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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물리치료사-8화 (8/205)

# 8

물리치료사 이기적 (8)

***

3월 2일.

첫 출근 날이 밝았다. 말끔하게 차려입은 기적은 이른 시간 집에서 나와 지하철에 올랐다.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첫 출근인가? 살짝 설레는데?"

오늘을 위해 만반의 준비를 했다. 면접 합격 통보를 받은 이후 주어진 일주일의 시간을 그는 허투루 보내지 않았다.

전공 서적 탐독에 열중했음은 물론, 시간이 날 때마다 병원 홈페이지에 접속해 병원의 인사도 파악에 주력했다.

지하철에 오른 기적은 머릿속으로 병원의 인사도를 그려 보았다. 이에 따라 병원의 인사도가 그의 머릿속에 그림을 그리듯 주욱 떠올랐다.

제일 위에는 병원을 설립한 이사장 김기연이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아래에 병원장 명의진이 있었다.

그 밑으로는 6명의 과장이 있었다. 재활의학과, 신경의학과, 그리고 내의학과를 책임지는 3명의 닥터들과, 간호과를 책임지는 간호과장, 재활치료과를 책임지는 치료과장, 인사과를 책임지는 인사과장이 그 주인공들이었다.

기적이 속한 부서는 당연히 재활치료과였다. 물리치료사와 작업치료사로 구성된 이 부서는 치료과장 박영규가 총괄하고 있었고, 그 밑으로 치료실장 주호식이, 다시 그 밑으로 입원 1팀장 박준만, 입원 2팀장 송한나, 입원 3팀장 장원호가 있었다.

앞으로 기적이 담당하게 될 정식 직책은 입원 3팀 부팀장이었다. 그러니까 장원호는 그의 직속상관이 되는 셈이었다.

'팀장님은 어떤 분이신지 모르겠네. 일단 사진으로만 봤을 때는 인상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던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질 때쯤 방송이 들려왔다. 깊은 상념의 늪에서 그를 꺼내 주는 방송이었다.

-다음 역은 양재, 양재 역입니다.

그 소리에 퍼뜩 상념에서 깨어난 기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마터면 내려야 할 역을 그냥 지나칠 뻔 했다.

'일찍 나온 덕분에 지각은 하지 않았겠지만…….'

헐레벌떡 겨우 시간에 골인하는 것은 그가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다. 그래서는 일찍 나온 보람이 없지 않은가? 시간 약속은 항상 여유 있게, 그것이 기적이 추구하는 방식이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기적이 사람들 사이에 섞여 열차를 나섰다.

현재 시각 8시 26분.

출근 시간인 9시까지는 30분 이상이 남은 상황. 병원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 여유는 있었다.

기적은 정신없이 뛰어가는 사람들을 먼저 보낸 뒤, 여유 있게 출구를 빠져나갔다.

'병원이 분명 이쪽이지?'

출구를 나선 기적이 병원의 위치를 가늠할 때였다. 때마침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 하나가 보였다.

왠지 모르게 익숙한 실루엣이었다.

'누구더라?'

유심히 실루엣을 바라볼 때였다. 시선을 느꼈는지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사람이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어?"

"앗!"

두 사람의 탄성이 허공에서 교차했다.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 자리에 멈춰선 여자. 마치 석상처럼 굳은 모습을 보는 순간, 기적은 내심 고소를 흘리고 말았다.

'아니, 왜 형이 거기서 나와? 딱 이 표정인데?'

아닌 게 아니라 나타난 여자, 그러니까 정수정은 딱 그런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굳게 앙 다물린 입에서 금방이라도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같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가장 만나기 싫었던 사람이 서 있는 것이다.

사실 그녀도 합격자 명단을 확인한 이상, 기적이 합격했다는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기적이라는 이름은 합격자 명단 최상단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합격 통보를 받은 이후 기적을 다시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좋을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리고 그 결과 어느 정도 대비책을 강구해 냈다. 태연하게, 마치 그런 일이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자. 그것이 그녀가 내린 해답이었다.

사실 실수라고 할 것도 없는,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어쩌면 그 사람은 그 일을 벌써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렇게 수도 없이 생각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기적을 만났다. 그래서일까, 일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아, 어쩌지?'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못 박힌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기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정수정 선생님 맞죠?"

왠지 모르게 듣기 좋고 편안한 목소리였다. 덕분에 수정은 패닉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멈췄던 시간이 빠르게 흐르기 시작했다.

