리로 말하는 기적의 등을 툭 하고 때렸다.
"너무 그러지 마. 나 예전에는 열일곱 살, 여! 고생을 치료한 적도 있었어."
묘한 억양에 잠자코 걷고 있던 최진아가 끼어들었다.
"여! 자에 유독 힘을 주시네요? 팀장님 지금 성차별하세요?"
"자다가 봉창 두드려? 여기서 성차별이 왜 나와? 여고생이 감수성이 풍부하니까 대하기가 그만큼 힘들었다는 이야기인데?"
"여고생이 감수성이 풍부하다는 거는 팀장님만의 생각이죠. 남학생도 얼마든지 감수성이 풍부할 수 있는데요?"
"와, 나! 아니, 여학생이 남학생보다 감수성이 풍부한 거는 공공연한 사실 아니야?"
"그거는 팀장님 생각이라니깐요? 그런 통계가 어디 나와 있는데요?"
"얘 봐라? 부팀장, 뭐라고 말 좀 해 봐!"
장원호가 답답하다는 듯 기적을 끌어들였다. 그러나 기적은 난데없이 벌어진 설전에 끼어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글쎄요. 남녀는 평등하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부팀장 말 이상하게 한다? 나도 평등하다고 생각하거든!"
김성우에 대한 이야기가 남녀평등에 관한 이야기로 와전되는 사이, 어느새 셋은 식당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런데 식당의 분위기가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조금은 경직되어 있는 분위기랄까, 식사를 하는 치료사들이 불편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장원호가 출입구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송한나 팀장을 붙잡고 물었다.
"뭐야, 분위기 왜 이래?"
그러자 송한나가 고갯짓을 해 보였다.
"원장님이랑 각 과 과장들 식당 출몰."
송한나가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본 장원호가 이내 인상을 찌푸렸다. 거기에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들이 한가득 앉아 있었다.
"백의의 천사 부대가 우르르 몰려들었네, 원장님이 갑자기 왜?"
"나도 자세히는 모르는데, 원장님 아들이 이번에 RM으로 들어왔다나 봐. 원장님, 병원 식당에 자부심 있잖아. 안내 겸 해서 데려왔겠지, 뭐."
"그런 거야? 땡큐."
귀중한 정보를 얻어 낸 장원호가 기적과 진아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들었지. 공습경보 울렸다니까 다들 조용히 밥 떠서 구석자리로 가자고. 그럼 다들 헤쳐 모여."
장원호는 둘을 향해 마치 군대의 소대장이라도 되는 듯 수신호를 보냈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장교 출신으로 착각할 만한 절도 있는 동작이었지만,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에 의하면 장원호는 공익 근무 요원 출신이었다.
"네에, 네에."
건성으로 대답한 기적이 음식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리고 집게를 이용해 하얀 접시를 맛있는 음식들로 채워 나갔다. 그의 식판이 70% 이상 채워졌을 때였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기적?"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얗다 못해 빛이 나는 가운을 입은 훈남이 서 있었다. 가운 왼쪽 가슴 주머니에 '명석한'이라는 이름표를 수놓은 남자였다.
어찌나 놀랐는지 기적은 하마터면 접시를 놓칠 뻔했다.
"명석한? 네가 왜 여기에?"
"내가 묻고 싶은 말이다, 네가 왜 여기에 있어?"
이기적과 명석한.
2명의 고교 동창이 병원에서 다시 만나는 순간이었다.
장원호와 최진아는 기적과 석한을 번갈아 쳐다보며 '아는 사이인가?' '친구 사이인가 봐요' 같은 말을 주고받고 있었다.
"부팀장, 우리는 먼저 갈게."
"이따 봐요. 부팀장님."
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장원호와 최진아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석한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접시와 집게를 집어 들며 말했다.
"음식이 맛있어서 더 뜨러 왔는데…… 널 만날 줄은 미처 몰랐다. 확실히 우리가 인연은 인연이야."
석한이 '인연'이라는 말에 묘한 악센트를 주며 말했다.
기적은 잠시 석한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음식을 접시에 담았다. 그러자 석한이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지은이 일 때문에 그래? 변명 같지만 나 진짜 몰랐어. 설마, 10년 넘게 사귀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나중에 들었을 때 나도 깜짝 놀랐다니까? 아무튼 미안하다."
바로 그때 기적이 불쑥 입을 열었다.
"그게 뭐가 중요하냐? 다 지난 일인데."
잠깐의 시간 차를 두고 그의 말이 이어졌다. 가운 가슴팍에 달린 직책과 이름표를 확인한 직후였다.
"의사됐다는 말은 들었다. 재활의학과 닥터로 온 거야?"
조금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석한이 가운의 깃을 툭툭 흔들어 보였다.
"어어, 보시다시피? 서울대 병원에서 재활의학과 전문의 과정 이수하고 이쪽으로 넘어왔어. 알지? 서울대."
서울대 의대라면 우리나라 최고 엘리트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외국인이 아닌 다음에야 모를 리가 없는 이름. 그럼에도 석한이 그 이름을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학력을 내세워 기적의 기를 죽이고 싶어서였다.
사실 그도 식사를 하다 기적이 들어오는 것을 봤을 때는 적잖이 놀랐다. 아니, 밥맛 떨어지게 저 자식이 왜 여기서 나와?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하지만 부정이 긍정으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적은 가까이 두라는 말처럼 기적을 가까이 두고 괴롭힐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선 것이었다.
그런데 기적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그런데 좋은 학교 나와서 왜 아버지 병원으로 온 거야? 보통 서울대 나오면 서울대 병원에 남으려고 하지 않나?"
예상치 못한 반격에 석한이 콧등을 구겼다. 서울대 간판을 뽐내려 하다가 자승자박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그가 서울대에 남지 못한 것은 그의 실력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반가웠다. 나 먼저 가 볼게."
음식이 꽉 찬 접시를 들어 보인 기적이 먼저 몸을 돌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석한의 주먹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