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물리치료사 이기적 (9)
주호식은 기적을 비롯한 11명을 2층 재활치료실 옆에 위치한 탈의실로 데려갔다.
"각자 이름이 쓰여 있는 락커 룸에 가운과 신발 같은 보급품을 넣어 놨으니 갈아입고 나오세요. 환복 후 과장님께 인사드리러 가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지시에 따라 기적을 비롯한 11명의 치료사들은 우르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남자 치료사들은 우측에 위치한 남자 탈의실로, 그리고 여자 치료사들은 좌측에 위치한 여자 탈의실로. 그리고 대략 5분이 지난 후, 그들은 하나 같이 하늘색 상의에, 검은색 바지, 하얀색 신발을 신고 속속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호식이 물었다.
"어떻습니까, 다들 사이즈는 맞습니까?"
합격자 명단을 발표한 게시물에는 합격자들의 어깨 넓이, 허리 사이즈, 가슴둘레, 다리 길이 등의 옷 사이즈와 신발 사이즈를 메일로 회신해 달라는 공지 사항이 적혀 있었다. 조금은 과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세세한 사이즈 체크.
맞춤 정장을 하는 것도 아니고, 뭐 그렇게까지 하냐고 하겠지만 몸에 꼭 맞는 가운을 입는 것은 생각보다 중요한 일이다. 몸에 꼭 맞는 가운을 입어야 불편함 없이 치료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까지 했으니 옷이 몸에 맞지 않을 리 없었다. 지급된 치료 가운은 치료사들의 옷에 꼭 맞았고, 무리 없이 주호식으로부터 합격을 받아 냈다.
"다들 잘 맞는 것 같네요. 그럼 과장님께 인사드리러 갑시다."
그렇게 11명의 치료사들은 반대편에 위치한 치료과장실로 이동했다.
들어가기에 앞서 주호식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똑똑.
"과장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곧 안에서 회신이 돌아왔다.
"들어와."
안으로 들어가자 치료과장 박영규의 모습이 보였다. 드러눕듯이 의자에 앉아 있던 그는 고개만 살짝 들어 방문객을 맞았다.
주호식이 박영규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한 후 말했다.
"오늘 새로 입사한 이기적 부팀장과 인턴 사원들입니다. 과장님께 인사드리러 왔습니다."
"어, 벌써 날짜가 그렇게 됐나? 어디 보자……."
그제야 몸을 일으켜 세운 박영규가 11명의 면면을 유심히 살폈다,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그러다가 이내 기적을 발견하고는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아, 이기적 부팀장? 데모 때 보니까 치료 좀 하던데?"
어쩐지 가시가 있는 목소리에 기적이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 망설이는 찰나, 박영규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가 앞으로 지켜볼 테니까 열심히 하라고, 알겠지?"
"알겠습니다."
의미심장하게 말한 박영규가 다시 한 번 신입 치료사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러더니 이내 볼일 끝났다는 듯 축객령을 내렸다.
"9시 다 됐는데 그만 가 봐. 일과 시작해야지."
"알겠습니다."
짧게 답한 주호식이 치료사들에게 손짓을 한 뒤 방문을 나섰다. 그러자 11명의 치료사들이 꼬리잡기를 하듯 주호식의 뒤를 따랐다.
문을 닫은 주호식이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현재 시각 9시 5분. 자, 이제 메인 치료실로 갑시다. 선생님들하고 인사하고 9시 30분부터 일과 시작입니다."
그렇게 기적은 치료과장실을 뒤로하고 메인 치료실로 이동했다.
치료실은 생각보다 훨씬 컸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이라는 영화 홍보 문구가 생각날 정도로. 치료실 안에 또 다른 치료실이 다수 존재했고, 곳곳에 수십 개의 베드와 치료 기구들이 오와 열을 맞춰 정렬해 있었다.
자동문을 넘어서며 주호식이 짝짝 손뼉을 쳤다.
"자 자, 3월 첫날 아침 조회 시작합니다."
그러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치료사들이 가운데 놓인 베드를 중심으로 모여들었다. 대충 봐도 50명을 넘어가는 대인원이었다.
주호식은 자연스러운 포즈로 그들의 앞에 섰다. 그리고 옆구리에 끼고 있던 다이어리를 펼쳐 들었다.
"3월 첫날부터 잔소리 좀 할게요. 2월 말 간부 회의에서 나온 안건인데…… 간호과에서 치료사 선생님들 손톱이 길어서 환자 팔에 상처가 생겼다는 이야기가 나왔거든요? 다들 용모 관리 확실히 해 줘야겠어. 다른 부서 사람들한테, 특히 간호과한테 이런 말 듣는 거 기분 되게 별로거든? 한 번 더 이런 말이 나오면 나도 매일 근태 검사해서 벌점 부과시키는 수밖에 없어. 다들 피곤해지기 싫으면 손톱 관리 신경 쓰라고. 내가 많은 거 바라는 게 아니잖아? 각 팀장, 부팀장은 팀원들 관리 확실히 하고, 알았지?"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아니, 자기들이나 잘하지? 자기네들 손톱이 더 길던데?"
