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1 회: 경영의 대가 20권 -->
‘그리 되면 너무 성장이 빠르다.’
라엘이 결국 브리튼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성장하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레던 왕실 놈들의 모략 때문에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대체 이 모략이 어떤 놈의 작품이지? 무슨 속셈인지 알아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약점을 제대로 찔렀어. 카록 리간드인가? 아니야, 그 친구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조금 음험하군. 아마도 재정부상서 루이 콘체른 자작이겠지.’
오리엔 국왕은 이미 카록 리간드 후작이나 루이 콘체른 자작 등 레던 왕실 핵심인사들의 성향까지도 파악하고 있었다.
카록 리간드 후작은 빠른 눈치와 타고난 언변으로 약아빠진 짓을 하곤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도(正道)와 온건함을 추구하고 있어서 적을 만들지 않는 유형이었다. 밑바탕에 깔려있는 올곧은 정신이 그가 타인을 쉽게 설득해 마음을 얻어내는 비결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략은 언뜻 보기에는 단순해보이지만, 정치적 갈등은 그런 단순한 것에서 촉발되는 경우가 많았다.
인간관계의 갈등을 자극해 내부 투쟁을 유도하는 음험한 책략! 이런 건 카록 리간드가 아니었다.
‘루이 콘체른이라는 놈의 짓일 거다. 아니면 리간드 후작의 심복인 에반 테일러의 작품일 수도 있겠군. 그 두 녀석은 이런 일에 능하니까.’
어쨌든 누가 꾸몄든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오리엔 국왕 자신의 결정이었다.
지금 전쟁에 참전할 것인가, 좀 더 관망할 것인가?
모략이 이 선택의 기로를 더욱 복잡한 문제로 만들어버렸다.
만약에 정말로 두 나라가 싸우는 틈을 타서 이익을 취해 패권을 장악했다고 생각해보자.
가장 큰 공을 세워 개선할 사람은 브리튼 공작가의 라엘이었다.
오리엔 왕실이 전력을 투입해 전쟁을 더 큰 판으로 키운다 할지라도,그러한 싸움에서 일등공신이 될 사람은 눈앞에 있는 브리튼 공작이었다.
그런 이유 때문에 본래는 브리튼 공작을 총사령관으로 원군을 보내려 했으나, 취소하고 아들 라엘을 대신 보낸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번 기회에 오리엔 왕국이 강대국으로 성장할지라도,내부적으로는 브리튼 공작가의 세력을 키워줘서 왕권을 위협하는 존재로 키우는 꼴이 된다.
‘결코 좋은 결과가 아니야. 아무리 나라가 커져도 내부결속이 튼튼하지 않으면 소용없다. 혼트 제국의 흥망성쇠가 그걸 증명하지 않은가.’
과거, 크로센트 베잘리우스 대공의 신화적인 활약과 이사벨라 여왕의 훌륭한 통치로 대륙 최강국으로 급성장했던 혼트 제국이었다. 그렇게 빠른 속도로 강대국이 탄생한 것은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죽고서 혼트 제국은 급격히 무너졌다.
드넓은 영토를 통치하기에는 혼트 제국이 가진 기반이 너무 취약했다. 얼마 전까지 서쪽의 작은 왕국을 다스리던 혼트 황실은 대륙의 3분의 2를 아우를 역량이 부족했다.
강력한 통치기반을 바탕으로 한 안정적인 정국 운영.
그것이 오리엔 국왕이 추구하는 목적이었고, 국외보다 내정에 치중한 이유이기도 했다.
아무리 나라가 크고 부강해도 내실이 좋지 않으면 빛 좋은 개살구인 것이었다.
‘역시 안전한 길을 택해야 할까?’
브리튼 공작가는 오리엔 왕실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브리튼 공작가와 대립하는 일은 카르스 황제에게 침략당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그렇다면…….
아예 문제가 불거지기 전에 미리 손을 써서 봉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어느 정도 결심이 들자, 오리엔 국왕은 뜻을 표명하기에 앞서 브리튼 공작에게 살짝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브리튼 공작.”
“예, 폐하.”
“짐은 기회보다는 안정을 택하고 싶소. 이웃나라의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은데, 공작은 어찌 생각하오?”
이 정도면 된다.
현명한 브리튼 공작은 그 말에 담긴 속뜻을 전부 알아차릴 것이다.
브리튼 공작은 잠시 숙고하더니, 입을 열었다.
“신도 폐하와 같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소?”
오리엔 국왕의 안색이 다소 밝게 펴졌다.
