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0 회: 경영의 대가 20권 -->
“맞습니다. 거기서 레던 왕국군이 패하게 되면 문제는 심각해집니다. 그 결과도 두 가지 시나리오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말해보시오.”
“일단 레던 왕국군이 패배하더라도 에릭 레던 국왕, 혹은 카록 리간드 후작이 살아남아야 합니다. 제대로 레던 왕국의 구심점이 될 인물은 생존해야 합니다. 그래야 레던 왕국이 완전히 무너지지 않고 계속 저항할 테고, 아국(我國) 또한 군대를 투입하여 함께 혼트 제국군을 몰아냅니다.”
입술이 없으면 이빨이 시린 법이었다.
오리엔 왕국은 어디까지나 레던 왕국을 혼트 제국의 도발을 가로막는 방패박이로 쓰고 싶었다.
온 귀족이 전쟁에 미쳐 있고, 대륙 정복의 망상을 꿈꾸는 카르스 황제가 지배하는 나라와 국경을 직접 맞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에릭 국왕, 리간드 후작, 그리고 지렌 왕자까지 모두 죽는 것이 가장 최악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뿔뿔이 분열된 레던 왕국의 잔여 세력은 혼트 제국군에게 짓밟힐 것이고, 카르스 황제의 대륙정복을 막아야 하는 것은 아국(我國)의 임무가 됩니다.”
“황제는 구심점이 될 만한 인물을 전부 죽이려 들 테고.”
“물론입니다.”
결국 현재 시점에서 오리엔 국왕이 취할 선택지는 두 가지인 셈이었다.
첫째, 지금 당장 군대를 투입해 레던 왕국을 돕느냐.
둘째, 아니면 보다 관망하면서 두 나라가 공멸하기를 기다리느냐.
첫 번째 선택은 안전을 꾀한 결정이다.
레던 평원 전투에서 카르스 황제가 패한다 해도 혼트 제국이 당장 몰락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에릭 국왕이 패하면 레던 왕실은 즉시 무너질 공산이 컸다.
당장 10만 이상의 병력을 투입해서 레던 왕국을 돕는다면, 최악의 경우 에릭 국왕이 전사한다 해도 레던 왕국의 잔여 세력과 연합하여 혼트 제국군을 막아낼 수 있다.
어찌 되었건 전쟁은 이곳 오리엔 왕국이 아닌 레던 왕국의 영토에서 치러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리엔 국왕을 갈등하게 하는 것은 두 번째 선택이 성공했을 시에 얻을 수 있는 크나큰 이득 때문이었다.
레던 왕국과 혼트 제국이 함께 몰락하면 오리엔 왕국은 어부지리로서 다시 대륙 중서부의 패권을 거머쥘 수 있는 것이다.
‘전에도 이 비슷한 선택의 기로가 있었지.’
에릭 국왕이 막 왕위계승을 놓고 2왕자 세력과 내전을 벌였을 때였다.
그때 오리엔 국왕은 결단을 일찍 내리지 못해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하였다.
뒤늦게 2왕자의 편을 들며 개입하려 했지만, 전황은 이미 직접 전장에서 앞장서 싸우며 강한 리더십을 보인 에릭 국왕에게 유리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오리엔 왕국의 뒤늦은 개입은 가만히 상황을 관망하던 육제후를 자극했다.
고(故) 볼프강 란즈헬 백작은 즉각 에릭 국왕 진영에 가담하여서 2왕자 잔당 세력을 남김없이 소멸시켰다. 오리엔 왕실이 개입해서 상황을 어찌 반전시키기도 전에 신속하게 행동해버린 것이었다.
아무런 소득 없이 군대를 물려야 했던 오리엔 국왕이었다.
그것은 쓰라린 기억이었다.
결단력 부족이라는 멍에가 씌워졌으니 말이다.
‘그건 정말 억울한 일이지. 결단을 내리는 데 실패한 건 사실이지만, 난 그렇게 마냥 우유부단한 사람은 아닌데 말이지.’
생각해보라.
우유부단하고 결단력 부족한 군주가 적대파벌을 닥치는 대로 숙청하고 절대왕권을 거머쥘 수 있었겠는가?
오리엔 국왕은 다만 일생의 대부분을 내정(內政)에 치중하느라 국외정치에 대한 감각이 떨어져 있었을 뿐이었다.
지금의 오리엔 왕실 정계의 판도는 오리엔 국왕이 이루어놓은 가장 큰 업적이었다.