"그러니까. 웃기고들 있네, 진짜."
"앞으로 전쟁이야, 전쟁!"
주호식이 진화에 나섰다.
"이번에는 그쪽에 빚을 진 거야. 그러니까 다들 진정하고 근태 관리에 신경 쓰라고. 그래야 나도 갚아 줄 수가 있잖아? 각 팀장들 알아들었지?"
"예, 알겠습니다."
"네, 네."
여러 말 할 것 없이 실력으로 보여 주자.
그것으로 상황을 정리한 주호식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다음은 전체 회식 건인데……."
틈틈이 다이어리를 확인하며 주호식은 차분하게 전달 사항을 전달했다. 그의 목소리는 크지도, 그렇다고 높지도 않았지만 듣는 이로 하여금 집중하게 만드는 묘한 힘이 있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기적을 비롯한 11명의 치료사들의 다리가 뻐근함을 느낄 때쯤 주호식이 다이어리를 덮었다.
"자, 전달 사항은 이걸로 끝이고…… 다들 내 뒤에 있는 선생님들 보이지? 아마 누구인지 다들 알고 있을 거야."
그 말에 치료사들의 얼굴에 다양한 반응이 스쳤다. 몇몇 치료사들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고, 몇몇 치료사들은 긴장한 표정을 지었으며, 또 몇몇 치료사들은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기적의 학교 선배이자 입원 1팀 부팀장으로 있는 강동호 또한 굳은 표정을 애써 감추며 기적을 쳐다보고 있었다.
장내에 흐르는 미묘한 기류를 아는지 모르는지 주호식이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입원 3팀 부팀장과 11기 인턴 선생님들입니다. 이기적 부팀장부터 간단하게 자기소개해 주세요."
그 말을 끝으로 입을 다문 주호식이 살짝 옆으로 비켜섰다. 다음 순간, 기적은 적잖은 당혹감을 느껴야 했다. 주호식이라는 방패를 잃는 순간, 날카로운 시선들이 자신을 향해 쏟아진 탓이었다.
'뭐랄까, 눈빛들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그는 뒤로 물러나는 대신 앞으로 한 걸음을 내딛었다. 그것은 단순한 한 걸음이 아니었다. 앞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난관이 다가오든 이를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한 걸음이었다.
그가 명성 병원에서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
소개를 마치고 기적은 직속상관이라 할 수 있는 장원호 팀장과 함께 휴게실로 이동했다. 파일철 하나를 건네며 그가 말했다.
"선생님은 전임 부팀장이 치료하던 환자를 그대로 이어받게 될 거예요. 오늘까지는 치료 킵이니까, 오늘 이곳에서 차트 보면서 환자 파악하고 치료 계획 세우면 될 거예요."
"알겠습니다."
기적은 고개를 끄덕이며 치료 차트를 받아들었다.
그런데 왜일까, 장원호가 곤란한 표정으로 주변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슨 일이냐고 눈으로 묻자, 그가 조심스러운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선생님…… 아니, 부팀장이라고 해야 하나? 괜한 말 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지금부터 내 말 잘 들으세요."
기적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곤 자세를 바로 했다.
"눈치를 챘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명성 병원이 뭐랄까, 좋게 말하면 내부 결속력이 강하고, 나쁘게 말하면 굉장히 배타적이에요. 대부분 인턴부터 시작해 단계를 밟아 나가기 때문에 외부 인사에 대해서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은 부분이 있어요. 그런데 부팀장은 우리 병원 출신이 아니잖아요?"
눈빛이 그리 호의적이지 않다. 막연하게 의심했던 부분이 장원호의 입을 통해 사실로 확인되고 있었다. 자못 심각해진 표정으로 벙어리처럼 듣고만 있자, 장원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 그렇게 심각한 표정 지을 건 없고. 어디든 사람 사는 곳 아닙니까? 실력이 좋다고 들었는데…… 좋은 모습 보여 주면 팀원들이 알아서 따라오겠지."
"알겠습니다."
"그럼 나는 치료가 있어서, 이만."
손가락으로 손목시계를 툭툭 두드린 장원호가 휴게실을 나섰다.
"수고하세요!"
휴게실을 나서는 장원호의 뒤통수에 대고 인사를 건넨 기적이 문이 닫힘과 동시에 자리에 앉았다. 그때였다, 오랫동안 잠잠하던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퀘스트 [바닥을 찍고 있는 평판]을 부여합니다.
-목표 : 병원 내 평판을 60 이상으로 올리세요. (8/100)
-달성 보상 : 치료에 도움이 될 아이템.
'어라, 이건 또 뭐야?'
가뜩이나 심란했는데 메시지가 더욱 심란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평판이 100점 만점에 8이라니……. 이건 해도 너무했다. 수치가 너무 낮아서 퀘스트 보상 같은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거 잘못된 선택을 한 거 아닐까?'
심란한 마음에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문득 조금 전 내딛었던 한 걸음이 생각났다.
'누가 말했더라……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고.'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미국의 의사 로버트 앨리엇의 명언이 기적을 일깨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