“레던 평원의 전투에서 레던 왕실이 승리한다 할지라도, 카르스 황제가 무사한 한 전쟁의 결과는 어찌 될지 모릅니다. 하지만 레던 왕실이 패하면 전쟁은 확실하게 혼트 제국군의 승리로 돌아가지요. 기회보다는 위험부담이 더 큰 일입니다.”
“짐도 그렇게 생각했소.”
“현재 시점에서 전쟁의 승부처는 레던 평원의 전투지만, 전쟁 국면 전체를 봤을 때, 핵심지역은 바덴 강 유역입니다.”
브리튼 공작의 말에 오리엔 국왕의 눈이 빛났다.
“카이슨 후작 군단과 육제후의 네 가문이 대치하고 있는 곳 말이구려.”
“예. 그들 양측은 아무런 움직임도 취하지 않은 채 대립만 하고 있습니다. 카이슨 후작은 바덴 강 루트를 통해 혼트 제국군 전체의 보급로를 책임지는 입장이기에 전투에 신경 쓰지 않고 있고, 네 가문 또한 위험부담을 짊어지는 것보다는 가만히 현상유지를 하는 쪽을 택한 결과입니다.”
“그쪽의 균형을 깨뜨리면 되는군.”
“예, 폐하.”
“공작이 직접 나서시겠소?”
오리엔 국왕은 다시 한 번 운을 띄워본다.
브리튼 공작이 말했다.
“신보다 더 적임자가 있습니다.”
“그게 누구요?”
“왕실 정규군 3군단장 할튼 백작입니다.”
“호오?”
“나이도 아직 40대 초반으로 다른 군단장들보다 젊은 편이고 패기도 있습니다. 그에게 10만 병력을 주어 이번 임무를 맡기시고, 공적을 세우면 후임 왕실 정규군 총사령관으로 제수시키심이 어떻습니까?”
“할튼 백작이 10만 군대를 끌고 바덴 강 유역에 합류하면, 움직이기 싫어하는 육제후의 네 가문도 유리함을 알고 공격에 나서겠구려.”
오리엔 국왕은 내심 가볍게 감탄을 했다.
역시나 브리튼 공작은 현명했다.
10만 병력이라면, 라엘이 원군 사령관으로서 이끌고 간 8만 병력보다도 많은 숫자였다.
그리고 카이슨 후작 군단을 쳐서 바덴 강 유역에서 혼트 제국군을 몰아낸다면, 레던 왕실과 함께 레던 평원 전투에 참전한 라엘보다 큰 공적을 세우게 된다. 물론 라엘이 거기서 카르스 황제를 사로잡는다면 얘기가 조금 달라지겠지만, 그럴 가능성은 높지 않다.
즉, 전쟁을 종식시켜 국외의 불안을 없앰과 동시에 라엘이 지나치게 빨리 성장하는 것도 견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아가 새롭게 떠오른 할튼 백작은 오리엔 국왕의 신임을 받는 새로운 인물로 떠올라, 브리튼 공작가에 대한 약간의 견제장치도 될 수 있다.
오리엔 국왕의 고민을 완벽하게 알아차리고 낸 브리튼 공작의 제안이었다.
“역시 공작이군.”
“과찬이십니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공작을 신임하는 것이오. 그리고…….”
오리엔 국왕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공작을 사돈으로 택한 이유이기도 하고 말이오.”
라엘과 세렌스 공주의 혼담을 성사시킨다는 뜻을 밝혔다. 이는 브리튼 공작이 보인 충성에 대한 보답이자, 화해의 표현이었다.
“신을 믿고 써주시는 폐하의 은총에 보답할 길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왕실과 나라의 안녕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공작만 믿겠소.”
브리튼 공작.
오리엔 왕국 사상 최고의 대가문으로 평가되는 브리튼 공작가의 수장이자, 본인도 오러 마스터이자 뛰어난 정치가·군인으로 두루 역량을 발휘하는 영웅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레던 왕실과 육제후의 관계처럼, 브리튼 공작 또한 오리엔 왕실과 권력을 다투는 대등한 관계로 올라설 수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리엔 국왕을 위하여 한 발 물러서주었다. 이에 대한 화답으로 오리엔 국왕 또한 공작에 대한 신뢰를 표현했다.
이는 브리튼 공작이 권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이 오리엔 국왕이 브리튼 공작을 계속 최측근으로 두고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다음날, 오리엔 국왕은 발표했다.
할튼 백작을 총사령관으로 한 지원군 10만을 레던 왕국에 급파하겠다고 말이다.
오리엔 국왕의 옥새가 찍힌 명령서는 할튼 백작에게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