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7화 (17/205)

# 17

아버지의 이름으로 (8)

기적은 그 얼굴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마침내 기다리던 사람이 등장했음을.

'왔구나!'

이것으로 그가 그린 큰 그림이 모두 완성되었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기적이 다시 단상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리모컨을 들어 화면을 넘겼다.

"오늘의 주인공이 모두 도착했으니 아까 말했던 부분을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박부진 님은 전직 포클레인 기사셨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30년간 포클레인을 운전하신 이 시대의 초인이시죠. 그런 박부진 님에게는 따님이 하나 있는데, 오는 4월 1일에 결혼을 앞두고 있습니다. 박부진 님은 바로 이 따님의 손을 잡고 버진 로드를 걷기 위해 게이트를 목표로 잡으셨던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춘 기적이 손을 들어 가운데 통로를 가리켰다.

"일부러 의자를 양쪽으로 배치해 두었습니다. 지금부터 이 통로가 버진 로드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하객이 됩니다. 과연 박부진 님이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 같이 지켜봐 주십시오."

그 말과 동시에 기적이 리모컨의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대형 스크린에 땀을 뻘뻘 흘리며 훈련하는 박부진의 모습이 재생되었다.

막 강당으로 들어선 박부진의 딸 박송이가 두 눈을 크게 떴다. 몇 번을 고민한 끝에 온 자리였다. 그저 구석진 곳에서 아버지를 지켜보다 돌아갈 요량이었다. 그런데 이런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옆에 선 김미숙은 벌써부터 눈시울을 붉히며 딸의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전부터 느꼈지만 참 눈물이 많은 여자였다. 하긴 그렇게 정이 많으니 그토록 헌신적으로 박부진을 간호했을 테지.

"박부진 님이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은 여기 있는 가족의 존재 덕분입니다. 가족을 위해 평생을 걸어온 사람이 가족을 위해 다시 한 번 걸으려 합니다."

박송이가 고개를 떨어뜨리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더 이상 화면을 볼 자신이 없어 눈을 질끈 감은 그녀의 두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아버지에게 했던 모진 말들이 비수가 되어 돌아와 그녀의 가슴을 쿡쿡 찔렀다.

장내는 졸지에 숙연해졌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딸을 향해 더딘 걸음을 옮기는 박부진의 모습을 두 눈에 담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몇몇은 흐르는 눈물을 애써 삼키고 있었다.

물론 전혀 다른 표정을 하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기적에게 컨퍼런스를 떠넘긴 장본인, 박영규와 강동호였다.

"뭐, 뭐야? 분위기 왜 이래?"

당혹스러운 박영규의 말에 강동호가 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했다.

"그, 그러게 말입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요?"

분명 신입을 골려 주기 위해 떠넘긴 케이스 컨퍼런스였다. 그런데 분위기가 전혀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둘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바라보는 사이, 어느새 박부진은 딸의 앞에 도착해 있었다.

"송이야……."

"아빠……."

마침내 박부진의 굳은살 가득한 손이 딸 박송이의 손을 잡았다.

"선생님께 함께 가자."

끄덕끄덕.

말을 하기가 힘들 정도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박송이는 아버지 박부진의 손을 꽉 잡았다, 결코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때마침 결혼식 입장곡이 흘러 나왔다. 묘하게 사람의 감성을 건드리는 슬픈 음악이 병원 소강당을 결혼식장으로 바꿔 놓았다.

박부진은 정말 최선을 다해 걸었다. 흐르는 땀을 닦아 낼 생각도 못 하고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데만 온 신경을 집중했다. 감히 단언컨대 지금껏 그가 걸었던 걸음 중 최고라 할 수 있는 걸음이었다.

원장 명의진이 몸을 돌리며 박수를 쳤다. 그와 같은 라인에 앉아 있던 과장들이 그 뒤를 이었다. 그것을 시작으로 장내의 모두가 한마음이 되어 감동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동시에 기적의 머릿속으로 메시지가 울려왔다.

-감동적인 치료에 성공했습니다. 보상으로 30포인트가 주어집니다.

-평판이 20 올라갔습니다. (61/100)

-퀘스트 [바닥을 찍고 있는 평판]의 달성 조건을 충족했습니다.

-보상으로 아이템이 주어집니다.

'어? 아이템?'

기적은 아이템이 뭔지 기대하며 눈을 크게 떴다.

기적은 아이템을 기대하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아이템은 나타나지 않았다.

'뭐야, 왜 안 줘? 사람이 있어서 그런가?'

그렇게 생각하니 이해가 갔다. 없던 아이템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다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난다면 모두가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고개를 끄덕이며 파워포인트 자료를 정리하는데, 명의진이 과장들을 잔뜩 거느리고 나타났다.

