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물리치료사 이기적 (2)
"그러니까 뭐야, 지은 누나가 형의 고등학교 동창이랑 바람…… 아니, 그러니까 뭐라 말해야 하지? 하여튼 간에 형을 배신한 것도 모자라서 형의 고등학교 동창한테 붙었다고?"
잔뜩 흥분한 듯한 지식의 목소리가 고요한 힐링 센터를 울렸다. 기적은 대답을 입 밖으로 낼 기분이 들지 않아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지식은 씩씩 콧바람을 뿜어내며 재차 말했다.
"이름이 뭐……? 명석한? 웃기고 있네."
차지은과 명석한 그리고 이기적.
셋은 고등학교 동문이었다.
귀여운 외모로 남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지은, 그리고 뛰어난 성적과 귀공자 같은 외모로 여학생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던 석한. 그리고 여러모로 평범했던 흔남 기적.
이 셋은 같은 반은 아니었지만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며 친분을 쌓아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석한이 지은에게 고백을 했다. 동아리 활동을 같이하던 동아리원이라면 누구나 다 알 정도로 요란한 고백이었다. 고백이 성공하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기에 그토록 요란을 떤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거절이었다. 따로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과 함께였다. 당시 석한은 충격 때문인지, 창피함 때문인지 근 일주일 가까이 학교를 결석해 버렸다. 병가를 이유로 했지만 어지간한 학생들은 다 알고 있었다. 석한이 학교에 나오지 않은 이유를 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수능이 끝난 어느 날.
지은은 기적에게 고백했다. 열심히 봉사 활동을 하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는 말과 함께였다. 내심 지은을 마음에 두고 있던 기적은 그 고백을 받아들였고, 둘은 그때부터 10년 넘게 연인 관계를 이어 왔다.
"이야기를 듣고 나니 진짜 황당하네. 외제 차? 결국 돈을 택했다 이거지, 그럴 거면 애초에 왜 형을 택한 거야?"
지식의 목소리에는 이제 분노를 넘어서 황당함까지 섞여 있었다.
오랫동안 침묵하던 기적이 입을 열었다.
"뭐 진작부터 조금은 눈치채고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정말 힘들어서 애써 모른 척했는데, 이제와 생각하니 차라리 다행이야. 있는 정, 없는 정 다 떨어졌거든. 덕분에 쉽게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리고 뭐 지난 사연만 제외하면…… 좋은 집안에 허우대 멀쩡해…… 나랑 비교하면…… 휴, 다른 마음 생길 법도 하지 뭐……."
그 말에 지식의 눈꼬리가 역 팔자(八)로 올라갔다.
"뭐야, 그걸 말이라고 해? 형이 어디가 어때서? 어디 사람의 가치라는 게 그런 것만으로 따질 수 있는 거야? 형이 정말 잘했잖아……."
제3자인 지식이 보기에도 기적은 지은에게 정말 잘했다. 지난 10년간 한결같은 모습으로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런데 돌아온 결과가 이거라니? 한숨을 내쉰 지식이 다시 말했다.
"하긴 뭐,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쩌겠어. 마셔, 오늘 마시고 죽자."
지식은 단숨에 술잔을 비운 뒤, 잔을 내밀었고, 기적은 그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그리고 희미한 미소와 함께 말했다.
"왜 네가 달리고 그러냐. 달리려면 내가 달려야지. 지식아, 형 힐링 센터 접으련다. 그리고 다시 병원에 들어갈 거다."
"정말?"
"그래. 안 되는 일 붙잡고 있어 봤자 빚만 늘어날 것 같고, 빨리 접는 편이 나을 것 같아서. 좋지도 못한 성격에 갑질 하는 손님들 상대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병원에 들어가서 조금 더 다양한 환자들을 만나 보고 싶기도 하고, 아무래도 여기서는 어려운 케이스를 만나기 힘드니까. 무엇보다 애초에 지은이 성화 때문에 차린 센터인데, 이제 헤어졌으니 더 운영할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잔뜩 올라갔던 지식의 눈썹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이 톤의 목소리 역시 본래의 톤을 되찾았다.
