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
아버지의 이름으로 (4)
-평판이 3 올랐습니다. 11/100.
'어라, 평판? 평판은 또 왜 오른 거지?'
영문을 몰라 눈만 깜빡이는데, 문득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치료가 없어 쉬고 있던 몇몇 치료사들과, 옵저베이션을 하던 인턴들이 기적을 바라보는 것이 보였다.
'아! 이거구나.'
놀란 표정을 보니 비로소 왜 평판이 올랐는지 이해가 갔다.
평판은 이런 식으로 올리는 거구나. 고개를 끄덕인 기적이 다시 박부진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그는 상기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뭔가 해냈다는 생각에 뿌듯함을 느끼며 기적이 말했다.
"어떠세요, 걸을 만하시던가요?"
그제야 현실로 돌아온 박부진이 빛의 속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암요. 조았슴니다. 왼 다리에 힘이 빳빳하게 들어가써요!"
"실제로 왼쪽 다리에 힘이 생긴 것은 아닙니다. 바닥에 닿는 발바닥 면적이 넓어지면서 힘이 세진 것처럼 느껴질 뿐이에요. 자고 일어나면 늘어났던 근육들이 줄어들면서 다시 원상태로 복귀할 겁니다.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열심히 하다 보면 길이 보일 겁니다."
"선생님만 믿겠슴니다, 선생님만."
조금은 어두운 이야기를 했음에도 박부진의 상기된 얼굴은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보호자, 김미숙도 다가와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우리 송이 아빠 잘 치료해 주셔서."
"당연한 건데요. 그게 제 일이니까요."
무심코 그렇게 답한 기적이 일순 몸을 움찔했다. 잔뜩 내리깐 목소리로 '그게 제 일이니까요'라니. 말하고 나니 손발이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다행히 박부진 부부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너무 기뻐서 기적의 말투에까지 신경 쓸 여력은 없는 듯했다.
'휴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적이 시간을 확인했다. 어느새 시간은 4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30분이 훌쩍 지나가 있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요?"
그 말에 박부진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허허 웃었다.
"언제 시간이 이르케 됐는지…… 알겠습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시간은 항상 상대적인 법이다. 30분이라는 시간이 누군가에게는 5분 같을 수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3시간처럼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다. 30분을 마치 5분처럼 보낸 박부진이 뿌듯한 얼굴을 한 채 병실로 향했다.
기적이 멀어져 가는 박부진의 모습을 뿌듯하게 바라볼 때였다.
"엄청 기분 좋아 보인다?"
누군가가 옆에서 그렇게 말해 왔다. 옆을 돌아보자 마치 데자뷔처럼 강동호가 건들거리며 걸어오고 있었다.
'또 너냐?'
강동호는 뭐랄까,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시비를 걸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기라도 한 것처럼. 더구나 이전과는 달리 아주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내보이고 있었다.
"혹시 이런 말 아나 몰라? 저맘때 환자는 쳐다만 봐도 좋아진다는 말."
말인즉슨 네 덕분이 아니니 너무 좋아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해서 시비를 거니 기적의 목소리도 조금은 날이 서 버렸다. 이대로 계속 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쎄요, 못 들어 봤는데요? 그런데 박부진 님 좋아지긴 좋아졌나 봐요. 2부팀장님이 보기에도 좋아진 걸 보니까."
회심의 일격에 강동호가 주춤하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이대로 물러나긴 싫었는지 이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지긴 좋아졌지. 그런데 그게 누구 덕분이냐가 문제지. 정말 네 치료 덕분일까?"
"어. 치료 덕분인 것 같은데?"
딱 기적이 하고 싶은 말이긴 했지만 아쉽게도 기적이 한 말은 아니었다. 뒤를 보니 장원호가 손에 세정제를 문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딱 봐도 치료 덕분인데, 뭘 그래? 오지랖 부리지 말고 너나 잘해. 부팀장 환자 중에도 완전 아큐트한 환자 있잖아. 그런데 그 환자는 걸음이 왜 아직도 그 모양일까? 쳐다보기만 해도 좋아지는데?"
"아니, 그 환자는…… 나이가 좀 있잖아요."
"그건 핑계지. 누가 보면 박부진 님은 한 30대쯤 되는 줄 알겠다, 같은 50대 아냐?"
"그야……."
장원호의 팩트 폭격에 결국 강동호가 꼬리를 말았다.
기적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장원호를 바라보았다. 당나귀처럼 오징어포를 질겅질겅 씹을 때는 몰랐는데 의외로 카리스마가 있었다, 괜히 10여 명의 팀원을 이끄는 팀장이 아니라는 듯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몸을 돌리는 강동호를 보며 기적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나한테 왜 저러는지 모르겠네."
그러자 장원호가 지나가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알겠는데."
"예?"
"말했잖아. 텃세 심하다고. 라인 몰라? 라인?"
장원호가 소심하게 손가락을 움직여 강동호와 임수영을 번갈아 가리켰다.
기적이 바로 알아듣지 못하고 영문 없는 표정을 짓자 피식 웃은 장원호가 다시 말했다.
"오늘 회식 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누가 누구 라인인지."
회식이라는 말에 기적이 어? 하는 표정을 지었다.