"허허, 케이스 컨퍼런스를 하라고 했더니, 영화를 만들었습니까?"

이번 케이스 컨퍼런스가 아주 마음에 든 것일까, 명의진은 젠틀한 미소를 지은 채 기적을 향해 악수를 청해 왔다.

"이기적 부팀장 맞죠? 이번 컨퍼런스에 완전히 감동받았습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습니까?"

손에 촉촉이 밴 땀을 닦은 기적이 명의진의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많이 부족했는데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족하긴…… 내 지금까지 이 정도 퀄리티의 케이스 컨퍼런스를 본 적이 없습니다. 안 그렇습니까?"

누구 말이라고 아니라고 하겠는가. 각 과 과장들이 빠르게 긍정의 표시를 했다. 재활의학과 과장 한동수가 가장 먼저 나섰다.

"원장님 말씀이 딱 맞습니다. 솔직히 별 기대 안 했는데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치료도 아주 좋았고, 무엇보다 스토리텔링이 기가 막혔습니다. 기승전결이 있는 컨퍼런스라고 할까요?"

선수를 빼앗긴 다른 과장들이 앞다투어 나섰다.

"그러게요. 치료사가 아니라 작가나…… 뭐, 영화감독 같은 거 해도 잘하겠습니다."

"에이, 과장님…… 왜 우리 병원 인재를 다른 데다 팔아먹으려고 그래요?"

"어? 그게 그렇게 됩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 어허허."

재활의학과 과장에 이어 신경과 과장, 내과 과장, 간호과 과장들이 릴레이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단 한 사람만은 인상을 구기고 있었다.

'아니, 이게 아닌데…….'

재활치료과장 박영규였다. 그는 살짝 고개를 돌려 이번 일을 기획한 강동호를 노려보았다. 그러자 시선을 받은 강동호가 화들짝 놀라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 멍청한 놈이 쓸데없는 제안을 해 가지고…….'

이를 바드득 가는데, 마침 명의진이 그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치료과장님은 어떻게 보셨습니까? 어? 그런데 표정이 별로 안 좋아 보이시네요?"

"네? 아, 아닙니다. 아까부터 속이 좀 쓰려서…… 컨퍼런스는 아주 감동적이었습니다. 뭐랄까,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았습니다. 부팀장의 기획력이 대단하네요…… 예, 예."

그렇게 박영규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늘어놓아야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명의진이 염려 섞인 얼굴로 말했다.

"몸 관리 잘하세요, 과장님. 무엇보다 건강이 제일 아닙니까?"

"예예, 주의하겠습니다."

살짝 웃어 보인 명의진이 다시 기적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가만있어 보자…… 생각보다 컨퍼런스를 너무 잘해 주셔서 개인적으로 선물을 하나 주고 싶은데…… 괜찮으면 잠시 내 방으로 올 수 있습니까?"

기적은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명의진이 다시 예의 젠틀한 미소를 지어 보인 뒤, 모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늘이 3월 19일, 어느새 3월도 절반 넘게 지났습니다. 이번 3월은 느낌이 아주 좋은데요. 남은 3월도, 다가오는 4월도 모두 파이팅합시다!"

그렇게 말한 명의진이 다시 한 번 박수를 쳤다. 그러자 강당에 모인 전 직원이 그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박수 소리는 단연 기적을 향해 있었다.

케이스 컨퍼런스가 끝나고, 기적은 원장실을 방문했다. 그리고 방의 주인 명의진으로부터 검은색 박스 하나를 건네받았다.

"선물로 들어온 거긴 한데. 나한테는 필요가 없는 물건이라서…… 부팀장님이 잘 써 줬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기적이 박스를 건네받고 가만히 있자 명의진이 웃으며 말했다.

"한번 열어 봐요."

"아, 예."

그리 크지 않은 박스를 열자 안에는 고급스러운 디자인의 시계가 담겨 있었다. 그저 그런 시계가 아니었다. 최신형 스마트 워치였다.

"이건……?"

"왜요, 마음에 안 듭니까? 안 들면 말씀하세요. 요즘 친구들 감정 표현에 솔직하잖아요? 이것 말고 다른 선물도 있습니다."

"아, 아닙니다. 마음에 듭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비싼 것 아닙니까?"

"그거 비싼 건가요? 선물로 들어온 건데 나는 쓸 줄도 모르고, 필요도 없어서…… 묵혀 두는 것보다는 요긴하게 써 줄 주인을 찾아가면 좋은 것 아닐까요? 마음에 드신다면 모쪼록 잘 써 주세요."

"너무 감사해서……."

"부담 갖지 마시고 잘 써 주세요. 그럼 됩니다."

"감사합니다."

망설이던 기적이 꾸벅 고개를 숙일 때였다.

-퀘스트 보상을 받았습니다.

또 한 번 메시지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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