"그래, 잘 생각했어. 원래부터 형 신경계에서 일하고 싶어 했잖아. 형은 신경계하고 잘 어울려. 요즘 자리 구하는 데 많더라. 아마 형 스펙이면 팀장급으로는 들어갈 수 있을 거야."
"스펙은 무슨……."
"왜, 그래도 형 PNF도 레벨 3까지 들었고, 시간제 외래 강사이긴 해도 대학 교수까지 했었잖아. 의외로 병원에서 그런 스펙들을 좋아한다고. 병원 홍보에도 도움이 되니까."
PNF란 고유 수용성 신경근 촉진법이라고 해서 신경계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있어 BOBATH와 함께 최고의 치료법으로 평가받고 있는 치료법이었다.
특히 이 PNF의 단계는 베이직, 파트 A, B, 레벨 1, 2, 3, 4로 나뉘어 있었는데 레벨 3 이상을 수료한 치료사는 업계에서 상당한 고평가를 받고 있었다.
기적은 얼굴 근육을 묘하게 일그러뜨려 웃는 것도, 그렇다고 우는 것도 아닌 이른바 웃픈 표정을 지었다.
"운이 좋았지. 그 이야기는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
그렇게 말을 자른 기적은 지식이 잔을 들어올리기도 전에 혼자 술을 넘겨 버렸다. 딱 오늘까지만, 딱 오늘까지만 술이라는 친구에게 의지하기로 한 기적이었다.
***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각.
술에 얼큰하게 취한 지식을 역까지 배웅하고 돌아오는 길.
기적은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터벅터벅 집으로 향했다.
2월 말.
아직은 밤바람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차가웠다. 아니, 어쩌면 그에게만 그렇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경사가 진 외딸은 골목길.
인적이 드문 쓸쓸한 골목길을 기적은 홀로 걸어갔다, 찬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면서.
'날씨 참…… 춥다.'
어느덧 스물아홉 살.
10년을 넘게 만나 온 여자 친구에게 버림을 받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인생.
모아 둔 돈 하나 없이 되려 대출 빚만 가지고 있는 비루한 인생.
인지하지 못한 사이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도무지 좋은 날이 오지 않을 것만 같았다.
답답한 마음을 털어 보려 바라본 밤하늘에는 별똥별이 찬란한 빛을 뿌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문득 어린 시절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떨어지는 별에 소원을 빌면 그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원을 빌어 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기적은 이내 냉소를 짓고 말았다.
'진짜 별생각을 다 하네. 소원? 판타지 소설에 나오는 것처럼 갑자기 레벨 업 시스템이라도 생기길 기대하는 건가? 그런 일이 현실에서 생길 리 없잖아? 차라리 저 유성에서 괴물이 튀어나오고 대헌터의 시대가 도래하는 편이 좀 더 현실성 있겠다.'
그때였다.
떨어지던 별똥별이 점차 자신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어어?"
그리고 어느 순간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어어?"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뭐라 형언하기 힘든 기운이 그의 두 눈을 통해 흘러들었다.
"으으…… 이게 뭐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불현 듯 두통까지 밀려왔다. 기적은 관자놀이를 누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던 별똥별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상태였다.
"너무 과음을 했나. 빨리 집에 가서 쉬어야겠다."
그렇게 뇌까린 기적이 잰걸음으로 집을 향했다.
거울이 없었기에 기적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안광이 일렁이다 사라졌다는 것을. 자신에게 벌어진 일이 결코 술로 인한 헛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옛사람 장 그르니에는 말했다.
저마다의 일생에는, 특히 그 일생이 동터 오르는 여명기에는 모든 것을 결정짓는 한순간이 있다고.
이기적.
나이 스물아홉 살의 어느 겨울 날, 그의 운명을 뒤바꿀 한순간을 맞이했다.
***
"으, 머리 아파……."
어제 마신 술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기적은 한 알의 숙취 해소제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랬다. 하찮은 숙취를 핑계로 가뜩이나 파리 날리는 힐링 센터를 닫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센터를 닫을 때 닫더라도 말이다.
어느덧 센터를 오픈한 지 1시간이나 지났다. 하지만 손님은 1명도 찾아오질 않았다.
