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8 회: 경영의 대가 20권 -->
몸이 강철로 만들어진 것 같은 그 역시, 릭에 이어 바스크와 전력으로 충돌했으니 무사할 수가 없었다.
흙먼지가 피어올라 이 일대를 온통 뿌연 먼지구름 속에 갇히게 했다.한참동안이나 세 사람의 결전무대는 흙먼지 속에 가려졌다.
시간이 흐르자 흙먼지가 흩어졌다.
그곳에 서 있는 유일한 사람은…….
“죽음이라……. 잘은 모르겠지만 그 비슷한 지경까지는 살짝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드는군.”
롬펠 대공은 너덜너덜해진 채 웃음을 지었다.
“몸이 못 버틸 정도로 겨룬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자네들은 정말 훌륭했어.”
한쪽 무릎을 꿇은 바스크와 저 멀리에 쓰러져 있는 릭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이런 싸움을 하게 해준 자네들에게 매우 감사한다. 생각 같아서는 웃으며 작별하며 다음에 또 보자고 하고 싶지만, 전쟁은 전쟁이지.자네들을 죽일 수밖에 없어서 미안하군.”
“이봐…… 영감…….”
“응? 자네 아직 정신이 있었나?”
릭은 쥐어짜내듯이 말했다.
“정신을 잃을 것 같으니까…… 나부터 얼른 죽여. 잠든 사이에 죽지는 않을 거야.”
“알겠네.”
롬펠 대공은 배틀 액스를 들고 릭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크윽!”
바스크는 억지로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내 털썩 쓰러졌다. 아들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고 싶은 부모의 심정이었다.
롬펠 대공은 바스크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릭 앞에 서서 배틀 액스를 들어올렸다.
“잘 가게.”
“얼른 늙어 뒈져라…… 쿨럭!”
“크하하!”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롬펠 대공이 배틀 액스를 내리치려는 찰나였다.
도끼가 우뚝 멈췄다. 롬펠 대공은 릭을 죽이려다 말고 전방 먼 곳에 시선을 주었다.
무엇을 느꼈는지 롬펠 대공은 표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이런…… 이건 좀 곤란하게 됐는데.”
“누구지?”
바스크는 내상을 추스르는 와중에도 롬펠 대공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의문을 표했다.
롬펠 대공은 릭의 뒷덜미를 잡고 질질 끌어다가 바스크의 곁에 놓았다. 그리고 이곳으로 오고 있는 불청객을 기다렸다.
이윽고 한 젊은 청년이 나타났다.
청년은 정중하게 인사했다.
“혹시 롬펠 대공이십니까?”
“그렇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는 패트릭 콘돌이라고 합니다.”
바스크와 릭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롬펠 대공도 놀라운 표정이 되었다.
“콘돌? 혹시 정신 줄 놓고 미친 듯이 달리는 그 기병대의 대장이 너냐?”
“그렇습니다. 부족하지만 콘돌 기병대의 대장을 맡고 있습니다.”
“부족할 리가 있나. 그런데 이것 참 곤란하게 됐군. 보다시피 상황이 이런데, 자네 혹시 날 죽일 건가?”
넉살도 좋게 대놓고 묻는 롬펠 대공. 그도 그럴 것이, 대결로 몸이 성치 않은 상태에서 대뜸 나타난 새파란 신진 오러 마스터와 맞닥뜨린 것이다.
패트릭은 롬펠 대공의 능청맞은 물음에 웃으며 답했다.
“존경과 별개로 기필코 대공 전하를 죽여야 합니다만, 이 상황에서는 제 검이 닿기 전에 전하의 도끼가 두 분의 목에 먼저 닿겠군요.”
“그렇지. 아직 그 정도 기력은 남아있다네. 이 톰 롬펠이 인질극이라니, 내 나이 110살에 신세계를 경험하는군. 크하하, 추하다 여기지 말고 이해해주게.”
“예, 이해합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두 분을 살려주신다면 저 역시 대공 전하를 온전히 보내드리겠습니다.”
“하하핫, 좋네!”
롬펠 대공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배틀 액스를 거두었다.
패트릭 또한 바스타드 소드의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언제 한 번 기회가 된다면 또다시 보자꾸나. 그때는 너와 죽음을 논해주겠다.”
“그날을 고대하겠습니다.”
롬펠 대공은 성큼성큼 걸어서 자리를 떴다. 희대의 무인 롬펠 대공은 그렇게 사라졌다.
패트릭은 노대공이 사라지기를 기다리다가, 완전히 자취를 감추자 비로소 바스타드 소드를 검집에 넣고 달려갔다.
“쿤트 백작 각하, 페르난도 백작 각하. 두 분 다 무사하십니까?”
“괜찮다.”
“아직 안 죽었어.”
바스크와 릭이 동시에 대꾸했다.