일찌감치 반대파벌을 없애나가며 왕위계승권을 안정적으로 확보했고, 탈 없이 왕위를 계승한 후에도 왕권에 대항할 수 있는 귀족세력이 발호하지 않도록 차단하는데 힘썼다.
그 과정에서 가장 큰 역할을 한 브리튼 공작가는 오리엔 왕국 최고의 대가문으로 성장했지만, 거기에 대한 안전장치도 안배해두었다.
바로 대마법사 레이몬드 후작을 브리튼 공작과 함께 최측근으로 둔 것.
오리엔 국왕 아래에서 브리튼 공작과 레이몬드 후작이 동등한 힘을 갖도록 양강구도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2인자의 힘을 분산시키면서 오리엔 국왕은 계속해서 최고 통치자로서의 권력을 유지한다.
그것이 오리엔 국왕의 내정 능력으로 마련한 결과였다.
브리튼 공작 또한 욕심이 과한 남자가 아니었고 또한 현명했기에 오리엔 국왕의 의중을 깨닫고 그에 순순히 따라주었다. 그 덕분에 오리엔 왕국은 레던 왕국과 달리 정치적 상황이 상당히 안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게 꼭 옳은 판단만은 아니었다.’
오리엔 국왕이 실수한 부분은 바로 레이몬드 후작이었다.
대마법사.
우주의 진리를 탐구하는 마법사라는 족속들의 특성을 오리엔 국왕은 미처 염두에 두지 못했다.
애당초 브리튼 공작가에 대한 견제장치였건만, 레이몬드 후작은 권력 같은 것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물론 오리엔 국왕이 신임하고 브리튼 공작이 그를 충분히 존중하니, 현 세대에서 양강구도는 유지될 것이다. 그 누가 대마법사를 무시할 텐가?
하지만 오리엔 국왕이 염려하는 것은 자신의 다음 세대였다.
브리튼 공작가는 라엘이라는 훌륭한 후계자를 키웠다. 또한 깊이 뿌리 내린 가문의 힘도 있으니, 불후의 천재인 브리튼 공작의 은퇴 후에도 계속해서 권세를 유지할 것이다.
하지만 레이몬드 후작은 세력 기반을 만들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다. 마법사 세력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브리튼 공작가를 견제하는 역할을 하기를 원했는데 말이다.
뿐만 아니라 레이몬드 후작의 뒤를 이을 만한 대마법사의 재목도 없었다.
제자는 여럿 키우고 있었지만 그중 특출하게 차기 대마법사로 등극할 만한 인물은 나타나지 않았다.
레이몬드 후작이 은퇴하면 그걸로 끝이다. 브리튼 공작가는 라이벌이 없는 2인자가 될 것이고, 결국은 오리엔 왕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게 된다.
‘이대로 내가 죽고 나면 라엘 브리튼은 국왕보다 더 강력한 권력자가 되겠군.’
절대왕권의 확립에서 나라의 안정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신념을 위해 평생을 살았는데, 그 결과물이 자신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그처럼 허망한 일이 어디 있을까?
가뜩이나 그러한 점이 고민이었는데, 여기에 부채질을 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오리엔 왕실 원군의 사령관으로 출정한 라엘 브리튼 자작이 레던 왕국에서 국왕 급의 귀빈대우를 받고 있다는 정보가 들려온 것이다.
권력 싸움이라면 도가 튼 오리엔 국왕은 그게 레던 왕실이 꾸미는 꿍꿍이임을 알아차렸다.
그쪽도 혼트 제국군과 싸우는 중에 오리엔 왕국에게 어부지리를 당할까봐 이런 공작을 꾸민 것이리라.
브리튼 공작가의 후계자 라엘을 일부러 국왕 급 인사로 띄워주며 오리엔 국왕의 경계심을 자극하는 속셈 말이다.
그 정도의 모략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은 오리엔 국왕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모략이 효과를 거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레던 왕국에서 극진한 대우를 받는 이상, 라엘은 좋든 싫든 그 대우에 걸맞은 격(格)을 갖게 된다.
벌써부터 이런 대접을 받는데, 전쟁에서 큰 공훈을 세우고 개선하면 어찌 될까?
‘그리 되면 너무 성장이 빠르다.’
라엘이 결국 브리튼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성장하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레던 왕실 놈들의 모략 때문에 예정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하게 되었다.
‘대체 이 모략이 어떤 놈의 작품이지? 무슨 속셈인지 알아도,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약점을 제대로 찔렀어. 카록 리간드인가? 아니야, 그 친구 머리에서 나왔다고 하기에는 조금 음험하군. 아마도 재정부상서 루이 콘체른 자작이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