"앗! 맞아요, 맞아요. 안녕하세요? 여기서 뵐 줄은 몰라서 놀랐어요."

"그러게요."

어색한 인사를 나눈 둘은 이내 병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말없이 걸음을 옮기던 기적이 문득 입을 열었다.

"키가 굉장히 크네요? 거의 170은 되는 것 같은데, 나도 작은 키는 아닌데……."

기적의 키는 179cm로 작은 편이 아니었다. 하지만 수정의 어깨 높이는 그런 기적과 비교해도 별로 작은 느낌이 아니었다.

그 말에 슬쩍 손을 들어 어깨 높이를 가늠해 본 수정이 이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에요. 167 정도예요. 170처럼 보이는 건 높은 굽 덕분이에요!"

"아, 그래서 그런가?"

병원을 향해 걸음을 옮기며 두 사람은 소소한 대화를 나눴다. 그래서일까, 병원 인근에 도착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 흐르던 서먹한 기류는 상당히 흐려져 있었다. 그 증거로 사람이 1명 들어와도 될 것 같았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이제 옷깃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물론 여전히 수정은 편한 느낌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얼어붙었던 처음에 비하면 눈부신 발전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병원 앞에 도착했다.

-명성 병원.

전면에 붙어 있는 대형 간판을 확인한 기적이 조금은 긴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들어가 볼까요?"

첫 출근자들의 소집 장소는 7층에 위치한 인사과였다. 안으로 들어가자 의자에 쪼르르 앉아 있는 7명의 앳된 얼굴들이 보였다. 누가 봐도 '나 긴장했어요.' 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는 모습을 보며 기적은 그들의 정체를 유추해 냈다.

'새로 입사한 11기 인턴 선생님들이구나.'

수정도 그것을 느꼈을까, 그녀는 재빨리 비어 있는 의자로 가 앉았다. 의자가 아직 2개 남은 것으로 보아 이번 인턴 선생님들은 총 10명인 것으로 보였다.

'일찍 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네.'

고개를 돌리자 치료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보였다.

굉장히 특색 있는 사람이었다.

일단 몸이 멸치처럼 말랐고, 어깨가 상당히 좁았다. 너무 왜소해서 멀리서 보면 학생으로 보일 정도였다.

반면 인상은 까칠했다. 주근깨 있는 얼굴과 팬더처럼 짙은 다크서클, M자 탈모가 제법 진행된 이마에서는 연륜이 느껴졌다. 나이는 대략 40대 초중반쯤으로 보였다. 기적은 단번에 그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아차렸다.

'주호식 치료 실장!'

명성 병원 재활치료실의 2인자.

말 한마디로 나는 새도 떨어뜨릴 권력자가 신입들을 맞이하기 위해 인사과에 나와 있었다.

역시 예습을 하길 잘했다고 뿌듯해하는데, 주호식이 들고 있는 이력서와 기적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이기적 선생님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주호식 실장님이시죠?"

"어, 어떻게 알았어요?"

"병원 홈페이지에서 봤습니다."

짧게 답하자 주호식은 '아! 준비성이 철저한 친구네' 하고 혼잣말을 뇌까리다 이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면접 때 데모를 엄청 잘했다던데?"

"열심히 했습니다."

그러자 주호식은 또 들릴 듯 말 듯 하게 '열심히 한 거랑 잘한 것은 완전히 다른 건데?' 하고 혼잣말을 했다. 조금 성급한 판단일 수 있겠으나, 주호식은 머릿속 생각을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습관이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대화가 끊어진 사이, 인사과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얼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2개 남은 의자의 주인공들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조금은 무거운 분위기 때문이었을까, 아직 9시까지는 15분이 넘게 남아 있었건만, 인턴들은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고개를 숙여 댔다.

"음……."

기적은 시간을 확인하는 주호식을 보며 그들이 한소리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늦은 것은 아니지만 주호식이 기다린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까칠한 얼굴에서 도저히 좋은 말이 나오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온 말은 기적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난 것이었다.

"아직 9시까지는 15분이 남았습니다. 저희 병원은 근무 시간을 준수하니 그렇게 사과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게 운을 뗀 주호식이 재차 말했다.

"뭐, 그렇다고는 해도 다들 모였으니 여기서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죠? 일과를 조금 일찍 시작해 볼까요?"

의외로 주호식은 합리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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