패트릭은 품속에서 힐링 포션을 꺼냈다. 힐링 포션은 그동안 달리다 지친 말에게 먹인 터라 조금밖에 남지 않은 상태였다.
일단은 상태가 몹시 안 좋아 보이는 릭에게 한 모금 먹였다. 그리고 남은 것을 바스크에게 내밀었다.
“이것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난 괜찮다.”
사양한 바스크는 릭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강인하니, 약한 저 녀석에게나 더 주어라.”
릭은 발끈했다.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번쩍 드는 헛소리이시군요. 누굴 골골대는 나약한 놈으로 보십니까?”
“죽음 앞에서 막 초짜 티를 벗은 녀석으로 보이기는 하는구나. 거의 죽을 정도로 얻어터지지 않았느냐.”
자신의 말을 인용하며 놀리자 릭은 이를 갈았다.
“크윽, 정말 죽고 싶으신지요? 불효자는 웁니다.”
“호오, 이제 나도 초짜 티를 벗을 수 있겠구나.”
“크아악! 못 참겠다!”
오러 홀에 금이 갔음에도 벌떡 일어나 화를 내는 릭. 목에 핏대를 세우며 으르렁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패트릭은 못 말린다는 듯이 한숨을 쉬었다.
“그만들 하시고 반 모금씩 나눠 드시지요.”
바스크와 릭은 반씩 힐링 포션을 나눠 마시고 몸을 일으켰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
한 팔로 어색한 기지개를 켜는 릭에게 패트릭이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그…… 팔은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몸무게가 더 가벼워졌어. 신체 균형만 익숙해지면 전보다 더 빨라질 거야. 그런데 그보다 너 말이야. 언제 오러 마스터가 된 거야?”
“혼트 제국의 초원지대까지 침투했을 때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너 이 자식…….”
“예?”
릭은 다소 불쾌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이 놈, 혹시 나보다 더 천재는 아니겠지?”
“그, 그럴 리가요…….”
패트릭은 식은땀을 흘렸다.
“수상해. 나보다 더 어린 나이에 경지를 이루었잖아?”
“저, 정말 아주아주 운이 좋게 심득(心得)이 온 덕분에……. 정말 운 좋게 말이죠.”
바스크는 둘째 아들의 쩨쩨한 행태에 혀를 쯧쯧 차고는 패트릭에게 물었다.
“정말 수고가 많았군. 그런데 이곳은 어떻게 알고 온 것이냐?”
“리간드 영지로 복귀하는 길에 보급품을 실은 짐마차가 지나간 흔적을 발견했습니다. 적 보급부대가 지나간 지 얼마 안 됐다고 판단돼서 흔적을 쫓다가 이곳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지금쯤 다른 대원들이 적 보급부대를 완전히 괴멸시켰을 겁니다.”
“……뭐라고?”
“엑?!”
바스크도 릭도 깜짝 놀랐다.
패트릭이 말했다.
“상당한 물량의 보급품을 불태워버렸으니, 치명적인 타격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에게 어느 정도 피해는 입혔겠지요? 제 3 요새의 모두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만…… 왜 두 분 다 그런 눈으로 보시는 겁니까?”
롬펠 대공 군단으로 하여금 후퇴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음에도, 패트릭은 그 사정을 전혀 모르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자신이 방금 승전보를 들려주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
그것은 레던 평원에서 일어난 이적이었다.
황금빛 거대한 빛기둥이 하늘로 치솟는 것을 그 자리에 있던 수십만 인파가 똑똑히 목격하였다.
“저게 무엇이냐?”
빛기둥을 바라보던 카르스 황제가 물었다.
마법병단의 단장 리프 루오겔 백작이 진땀을 흘리며 답했다.
“폐, 폐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저건 카록 리간드입니다!”
“리간드 후작?”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갑자기 정령속박마법진에 저항하는 정령의 힘이 강력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서 그자가……!”
“그런가.”
카르스 황제는 덤덤히 대꾸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루오겔 백작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카르스 황제가 다시 말했다.
“소용없다면 마법진은 중단해라. 모든 마법사를 집결시켜 손님을 맞이해라.”
“손님, 말씀이십니까?”
“리간드 후작이 내게 올 것이다.”
“헉! 아, 알겠습니다!”
황급히 달려가는 루오겔 백작.
카르스 황제는 근처에 있는 수행병사를 손짓으로 불러 지시했다.
“할슈타인 후작을 이리로 불러라.”
“옛!”
수행병사가 말을 타고 달려가자, 이번에는 다른 병사를 또 불러서 일렀다.
“나머지 전군에 전달. 에릭 레던 국왕을 사로잡아라.”
“옛!”
이제 양국의 군주 중 누가 먼저 당하느냐에 승패가 달렸다는 것을 카르스 황제는 직감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