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2 회: 경영의 대가 20권 -->
함께 걷던 베일이 웃으며 대꾸했다.
“파오니 남작님의 실력은 이미 혼트 제국군도 알고 있을 정도로 입증되었으니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섭섭하긴. 내 명예 따위보다는 아군 병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살아남는 것이 기뻐.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이길 수 있게 된 건가?”
“주군께서 텍스 강까지 막으신 덕분에 다시 범람이 시작되었고 전장의 토양이 혼트 제국군의 용병과 보급을 제한시키게 되었습니다. 승률은 다소 올랐지요.”
“이긴 것이나 다름없다고는 말해주지 않는군.”
베일은 쓴웃음을 지었다.
“엄밀히 말해서 승리는 처음부터 불가능하다는 가정 하에 시작된 싸움이었습니다. 우리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최대한 오래 리간드 영지를 지나는 혼트 제국군을 붙잡아두는 것이었죠.”
혼트 제국군의 엄청난 대병력을 상대로 승리란 언감생심. 전략 수립 단계부터 고려하지 않았다.
베일이 짠 전략의 목표는 최대한 오래 버티기. 얼마나 오랫동안 적의 발을 붙잡아둘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붙잡아둘 수 있으면 좋겠지만, 싸움이 시작되면서 저는 그게 불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롬펠 대공 군단은 예상보다 더 강력했고, 싸움은 계획보다 빠르게 진행되었지요. 그런데 이제는 가망이 생겼습니다. 카르스 황제와 에릭 국왕 폐하께서 최종결전을 앞두고 있고, 진흙탕이 된 땅이 굳기를 기다렸던 롬펠 대공 군단의 결정은 실패했지요. 단, 문제는…….”
“롬펠 대공이라는 작자가 얼마나 괴물일지가 관건이겠군.”
“맞습니다.”
베일은 한숨을 쉬었다.
베일은 주어진 객관적 사실을 토대로 승리를 얻고자 하는 계산적인 전략가.
그러나 롬펠 대공과 바스크, 릭 부자의 대결은 그 결과를 아무도 추측할 수 없다.
베일이 어떻게 수를 쓰든 간에, 그 대결에서 쿤트 부자가 패배하면 싸움도 패한다.
수심이 깊어진 베일을 파오니 남작이 위로했다.
“자자, 손 쓸 도리가 없는 일은 걱정을 해봐도 소용없네. 그냥 다 잊어버리고 우린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만 집중함세.”
“네, 남작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혼트 제국군은 총공세를 준비하고 있었고, 제 3 요새는 폭풍전야의 긴장감에 휩싸인 상황.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한 악전고투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
후디니 백작령으로 돌아온 나는 에릭 국왕을 알현해 리간드 영지 상황을 보고했다.
“리간드 영지군은 아직 전의가 죽지 않았군.”
“예, 폐하. 불리한 싸움을 이어오고 있지만 군대의 사기는 아직 높습니다.”
“그렇다면…….”
에릭 국왕은 최종적인 결정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고민에 잠겼다.
루이, 제론, 헤이젤 듀론 자작, 뮤트 공작, 그리고 오리엔 왕실 원군의 사령관 라엘 등은 에릭 국왕의 말을 기다렸다.
에릭 국왕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믿어줘야지. 지금껏 롬펠 대공이라는 강한 적을 상대로 잘 싸워온 이들이다. 그들을 믿고, 우리도 이제 우리의 싸움을 시작해야 한다.”
에릭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싸운다! 출진 준비가 끝나는 대로 카르스 황제를 향해 진격한다. 머뭇거려봐야 좋을 게 없다. 리간드 영지가 아직 버텨주고 있을 때 빨리 승부를 봐야 한다. 전군에 알려라. 출진이다!”
“예, 폐하!”
모두가 예를 갖추어 대답했다.
카르스 황제의 초대장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전생 시절, 대륙의 절반을 휩쓸면서 야전에서는 단 한 번도 져본 적이 없었던 카르스 황제.
전생 시절, 카르스 황제에게 패망한 바 있었던 에릭 국왕이 이제 그때와는 다른 상황에서 다시금 대결을 펼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얼마나 할 수 있을까?
