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1 회: 경영의 대가 20권 -->
5장. 고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롬펠 대공의 오른팔이자 참모인 말버린 자작은 자신의 눈에 보이는 풍경에 너무도 놀라 할 말을 잃었다.
제 3 요새.
리간드 영지군이 최후의 보루로 삼은 목조 요새가 하루아침에 변했다.
목조(木造)가 아닌 석조(石造)로 말이다! 요새의 목책이 단단한 흙벽으로 뒤덮여 마치 돌을 쌓아 지은 성벽을 연상케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다시 텍스 강이 범람하여서 일대가 물에 젖어 들고 있었다. 이제야 조금씩 마르기 시작했던 땅이 다시 진흙탕으로 변해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어젯밤에 정찰을 맡았던 책임자를 불러와라!”
“들을 필요도 없다.”
거대한 체격을 가진 위풍당당한 풍채의 노인이 불쑥 다가와 한마디 했다. 롬펠 대공이었다.
“대공 전하!”
“카록 리간드가 해놓은 짓거리다.”
그 말에 말버린 자작은 화들짝 놀랐다.
“카록 리간드?! 그자가 이곳에 왔단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자가 리간드 영지군과 합류했다면 큰일이 아닙니까!”
말버린 자작의 표정이 딱딱해졌다.
레던의 현자, 황제가 유일하게 경계하는 적, 그리고 네 정령을 자유자재로 부리는 대정령사!
지휘관으로서 그처럼 무서운 적이 없었다. 상급 정령술은 상식을 마음대로 파괴하는 탓에 종잡을 수 없는 변수가 되기 때문이다.
롬펠 대공은 껄껄거리며 말버린 자작의 등을 탕탕 쳤다.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다. 그 친구는 새벽에 떠났거든.”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안도한 말버린 자작은 이윽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그런데 대공 전하께서는 그것을 어찌 아시는 겁니까?”
“응? 내가 말 안 했던가? 난 정령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다.”
“정령의 기운을 말입니까?”
“그래. 전에 카록 리간드의 저택에 놀러갔을 때 요령을 터득했지.”
말버린 자작은 이 110살 먹은 거구의 노인에게 경이로움을 느꼈다.
혼트 황실과 마법병단이 막대한 연구비와 시간을 들였음에도 실패했던 일을 롬펠 대공은 아무렇지 않게 해낸 것이다.
“그렇다면 리간드 영지의 전황을 확인해보기 위해 잠시 들른 것이로군요. 이쪽의 방어선이 무너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걸 레던 왕실도 알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말버린 자작은 흙의 벽으로 뒤덮여 단단해진 요새의 외벽과 진흙탕이 된 땅을 보며 치를 떨었다.
“그냥 하루 방문한 김에 한 장난질치고는 퍽 우리를 곤란하게 만들었습니다.”
“땅이 굳기를 기다린 것이 허사가 되었으니 말이지. 하핫, 정령술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었군.”
롬펠 대공은 호탕하게 웃었다.
“웃으실 일이 아닙니다. 이러다가 정말로 아군이 적의 의도대로 이곳에서 발목이 잡힙니다.”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니지.”
“예?”
롬펠 대공이 말했다.
“이곳의 상황이 우리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했다면, 레던 왕실은 폐하와 야전에서 일전을 겨룰 엄두를 내지 못할 게다.”
“아……. 그건 그렇습니다만…….”
“폐하께서 12만 병력을 이끌고 나서신 순간부터, 승부를 결정지을 권한은 우리의 손을 떠난 거다.”
“대공 전하, 하지만 우리가 리간드 영지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레던 왕실의 뒤를 친다면 승리는…….”
“그래그래, 이론적으로 네 말에 틀린 점은 없지만 말이다. 사람 일이니까 조금은 감상적으로 생각해보지 그러냐?”
“무슨 뜻인지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우리의 젊은 황제 폐하의 머릿속에서 애당초 우리들은 어찌 되었든 상관없었다는 뜻이다.”
“…….”
“단지 방해꾼을 치워버리고 진짜 무대를 마련하기 위한 포석일 뿐이다. 카이슨 후작은 육제후의 네 가문을, 우리는 어떤 변수가 될지 모르는 쿤트 부자를 묶어놓은 포석이지.”
“폐하께서는 본인의 손으로 직접 전쟁을 결정 짓고 싶어 하신다는 것이로군요.”