'잠깐만, 회식이라니?'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첫날 조회 때 주호식이 회식 이야기를 했던 것이 어렴풋이 생각났다. 정신이 없어서 흘려들었는데 그게 오늘이었나 보다.
이제야 알긴 했지만 딱히 문제는 없었다. 어차피 오늘은 약속이 없었으니까.
대답을 하려는데 장원호가 또 피식 웃었다.
"아무튼 부팀장은 속마음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난다니까. 전혀 몰랐다는 얼굴인데?"
부정하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솔직히 지금 알긴 했는데…… 어차피 상관은 없을 것 같습니다."
"왜?"
"어차피 약속 없거든요, 잉여랄까?"
"웃픈 이야기네. 아무튼 이따가 술 한잔하면서 이야기하자고."
다음 치료가 있는지 그쯤에서 이야기를 끊은 장원호는 먹이를 찾아 어슬렁거리는 하이에나처럼 빈 베드를 찾아 떠났다.
"흠~."
마지막 치료가 없는 기적은 한쪽으로 이동해 여유 있게 치료실을 둘러보았다.
교대 시간을 맞이한 치료실은 마치 전쟁터 같았다. 치료를 받고 떠나는 환자와 보호자, 또 치료를 받으러 오는 환자와 보호자, 그리고 그들을 보내고 맞이하는 치료사들이 정신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터가 따로 없네, 전쟁터가 따로 없어.'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기적은 조용히 휴게실로 이동했다. 조금 더 치료실에 머물며 분위기를 파악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그에 앞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다. 비어 있는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은 기적은 조용히 시스템 메시지를 불러냈다.
'포인트를 투자하고 싶은데?'
그러자 곧바로 시스템이 반응했다.
-잔여 포인트는 25포인트입니다. 어디에 투자하시겠습니까?
-매직 핸드 LV 2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15)
-매직 아이 LV 2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10)
-매직 브레인 LV 2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10)
-매직 페이스 LV 2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10)
-매직 마우스 LV 2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10)
'매직 핸드에 15포인트, 매직 아이에 10포인트.'
기적이 그렇게 생각하자 푸른 빛의 아지랑이가 일어나며 그의 눈과 손을 감쌌다. 그의 눈에만 보이는 아지랑이였다.
이윽고 다시 한 번 메시지가 들려왔다.
-매직 아이의 레벨이 3이 되었습니다. 눈썰미가 상당히 좋아집니다. 어렵지 않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는 30입니다.
-매직 핸드의 레벨이 3이 되었습니다. 손의 감각이 좋아지고 악력이 세집니다. 환자들이 당신의 촉진에 편안함을 느낄 것 같습니다.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는 50입니다.
레벨 3이 되었다는 메시지가 들려왔지만 당장 어떠한 변화가 생긴 것인지 기적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의심은 들지 않았다. 지금까지 시스템은 거짓말을 하는 법이 없었으니까.
'과연 어떤 변화가 생겼을까?'
밀려드는 기대감에 기적의 눈빛이 밝게 빛났다.
퇴근 시간이 다가왔음에도 치료사들의 얼굴은 그리 밝지 못했다. 일찌감치 예고된 바 있는 회식 때문이었다.
"힝, 오늘 황금의 제국 못 보겠다……."
"그러니까, 우리 준호 오빠 봐야 하는데."
"얘, 뭐래니? 누구더러 우리 오빠래?"
치료를 끝낸 여자 치료사 몇몇이 체념한 표정으로 아쉬움을 드러냈다. 개인 시간을 빼앗는 회식 자리가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다.
반면 반대 입장인 사람들도 있었다. 술을 사랑하는 애주가들은 들뜬 마음으로 다가올 회식 자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메뉴 뭐야?"
"한우라던데?"
"한우? 오! 술맛 좀 나겠는데?"
물론 그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회식은 이미 정해진 수순이었다. 퇴근 시간이 되고 업무가 마무리되기 무섭게 병원 앞으로 모이라는 공지가 내려왔고, 재활치료실 직원 50명 중 43명은 회식행 셔틀버스에 탑승해야 했다.
부우웅.
회식 장소는 멀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대략 15분 정도 달려가자 '한우정'이라는 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버스에서 내린 치료사들은 미리 예약해 둔 대형 룸으로 들어갔다. 기적은 주호식 실장, 박준만 팀장, 송한나 팀장, 장원호 팀장 등 간부들이 앉은 바로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모두가 착석하자 주호식이 말했다.
"과장님 금방 오신다고 했으니까 조금 기다렸다가 식사하자고."
불만은 있을 수 없었다. 지난번에 먼저 식사를 했다가 회식 내내 박영규의 비아냥을 받아 내야 했던 기억이 아직 선명했으니까. 그것은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종류의 기억이었다.
"알겠습니다."
기꺼이 고개를 끄덕인 치료사들은 물을 마시거나 옆자리 동료와 담소를 나누며 허기를 달랬다.
그로부터 약 20분이 흐른 후 박영규가 도착했다. 문 앞에 선 그는 방안을 주욱 둘러보고는 이내 특유의 가벼운 웃음을 흘렸다.
"허허, 이 사람들…… 다들 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먼저 먹고 있지 않고? 내가 어디 그런 거 따지는 사람인가? 지금이 어디 조선 시대도 아니고……."
'으이구, 말이나 못 하면…….'
몇몇 치료사들이 벙어리 냉가슴을 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