전생 시절에 한 번 경험했던 운명을 얼마나 거스를 수 있을까?
나에게, 카록이라는 인간에게 그런 힘이 있을까?
알현을 마치고 가족들이 기다리는 숙소로 돌아온 뒤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전쟁 내내 나를 괴롭힌 고뇌.
“어쩌면 내 노력들이 다 부질없는 게 아니었을까?”
대흉년을 미리 대비하여서 쿤트 영지와 레던 왕실의 피해를 대폭 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대흉년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국 대흉년은 전 대륙을 강타하여 인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흑혈병에 미리 대비하여 작셀 약초를 잔뜩 모았다. 레던 왕실 역시 흑혈병에 대비하여서 피해를 줄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흑혈병이 오지 않은 것은 아니다. 결국은 흑혈병이 전 대륙을 휩쓸어 많은 사람을 피 토하며 죽게 했다.
대흉년과 흑혈병이 바로 운명이다.
내가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이번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다. 오리엔 왕실과 동맹을 맺어서 혼트 황실을 견제했고 육제후의 네 가문을 왕실에 협조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카르스 황제는 전쟁을 수행할 기반을 얻어 대군을 일으켰다.
물론 전생과 비교하면 전황이 많이 유리하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우리가 패하고 카르스 황제가 승리한다면 결국 레던 왕국의 패망은 거스르지 못하는 운명 중 하나였던 셈이 된다.
그게 겁난다.
우리의 패배가 운명일 까봐…….
롬펠 대공과 아버지, 릭 형님의 대결 역시 내 마음을 괴롭힌다.
전생 때 릭 형님은 전사했었다.
롬펠 대공과의 대결로 인해 릭 형님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게 릭 형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결국 바뀐 게 아무것도 없게 되잖아!”
나는 자신도 모르게 테이블을 걷어차 버리며 화를 냈다. 테이블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쓰러졌다.
“여보? 무슨 일이에요?”
그 소리를 듣고 시스와 줄리아가 내 방으로 달려왔다.
아…….
내가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감정적인 행동으로 가족에게 걱정을 끼치다니. 열여덟 살로 회귀한 이후로 한 번도 저지르지 않았던 행동이었다. 정신연령으로 100살을 내다보고 있는 나로서는 스스로도 놀랄 일이었다.
시스와 줄리아가 걱정스런 얼굴로 날 보고 있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줄리아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는 안다.
이럴 때 ‘별 거 아니야’라는 대답으로 얼버무리면 안 된다는 것을.
그러면 아내들은 나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가 없게 된다. 무슨 일인지 모르는 걱정은 어떤 문제인지 알고 걱정하는 것보다 훨씬 괴롭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곧 황제와 마지막 일전을 겨루게 될 거야. 거기서 이길 수 있을지 걱정이 돼서 나도 모르게 그랬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
“미안하긴요.”
줄리아는 옆에 앉아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시스도 반대편에 앉아 나를 안는다.
줄리아가 말했다.
“어깨에 얹어진 부담이 아주 큰 것 알아요.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결과를 놓고 미리 걱정해봐야 소용없잖아요.”
“……결과를 알고 있다면 어떨까?”
“네?”
“너희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6장. 마지막 전장으로
“열여덟 번째 생일을 맞아 성인이 되기 하루 전의 일이었어.”
나는 내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비밀을 아내들에게 털어놓으려고 한다.
물론 완전히 털어놓을 수는 없다. 늙어 죽었다가 다시 되살아나 과거로 돌아왔다는 소리는 할 수 없지. 그런 말을 믿을 리도 없고.
“그날 꿈을 꿨어. 정말 이상하고…… 긴 꿈이었어.”
“어떤 꿈?”
시스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내가 평범한 상인으로 90살까지 살다가 늙어 죽은 꿈이었어.”
“평범한 상인으로요?”
줄리아는 쿡쿡 웃었다.
나는 미소를 지으며 줄리아와 시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응. 그런데 그 꿈이 너무 생생해서 정말로 90년의 인생을 전부 다 살고 난 기분이었어. 꿈에서 깨어났을 때, 난 막 성인이 된 열여덟 살짜리 애송이였지만, 이미 인생의 모든 회한을 다 겪은 뒤였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