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3 회: 경영의 대가 20권 -->
가장 두려운 존재인 내가 별달리 힘을 쓰지도 못하고 추락해버리자 기뻐서 소리를 내지르는 것이었다.
그와 함께 뿔나팔 소리가 길게 울려 퍼졌다.
뿌우우우―
그와 동시에 다섯 개의 기병 부대 중 하나가 돌격을 개시하였다. 검은색 갑옷을 입은 음산한 분위기의 기사단이 그 선두에 보였다. 저건 흑십자 기사단…… 바로 륭겐 후작이 이끄는 2만 기병이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맹렬하게 달려오는 흑십자 기사단과 2만 기병에게 짓밟힐 것이다. 아니면 륭겐 후작이 내 목을 베거나 멱살을 잡고 끌고 갈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허망하게 당해버리면 안 되는데!
아군은?
나는 아군 진영을 바라보았다.
아군 진영에서도 누군가가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었다. 딱 한 명…….
단기필마로 달려오는 인물은 바로 뮤트 공작이었다.
“잡게!”
뮤트 공작은 말을 탄 채 상체를 숙이며 손을 아래로 뻗었다. 나는 힘겹게 오른손을 높이 들었다.
“으윽……!”
오른쪽 어깨가 욱신욱신 쑤셔서 오래 들고 있기가 힘들었다. 내 오른팔이 똑바로 지탱되지 않고 후들거렸다.
다행히도 뮤트 공작은 내 손목을 낚아챘다.
내 몸이 번쩍 끌어올려져서 말 등에 걸쳐졌다.
뮤트 공작은 급격히 말머리를 돌려 중앙의 영주연합군 진영으로 달렸다.
“전투 중반까지 기다리라 하지 않았나.”
가볍게 추궁하는 어투.
나는 끙끙 앓으며 간신히 대꾸했다.
“죄송합니다. 크윽, 가볍게 인사나 하려 했는데, 이렇게 될 줄은…….”
“마나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것은 나도 느꼈네. 정령술을 제한하는 어떤 봉인 마법진 같은 건가?”
“예. 정령들이 힘을 쓰지 못했습니다.”
“놈들이 먼저 공격해오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던 이유가 이거였군. 자네가 하늘로 날아올랐을 때, 이걸 써서 추락시킬 의도였어.추락사로 죽게 하거나, 최소한 큰 부상을 입혀서 우리 측의 사기를 떨어뜨릴 생각이었겠지.”
“으윽…… 보다시피 성공했군요.”
“어디가 아픈 건가?”
“온몸이요.”
“가장 아픈 곳을 말하게.”
핀잔을 주는 뮤트 공작. 나는 왼쪽 다리가 부러졌다고 이야기했다.
뮤트 공작은 달리는 와중에 힐링 포션을 꺼내 내 다리에 반쯤 부어주었다. 나머지 절반은 내 입가 갖다 대어서 마시게 해주었다.
부러졌던 왼쪽 다리뼈가 다시 붙었고, 부서질 것 같았던 온몸의 통증이 잦아들었다.
부상에서 회복되었을 즈음, 영주연합군의 진영에 도착했다. 나를 내려준 뮤트 공작은 주변 병사에게 지시했다.
“말 한 필을 가져와라.”
“옛!”
병사는 신속하게 말 한 필을 가져와주었다.
“타고 폐하께 돌아가게.”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작 전하.”
“내가 당부했던 말을 명심하게.”
“알겠습니다.”
“이제 가게. 륭겐 후작이 이쪽으로 오는군. 예상대로 적군은 우리 영주연합군을 먼저 격파할 생각이네.”
“예!”
나는 말을 타고 달렸다.
-아빠, 괜찮아?
-미안해…….
노움과 운디네가 울상을 지으며 내 양쪽 어깨에 올라앉았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이제 괜찮아. 너희들 덕분에 이렇게 살았는걸.”
-통구이다! 마법사 놈들부터 통구이, 아니 잿더미다!
내 머리 위에 올라탄 샐러맨더는 길길이 날뛰며 분노를 표출했다. 온몸이 불로 이루어진 녀석이 불 같이 화를 내니까 정말 악마처럼 위험해 보인다.
내가 돌아오자 에릭 국왕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괜찮은 것이냐, 재상!”
“예, 폐하. 스타일만 구기고 돌아와 죄송합니다.”
“이 와중에 농담이 나오느냐? 그보다 대체 어찌 된 일이냐?”
“정령술을 쓸 수가 없었습니다. 정령속박마법의 일종으로 보이는데,이 일대에서는 정령들의 힘이 제한당하고 있습니다.”
“혼트 제국의 마법병단 놈들이 나름대로 연구비를 낭비한 성과가 있었던 모양이구나.”
“마법진이 어떤 원리로 유지되고 발휘되는지 알아내야 합니다.”
“마법사를 불러줄 테니 이야기를 나눠보아라.”
“예, 폐하.”
그런데 때마침 마법사로 보이는 로브 차림의 중년 사내 한 명이 우리에게 왔다.
아직 부르지도 않았는데 마법사가 오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마법사가 대답했다.
“해리라 불러주십시오. 군사부상서께서 부르셔서 왔습니다.”
역시 제론이다.
아마 내가 추락하는 걸 보자마자 마법 때문임을 알고 자문을 구할 마법사를 부른 모양이었다.
“해리? 성은 없고?”
“예, 평민입니다.”
“실력은 있어 보이는데 의외군?”
“5서클 마스터입니다. 이쪽 바닥은 실력만 어느 정도 되면 신분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지라 귀족신분을 얻을 필요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아무튼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레던의 현자 재상 각하.”
“방금 전의 코미디를 보고도 현자 소리가 나와?”
“하하하……! 이, 이런, 죄송합니다.”
