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적의 물리치료사-10화 (10/205)

# 10

아버지의 이름으로 (1)

기적은 홀로 남은 휴게실에서 치료 차트 분석에 열중했다. 그의 담당 환자는 모두 10명, 그런데 유독 눈에 띄는 환자가 있었다.

-이름 : 박부진

-생년월일 : 1965년 6월 28일

-DX(진단명) : Lt hemiplegia(왼쪽 반신 마비)

-Onset(발병일) : 2017년 1월 2일

-C/C(주 호소증상) : Lt foot drop

병원의 재활치료사들은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나름의 SOAP 노트를 작성한다.

SOAP 노트란.

S(subjective) : 주관적 정보. 주로 환자와 보호자를 통해 얻는다.

O(objective) : 객관적 정보, 치료사에 의해 평가되는 항목.

A(assessment) : 평가.

P(plan) : 계획.

이렇게 4가지를 작성해 모아 놓은 차트를 말한다.

현재 기적은 그중 S에 해당하는 자료를 살펴보고 있었다. 치료사의 개인적인 의견이 들어가는 OAP는 일부러 보지 않았다.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기존의 치료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치료를 하고 싶었다.

'발병한 지 채 두 달이 안 됐네. 굉장히 아큐트(급성)한 환자야.'

고개를 끄덕인 기적은 두 번째 장을 펼쳤다. 거기에는 환자의 개인 정보가 나와 있었다.

'다행히 당뇨는 없으시고. 목표는 걷고 싶다……. 이건, 너무 막연하네. 환자가 그냥 걷고 싶다 이렇게 말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은데. 또 보자, 발병 전에는 직업이 운전 기사셨네? 이것도 너무 막연해. 어떤 차량을 운전했는지 정확히 체크했어야지. 순 엉터리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하네? 환자가 전직 운전기사인데 목표가 운전이 아니라 걷는 거라니…… 보통 전문직을 가진 분들은 이전 직업으로의 복귀를 원하는데…… 그래도 뭐, 환자의 상태가 나쁘지는 않네.'

그리 어려운 케이스는 아니었다. 발병한 지 채 한 달이 되지 않았고, 나이도 비교적 젊었기 때문에 예후는 상당히 좋아 보였다.

물론 속단은 일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동기부여인 만큼 환자가 어느 정도의 열정을 보이느냐에 따라 예후는 얼마든지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다.

기적이 나름의 플랜을 머릿속으로 그리는데, 별안간 휴게실의 문이 열리며 치료사 1명이 들어섰다. 그에게 차트를 주고 떠났던 장원호였다.

"부팀장, 점심 먹어야지?"

그의 옆에는 2명의 치료사가 있었는데, 장원호는 그들을 이렇게 소개했다.

"우리 3팀의 고참 멤버들이야. 이쪽 선생님이 임수영 선임 치료사, 그리고 이쪽이 최진아 치료사. 부팀장한테 인사들 하지?"

그러자 최진아는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하고 밝게 인사를 했다. 반면 임수영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만 까딱할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식사하러 갑시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기적을 비롯한 4명은 식당으로 이동했다.

뷔페식으로 운영되는 식당의 음식은 훌륭했다. 메뉴도 다양한데 맛도 평균 이상이었다.

하지만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발산하는 임수영 때문에 기적은 음식이 자꾸만 목에 걸리는 느낌이었다.

'소시오패스인가, 나를 왜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지?'

눈앞의 여자가 소시오패스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때쯤, 밥을 반도 먹지 않은 임수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먼저 일어나요, 입맛이 없어서요."

그리고 쌩하니 자리를 떠 버렸다.

멀어져 가는 임수영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장원호가 접시에 한가득 담아 온 오징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말했다.

"혹시 봤으려나? 임 선임도 이번에 부팀장 면접 응시했었는데?"

'아…….'

그제야 임수영의 태도가 이해가 갔다, 그녀가 자신에게 왜 이렇게까지 싫은 기색을 내비쳤는지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자신의 부하 직원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을 싫어하는 소시오패스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으니까.

복잡한 표정으로 밥을 한 숟갈 뜨는데 장원호가 피식 웃었다.

"또 그 표정이네. 부팀장은 얼굴에 속마음이 그대로 드러나는 스타일인가? 여기 스타일은 아닌데?"

그러자 최진아가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스타일은 아니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하는 모양이었다.

아니, 여기 스타일이 대체 뭔데, 장원호와 최진아는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입꼬리를 올린 채 식사를 하고 있었지만 기적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다. 일은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기진맥진이었다.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때마침 평판이 1 올랐다는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지만 전혀 기쁘지 않았다.

장원호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내가 너무 겁을 줬나? 기운 내라고.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니까. 치료사에게 여기만 한 병원 없는 것 알잖아?"

그 말대로였다.

명성 병원은 물리치료사에게 대우가 좋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른 병원이랑 비교했을 때 급여도 높은 편이었고, 치료사에게 주는 복지 혜택도 굉장히 많다.

