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6 회: 경영의 대가 20권 -->
미지의 적과 싸우는 것은 분명 부담되는 일이다. 하지만 직접 만나 봐도 속을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더 부담이 큰 것이다.
“리간드 후작.”
이번에는 뮤트 공작이 나를 불렀다.
“예, 공작 전하.”
“마음을 단단히 먹게.”
“물론입니다.”
“볼프강 란즈헬 백작을 기억하는가?”
“어떻게 그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겠습니까?”
“자네가 판을 벌인 바덴 강 통행세 협상에서 란즈헬 백작은 카르스 황제와 모략으로서 불꽃 튀는 대결을 펼쳤네. 황제는 10만 군세를 동원했고, 란즈헬 백작은 거금을 퍼부어 유목민족의 반란을 유도했지.”
“기억합니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때의 일은 충격의 연속이었다.
내가 겨우 통행세를 하향 동결해 육제후를 압박한다는 계산만 하고 있었을 때, 카르스 황제의 통찰력은 이미 유목민족 통합에 이은 대륙 정복 전쟁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그렇게 두세 수 앞을 내다보는 카르스 황제의 계산을 따라잡을 수 있었던 유일한 인물이 란즈헬 백작이었다.
“하지만 결국 승자는 카르스 황제였네. 그 이유는 자네도 알겠지?”
“네, 결국 황제는 실력으로 반란을 깔끔하게 진압했습니다. 육제후의 두뇌의 모략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던 강함의 영역이었지요.”
“오늘 황제를 직접 보고서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네.”
“황제에게서 무엇을 느끼셨습니까?”
내 물음에 뮤트 공작은 고개를 저었다.
“카르스 황제는 여전히 나에게는 아무것도 알 수가 없는 사내였네.하지만 대신 륭겐 후작의 기세에서는 이전과 다른 느낌을 받았네.”
“…….”
“전에 나와 일전을 겨뤘을 때는 죽음을 각오한 극단적인 투지를 풍겼었는데, 지금은 분위기가 사뭇 다르네.”
“공작 전하께 한 번 패배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 정도로 주눅이 들 작자가 아니지. 지금의 륭겐 후작에게서는 무인보다 군인으로서의 느낌이 더 강하게 들었네. 나를 바라보는 눈빛에서, 무언가 준비해온 것을 보여주겠다는 기대감이 강했지. 또다시 생사를 걸고 싸우자는 막다른 투기가 아니었어.”
“무언가 준비해온 것이 있겠군요.”
“빗방울이 바위를 뚫듯이, 라는 말을 기억하나?”
“네.”
“아마 그걸 시도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네.”
“예?”
“카르스 황제만한 남자가 통행세 협상 때부터 이날의 싸움을 준비해왔다면, 전설로만 알려진 수백 년 전의 용병술을 재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
“…….”
실은 나도 같은 예감을 느꼈다. 언제나 예상을 넘어서는 행보를 해왔던 카르스 황제였으니까.
“호락호락 당해줄 생각은 없지만, 만약 그게 실현된다면 가장 먼저 당하는 것은 내가 지휘하고 있는 영주 연합군이 될 걸세.”
지휘체계가 급조된 영주 연합군은 조직력이 약하기 때문에 적의 능수능란한 교란에 유연하게 대응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빈틈이 쉽게 드러날 것이고, 그곳을 황제는 정확하게 파고들리라.
“영주영합군의 진열과 함께 질서가 무너지면, 아군 전체의 붕괴로 이어질 공산이 크지. 만약 그런 상황이 온다면, 리간드 후작 자네가 나서줘야겠네.”
“제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황제의 예상을 넘어서는 비상식의 수단이 있다면 바로 자네의 정령술뿐일세. 그걸로 아예 이 판을 엎어버리게.”
“네?”
“나도 지휘관으로서 호락호락 당할 생각은 없네. 하지만 전쟁에서 이기려면 자네가 해내야 해.”
“판을 엎는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공작 전하.”
“카르스 황제의 전술대로 아군이 붕괴하면, 자네 또한 정령술로 적의 질서를 붕괴시키게. 아군과 적이 모두 질서를 잃으면 난전이 될 걸세. 그렇게 되면 승기를 잡을 수 있어.”
나는 뮤트 공작의 말에 상당히 놀랐다.
뮤트 공작 또한 그 짧은 시간에 최후의 순간을 대비해왔다니! 보통 비범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은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로 생각이 깊은 인물일 줄은 몰랐다.