“죄송은 무슨. 웃기면 웃어야지. 그보다 이 마법진에 대해서 아는 대로 말해봐.”
“예. 일단 살펴보건대, 마나를 변환시키는 술식이 이질적인 것이 마치 흑마법의 원리와 비슷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럴 거야. 아마도 마법병단은 흑마법사들과 함께 정령술 대책을 연구한 모양이니까.”
“그랬군요. 이런 천인공노할 놈들!”
“자자, 계속 설명해봐.”
“아, 예. 아무튼 이 술식이 아마도 정령술을 제한시키는 마법 같습니다.”
그러면서 해리는 내 머리와 양 어깨에 앉은 정령들을 쭉 둘러보다가 말을 이었다.
“소환과 소환해제는 문제없지만 정령술을 발휘하려 하면 제한되는 구조였지요?”
“맞아.”
“그렇군요. 그런데 듣기로 재상 각하께서 거느리고 계시는 정령들 중 노움, 운디네, 샐러맨더로 알고 있는데, 실프는……?”
“중급 정령이다. 계약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까.”
“그럼 혹시 실프에게 소환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힘들지 않은지 물어보실 수 있으신지요?”
나는 내 옆에 가만히 서 있는 실프를 바라보았다.
나랑 똑같이 생긴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힘들어…… 피곤해…….
이 무기력한 놈이. 딱 전생 시절 레이라에게 이혼당한 직후의 나 같잖아!
“……그렇다는데?”
“역시! 이 마법진은 정령의 존재 자체도 제한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상급 정령처럼 강한 존재는 어찌하지 못하고, 다만 중급 정령인 실프는 소환상태를 유지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어지간한 하급 정령사였더라면 정령을 소환도 못했을 겁니다.”
“그렇군. 그런데 보다 쓸 만한 정보는 없어?”
“저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잠시만…….”
해리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는가 싶더니, 한참 뒤에 다시 말했다.
“이 마법진은 아마도 이 일대 1.5킬로미터 내지 2킬로미터 정도 지름의 거대한 원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안에서는 정령술을 발휘하기가 힘드십니다.”
“2킬로미터 바깥에서 정령술을 쓴다면?”
“아까 사그라진 불덩어리처럼 정령술을 사용한 어떤 것이 마법진 안에 들어왔을 때 힘을 잃겠지요.”
“제길.”
“그래도 좋은 소식은 있습니다, 재상 각하.”
“그게 뭔데?”
“이 마법진은 마법사들이 계속 마나를 불어넣고 있어야 유지되는 겁니다. 마나 공급을 끊으면 마법진도 사라지지요.”
“그럼 이대로 가만 놔두면 놈들이 마나가 고갈되어서 마법진 유지가 힘들어지는 건가?”
“그것이…… 그건 아니고, 마법진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마나의 양은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제 입장에서야 마나량의 소비가 크지만,저쪽의 마법병단은 마법사들 숫자가 워낙 많으니까요. 아마 이 전투가 끝날 때까지 계속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이봐, 전혀 좋은 소식이 아니잖아.”
“아닙니다. 놈들이 마나를 소진하도록 재상 각하께서 줄다리기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야?”
“마법진 유지하는데 소모되는 마나량은 얼마 되지 않지만, 재상 각하께서 정령술을 발휘하신다면 놈들은 그것을 억제하기 위해 더 많은 마나를 소모해서 억제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럼 아까 추락할 때 노움과 운디네가 일시적으로 힘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도…….”
“예, 마법병단이 마나를 투입해서 발생한 억제력보다 더 강한 정령의 힘이 발휘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마법병단이 그것을 보고 더 많은 마나를 주입했기 때문에 얼마 못가 정령의 힘이 억제되었지만 말입니다.”
“정말로 줄다리기군.”
“예. 재상 각하께서 가만히 계시다가 불시에 정령술을 발휘하시면,놈들은 그때마다 놀라서 다량의 마나를 투입할 겁니다. 그런 식으로 계속 놈들이 마나를 소진하게 만드셔야 합니다. 그러다가 놈들이 힘이 빠지면…….”
“오케이. 그럼 계속 줄다리기를 하다가 전투 중반부터는 이 망할 마법진을 깨고 날뛰어야겠어.”
“바로 그겁니다!”
그런데 해리는 나직한 어조로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다만 걱정되는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뭔데?”
“적군의 진영에 마법사가 몇 명일지……. 저쪽에 마법사가 많이 있다면, 놈들보다 재상 각하의 힘이 먼저 소진될지도 모릅니다.”
“끙…….”
나는 나직이 신음을 했다.
해리의 지적대로였다.
륭겐 후작 군단, 쥬르덴 후작 군단, 그리고 카르스 황제와 할슈타인 후작이 이끌고 참전한 병력을 총합하면 어림잡아도 35만 가량은 된다.
그중에서 12만 명만 이끌고 카르스 황제는 이곳에 나타났다. 나머지 병력은 전부 북부로, 동부로, 서부로 보내 영지들을 닥치는 대로 점령하게 했다.
하지만 그 35만 대병력 중에서 마법사들은 전부 이곳에 데려왔다고 가정한다면?
3서클 이상의 마법사의 숫자는 마법병단을 합해서 족히 백 명 가까이 될 것이다!
카르스 황제는 나를 막을 유일한 수단인 마법사들을 이곳에 집중시켰을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어찌 보면 우리 아군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카르스 황제의 12만은 그냥 12만이 아니라, 부족한 병력 대신 마법사의 비율이 매우 높은 전력인 셈이었다.
카르스 황제가 그저 자기 역량 과시를 위해 불리함을 자처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정말 골치 아프게 됐네.”
나는 그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마 지금 실프와 내 얼굴 표정이 똑같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