하지만 무엇보다 매력적인 점은 정년이 보장된다는 사실이었다. 이 점에서 다른 병원과 비교 불가다. 치료사들을 소모품처럼 써 먹다가 단물이 빠지면 해고시키는 병원이 허다하니까.

상황이 조금 어렵다는 이유로 이 병원을 그만두고 다른 병원을 찾는다고 지금보다 좋은 병원을 찾는다는 보장도 없고, 또 다른 병원을 찾는다고 해도 상황이 여기보다 좋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새삼스럽지만 퀘스트 보상으로 준다는 아이템이 궁금하기도 했고.

"열심히 해 보겠습니다."

결심을 입 밖으로 내자 장원호가 또다시 오징어포를 질겅질겅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최진아는 또 그 모습을 보고 질색했다.

"어우, 팀장님, 그렇게 좀 안 씹으시면 안 될까요? 꼭 늙은 당나귀가 당근 씹어 먹는 것 같아요."

"모르는 소리 말아. 모름지기 오징어포는 이렇게 질겅질겅 씹어야 비로소 맛이 나는 법이거든?"

장원호와 최진아의 티격거림에 기적도 긴장했던 마음이 풀어졌다. 숟가락에 가득 밥을 담아 한 입만을 시전 하려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뒤를 돌아보니 3명의 신입 치료사들이 음식이 담긴 접시를 들고 서 있었다. 그중에는 낯익은 인물도 있었다. 아침에 출근을 함께 했던 정수정이었다.

무슨 일인가 하고 바라보는데 장원호가 반갑게 그들을 맞았다.

"자기네들끼리 편하게 식사해도 괜찮은데…… 일단 왔으니 앉아서 식사해."

자리에 앉는 것을 확인한 장원호가 기적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부팀장은 모르겠네. 이번에 우리 3팀에 배정받은 인턴 선생님들. 저기 덩치 큰 남자 선생님이 맹동식 선생님, 가운데 단발머리 여자 선생님이 구지숙 선생님, 그리고 오른쪽에 댕고 머리 여자 선생님이 정수정 선생님. 와, 나 기억력 좋은 것 좀 봐!"

마지막으로 자뻑을 곁들인 장원호가 반대로 기적을 소개했다.

"여기는 이기적 부팀장.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 직속상관이니까 앞으로 무슨 일 있으면 여기에 상담하라고."

물론 인턴 치료사들의 위에는 최진아 같은 평 치료사나 임수영 같은 선임 치료사도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재활치료실 내에서 그렇게 정한 것이지 병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해 주는 직책은 아니었다.

실제로 간부 수당이 나오는 것도 부팀장까지였고. 그러니까 기적이 인턴들의 직속상관이라는 장원호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겠습니다."

"넵!"

"네에!"

아직은 마음이 맞지 않는지 인턴들은 돌림노래를 부르듯 대답했다.

이후로 조용한 식사가 이어졌다. 장원호는 인턴들이 불편할 것을 염려했는지 식사에 집중했고, 기적은 임수영을 신경 쓰느라 뒤처진 식사 속도를 맞추기 위해 열심히 수저를 움직였다.

첫날 오전이 지나가고 있었다.

***

같은 시각 재활치료과장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이내 20대 중,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가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를 본 박영규가 조금은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임 선임? 이 시간에 무슨 일이야?"

임 선임, 즉 임수영이 양손에 들고 있는 테이크아웃 커피를 흔들어 보였다.

"왜는요? 과장님 피곤하실까 봐 커피 한 잔 사 가지고 왔죠."

"허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박영규가 넌지시 말했다.

"이번에 떨어져서 상심이 많지?"

"아니에요."

임수영이 짐짓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러나 표정은 그게 아니었다. 영업용 미소 한편에는 불만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이를 느꼈을까, 옆자리에 앉은 박영규가 임수영을 달랬다.

"이번에는 원장님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어. 인사과장이랑 나랑 합동으로 임선임을 푸쉬했는데, 원장님이 꿈쩍도 안 하더라고."

바로 그때 박영규의 손이 임수영의 손을 잡았다. 임수영이 흠칫 놀라는 찰나, 박영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렇게, 환자 손을 이렇게 움직였어야지. 그랬으면 원장님한테 더 높은 점수를 받았을 텐데."

임수영이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슬쩍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박영규는 집요했다. 그는 빠져나가려는 임수영의 손을 다시 잡으며 태연하게 말했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었어. 신임 부팀장이 데모를 잘했고, 워낙 원장님이 마음에 들어 해서.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든 의료사고 하나 덮어씌워서 몇 달 내로 쫓아낼 테니까. 그러면 그 빈자리는 자연히 임 선임 차지가 되는 거야.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지?"

임수영은 자꾸만 집요해지는 박영규로부터 손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뒷말을 듣는 순간, 어쩐지 손에 힘이 빠지고 말았다. 대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과장님만 믿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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