“그래.”
“……하지만 그 황제 폐하시잖습니까. 그렇게 냉정하고 객관적인 분이신데, 그런 감정적인 생각을 하실 거라고는 상상되지 않습니다.”
“너 말이다, 폐하가 어떤 사람으로 보이냐? 정말로 인간으로서의 모든 감정을 상실한 괴물로 보이냐?”
“솔직히……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가 없잖습니까? 그분을 만나면 누구라도 말입니다.”
“그래. 겉보기에는 그렇지. 하지만 폐하께서도 결국은 인간이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인간에게 어찌 감정이 없을까.”
“대공 전하께서는 그렇게 느끼셨습니까?”
“그렇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롬펠 대공은 아련히 과거를 회상하며 말했다.
“슬픔, 증오, 끝없는 고통에 마모되어 닳아 없어진 듯한 인간으로 보였다. 그런데 그런 폐하께서 딱 하나, 전쟁에 있어서는 엄청난 열정을 보이더군. 단순한 이야기다. 자신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유일한 열정과 보람을 남의 손에 맡기겠느냐?”
“열정 말입니까…….”
말버린 자작은 롬펠 대공의 말을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그 역시 카르스 황제를 본 일이 있었다.
뜨겁게 타오르는 다혈질도, 얼음장처럼 차가운 냉혈한도 아닌 아무것도 없는 무표정. 세상에서 가장 높은 권좌에 앉은 그 청년은 인형 같기도 하고 신 같기도 했다.
황제의 열정?
그런 것은 보지 못했다.
하지만 롬펠 대공은 누구보다도 많은 것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가 그렇게 말한 이상 말버린 자작은 믿는 수밖에 없었다.
“허탈해지는 이야기로군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싸우든 폐하께서는 상관하지 않는다는 게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 없다. 폐하께서 꼭 승리한다는 보장도 없지. 만에 하나의 경우 우리의 역할이 커진다. 게다가…….”
롬펠 대공은 멀리 떨어진 제 3 요새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언제 어디서나 주인공이고 싶은 나이는 지난 지 오래다. 폐하의 손에 달린 승부가 있듯,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승부가 있다. 나는 만족한다. 폐하께서도 나를 위하여 아주 좋은 대결을 주선해주시지 않았더냐.”
이 순간, 롬펠 대공의 머릿속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직 두 사람. 바스크 쿤트 백작과 릭 페르난도 백작 부자였다.
‘사실 가장 싸우고 싶었던 상대는 카록 리간드였지. 그런 인물은 적수로 마주쳐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폐하께 양보해드려야지. 폐하께서 유난히 좋아하는 친구니까 말이야.’
***
리간드 영지군의 사기는 크게 고무되어 있었다.
리간드 영지의 주인이자 영지민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카록 리간드 후작이 하루 다녀간 것만으로도 그 정도의 영향이 발휘되었다.
하물며 카록 리간드 후작이 하룻밤 사이에 일으킨 기적은 놀라울 정도였다.
요새의 목책이 단단한 흙벽으로 변모되어 있었다. 요새를 둘러싼 목책을 흙으로 뒤덮은 뒤, 오러로도 쉽게 부술 수 없도록 단단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정령술로 빚어진 성벽은 방어력이 이전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보다 높아졌고, 나이프가 박혀들지 않을 정도로 단단해졌다. 뿐만 아니라 물에 젖거나 불에 타지도 않는다.
“그분은 정말 건축가의 노력을 무색하게 만드시는군.”
파오니 남작은 하루아침에 뒤바뀌어버린 요새를 둘러보며 투덜거렸다.
건축가로서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최대한의 방어력을 이끌어낸 요새였다. 그런데 카록은 단 하루 만에 정령술로 조화를 부려서 요새의 약점을 보완해버렸다.
한정된 자원과 인력과 시간으로 최대한의 성과물을 만들어낸 파오니 남작의 예술적 설계가 허망해진 순간이었다.
함께 걷던 베일이 웃으며 대꾸했다.
“파오니 남작님의 실력은 이미 혼트 제국군도 알고 있을 정도로 입증되었으니 섭섭하게 여기지 마십시오.”
“섭섭하긴. 내 명예 따위보다는 아군 병사가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이 살아남는 것이 기뻐. 그런데 이제는 우리가 이길 수 있게 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