'오늘도 파리만 날리다 끝나려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때였다.
위이잉, 자동문이 열리며 남자 손님 1명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기적은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의 밝은 미소로 손님을 맞이했다.
하지만 남자는 별 감흥이 없는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리가 아파서 왔는데, 케어 좀 받을 수 있습니까?"
"물론이죠. 허리가 어떻게 아프세요?"
남자는 외투를 벗어 한쪽에 내려놓은 뒤, 입을 열었다.
"내가 한 1년 전인가…… 물건을 옮기다가 왼쪽 허리를 삐끗했는데 정형외과, 한의원, 뭐 좋다는 데 다 가 봐도 통증이 가시지를 않아요. 길을 가다가 버려져 있는 전단지 보고 한번 와 봤습니다."
"그러셨군요. 잘 오셨습니다. 일단 한번 볼까요? 이쪽으로 와 보세요."
기적이 남자를 치료용 베드에 앉혔다. 그리고 허리에 손을 댔다.
그런데…….
-레벨 업 시스템을 초기 가동합니다.
-레벨을 올릴 수 있는 보너스 포인트를 10만큼 부여합니다.
-튜토리얼을 시작합니다. 환자를 치료하고 포인트(20)를 얻으세요. 튜토리얼을 클리어하시면 특별한 기회를 제공합니다.
-튜토리얼 모드에서는 더 많은 포인트를 얻을 수 있습니다.
'어라?'
이상한 메시지가 연달아 나타났다. 마치 눈앞에 생긴 스크린에 누군가가 타자를 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적은 자신의 두 눈을 마구 비볐다. 그러나 눈앞의 홀로그램은 사라질 줄을 몰랐다.
"이게 뭐야?"
너무도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내뱉었다. 그러자 손님이 심각한 얼굴로 반문했다.
"뭡니까, 내 허리가 그렇게 이상해요?"
아무래도 '이게 뭐야'라는 기적의 말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혹시 이상한 글자가 보이지 않으세요?"
"뭐요, 글자가 보이긴 뭔 글자가 보인다고 그럽니까? 어? 혹시 내 허리에 글자가 쓰여 있습니까? 애들이 장난을 쳤나?"
그렇게 말하며 등을 보려고 하는 모습이 꽤나 진지했다.
적어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아니, 애초에 연기를 할 이유가 없었다. 아무래도 이 이상한 메시지는 기적에게만 보이는 것 같았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람?'
덜컥 겁이 났다.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아닌지, 그래서 헛것을 보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됐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정상이 아닌 것 같았으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메시지는 계속되었다.
-초기 포인트를 투자해 레벨 업하겠습니까? 레벨 업이 가능한 곳을 출력합니다.
-매직 핸드 LV 1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5)
-매직 아이 LV 1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5)
-매직 브레인 LV 1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5)
-매직 페이스 LV 1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5)
-매직 마우스 LV 1 (다음 레벨을 위해 필요한 포인트 : 5)
눈앞에 3D 홀로그램 같은 인체 모형이 나타났고, 그곳에 레벨 업이 가능한 다섯 가지 영역이 주르륵 나타났다. 마치 게임 캐릭터의 스테더스 창을 보는 것 같았다.
'어, 이거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기적이 그렇게 뇌까렸을 때였다. 조금은 날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작 안 합니까?"
퍼뜩 정신을 차려 보니 예의 남자가 심드렁한 표정으로 기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손님을 앉혀 놓고 계속 허공만 보고 있었으니 말이다.
솔직한 심정이야 축객령을 내리고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시스템 메시지에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얼마나 오랜만에 방문한 환자인가? 그는 환자를 나 몰라라 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바로 시작합니다."
집중을 위해 머리를 흔든 기적이 치료를 시작했다. 흔히 시진이라고 하는, 시각적 정보를 통해 환자의 상태를 파악하는 치료를 시작하려 한 것이다.
그런데 그때였다, 또다시 메시지가 나타났다.
-매직 아이의 레벨이 너무 낮아 환자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할 수 없습니다. 매직 아이의 레벨을 올리면 조금 더 정확하게 환자의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뭐라고?'
들려오는 메시지에 기적의 눈꼬리가 살짝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