“개전 후 초반에는 적의 마법병단이 자네의 정령술을 필사적으로 억압할 걸세. 일단은 묵묵히 참고 있다가 중반부터 승부에 나서게. 아군의 영주 연합군이 혼트 제국군에게 무너지기 시작하면, 그때가 바로 자네가 나설 타이밍일세.”
“명심하겠습니다.”
역시 연륜의 뮤트 공작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이번 전투에서 내가 무슨 역할을 해야 하는지 조금은 막연한 감이 없지 않았다. 그저 정령술로 아군을 보호한다는 정도의 생각밖에 없었다.
하지만 뮤트 공작은 내가 정령술로 승리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 가이드라인을 확실하게 잡아준 것이다.
역할이 분명하게 잡히자 불안감이 다소 사라졌다. 뮤트 공작이 그린 승리의 밑그림이 나를 안심시킨다. 뮤트 공작의 리더로서의 역량이 얼마나 훌륭한지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전투를 앞두고 병력 배치가 이루어졌다.
뮤트 공작이 이끄는 영주 연합군 8만여 병력은 중앙.
에릭 국왕의 왕실군 12만은 좌익.
라엘의 오리엔 왕실 원군은 우익.
전력 분포가 좌측으로 기울어진 기이한 모양새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영주 연합군은 조직력이 너무 약해서 다양한 병진(兵陣)을 구성할 수 없다. 그러니 어떤 상황이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왕실군과 오리엔 왕실 원군이 좌우에서 커버해줘야 하는 것이다.
나는 좌익에서 에릭 국왕과 함께 있었다.
가장 중요한 사람은 총사령관인 에릭 국왕이다. 어떤 상황이 벌어져도 최우선시 해야 하는 일은 에릭 국왕의 보호였다.
“이만하면 야전을 대비해서 훈련한 보람이 있군. 그렇지 않으냐, 재상?”
“그렇습니다, 폐하.”
“하지만 모양새만 잘 갖춘 것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다. 적은 12만.우리는 26만. 분명 겉보기에는 우세해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아.”
에릭 국왕이 계속 말했다.
“영주 연합군과 오리엔 왕실 원군과 우리가 합쳐야 비로소 26만이다. 각각은 카르스 황제의 군대보다 다수가 아니야.”
“세 군대가 잘 연계되지 않으면 병력의 우위가 소용없다는 말씀이시군요?”
“그렇다.”
에릭 국왕은 고개를 끄덕였다.
“연계되지 않고 제각각 따로 싸우면 적보다 병력이 많은 보람이 없어. 더군다나 적은 기동력에서 훨씬 유리하지. 필시 아군을 세 개로 쪼개서 각개격파하려 들 것이다.”
“…….”
“전투 초반에는 괜찮지만, 중반 이후로 흐르면 자연히 아군의 약점인 조직력이 불거지겠지.”
“뮤트 공작 전하께서도 같은 말을 하셨습니다.”
“공작이 뭐라고 하더냐?”
“중반 이후로 아군의 조직력이 무너지면, 제가 정령술로 적의 질서를 붕괴시켜 난전을 유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과연 뮤트 공작이군. 지당한 판단이야.”
에릭 국왕은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전쟁에 일가견 있는 에릭 국왕도 뮤트 공작과 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리간드 영지에서 분투를 하고 있는 베일도 똑같은 소리를 했었지?
“아무튼 제 생각에는 주군의 활약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어떤 대책을 마련했든 임시방편일 겁니다. 그걸 극복하고서 활약을 하신다면, 아마 황제를 당혹시킬 유일한 사람이 될 겁니다.”
베일, 이 대단한 녀석.
넌 거기서 이 상황을 내다봤구나.
하지만 말이지, 난 내 어깨에 지워진 짐이 너무 무겁잖아. 왜 다들 나를 기대 어린 눈길로 보는 거야?
대정령사이니, 레던의 현자이니, 그런 건 다 멋대로 부르는 말이잖아.
나도 사람이란 말이야. 전생 땐 일개 상인으로 늙어 죽었던 평범한 인간이라고.
“제발 힘내세요. 당신은 할 수 있어요.”
사랑스런 목소리가 문득 뇌리에 떠오른다.
“당신은 카록 리간드이니까요.”
그만 뜬금없이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에릭 국왕은 그런 날 의아하게 쳐다봤지만 별 질문은 하지 않았다.
줄리아, 네 말이 맞아.
힘낼게.
난 카록 리간드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