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경영의 대가-509화 (509/529)

<-- 509 회: 경영의 대가 20권 -->

4장. 믿음

해가 떠 있는 동안 나는 제 3 요새의 곳곳을 다니며 시설과 병사를 살폈다.

다행히 병사들은 다수의 적을 상대로도 그리 겁먹은 눈치가 아니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이런 상황을 가정한 훈련을 치렀고, 그때 받은 훈련대로 싸우고 있는 것이니 병사들의 심리적인 상태는 매우 안정되어 있었다.

본래 사람 심리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직면했더라면 크게 당황하여 정신적으로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상황은 베일의 예측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전쟁에 있어 전략가의 가치란 바로 이런 점이었다.

베일의 빼어난 능력에 마음이 든든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함도 느껴졌다.

문득 카르스 황제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정신병자야말로 누구보다도 오래 전에 지금의 전황을 예상했을 것이 아닌가.

어찌 되든 결국은 유목민족 기병 위주의 군대로 레던 왕국의 주요 전력을 깨부순다.

이 테마가 카르스 황제의 머릿속에 처음부터 있었을 터.

아마 지금 카르스 황제가 데리고 있는 12만 병력은 처음부터 엄선된 전력일 것이다. 승패를 판가름할 야전을 가정하고 수없이 훈련 받았을 것이다.

카르스 황제가 구상한 고차원적인 용병술을 수없이 반복 훈련한 끝에 완전히 숙달된 정예!

과연 그런 적을 상대로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날이 저물 즈음, 베일이 찾아왔다.

나는 베일에게 내 고민을 털어놓았다. 내 고민을 듣고 난 베일은 뜻밖에도 미소를 짓는 것이었다.

“주군의 말씀대로, 저희는 오랫동안 이 상황을 가정하고 훈련한 덕에 엄청난 숫자의 혼트 제국군을 상대로 이만큼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제가 가장 무서워할 적이 누구겠습니까?”

“……롬펠 대공?”

“그렇습니다.”

그러면서 베일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에게 등용되고 영주대리에 임명되기까지 하면서 출세한 베일은 큰 책임감을 느끼고 한 번도 배운 적이 없었던 군사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 번도 배움이 없었던 베일에게 그것은 색다른 즐거움이요 기쁨이었다고 한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배워나가면서 베일은 신세계를 보았다. 산적두목 시절에 자신이 해왔던 일들이 군사학적으로는 어떻게 유효한지도 깨달았고, 베잘리우스 대공 같은 위대한 전략가의 활약상도 배우면서 크게 감탄하였다.

“지휘관의 용맹이 큰 비중을 차지하던 전쟁은 크로센트 베잘리우스의 등장으로 인해 양상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그만큼 병약한 인물이었던 베잘리우스 대공의 활약이 너무나도 대단했기 때문이지요.”

그랬지.

그 병약했던 건강상태도 카르스 황제와의 공통점이고 말이다.

“베잘리우스 대공 이후로 전쟁은 군대가 얼마나 체계화되었고 군수물자의 보급이 원활한지에 달리게 되었습니다. 병력과 개인의 용맹보다 물자와 시스템이 전쟁의 승패를 가르게 된 것이지요. 아마 베잘리우스 대공이 지금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그때처럼 굉장한 활약은 펼치지 못했을 거라는 게 중론입니다.”

베일의 말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이 시대에도 오러 마스터와 대마법사는 여전히 엄청난 값어치가 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개인이 강해도 체계적인 지휘체계와 우수한 장비로 무장한 다수를 이길 수 없음이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지요. 왜일까요?”

“일단 싸움이 시작되면 무슨 변수가 일어날지 모르니까. 병사는 도구가 아니라 개개인이 살아 있는 사람이잖아.”

“그렇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전략가도 병사 하나하나의 속마음까지 알지는 못합니다. 그 많은 병사가 서로 뒤엉켜 싸우는 혼란 속에서는 단 한 명의 강자가 어떤 활약을 해서 어떤 변수를 일으킬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물며 롬펠 대공 같은 절세무인은 얼마나 큰 변수겠습니까? 이것저것 논리적으로 계산해야 하는 저로서는 계산 범주에 넣을 수가 없는 롬펠 대공이 가장 무섭습니다.”

그렇겠지.

이쪽은 아버지와 릭 형님이 있지만 그들이 맞대결해서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아마 저쪽 또한 롬펠 대공이 두 사람을 꺾는다고 장담은 못하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불안할 테고.

그래서 양측 모두 쉽사리 세 강자의 대결을 성사시킬 수 없는 것이다.

“그럼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결론에 근접했군요. 카르스 황제는 누구를 가장 두려워할까요?”

“……나?”

“물론입니다. 아마 모든 전략가가 이 대륙에서 가장 두려워할 존재는 다름 아닌 주군이실 겁니다. 롬펠 대공은 그래도 손에 무기를 들고 있으니 어떤 방식으로 싸울지는 알 수 있지만, 주군은 정령술로 무슨 짓을 할지 아무도 모르잖습니까.”

“그야 그렇겠지. 카르스 황제도 마법병단에게 정령술 연구를 시키는 등 정령술 대책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 같았고. 모르긴 몰라도 날 묶어놓기 위해 만반의 태세를 다 갖췄을 거야.”

“아무튼 제 생각에는 주군의 활약에 달렸다고 생각합니다. 황제가 어떤 대책을 마련했든 임시방편일 겁니다. 그걸 극복하고서 활약을 하신다면, 아마 황제를 당혹시킬 유일한 사람이 될 겁니다.”

“이거야 원, 해답을 듣고 싶었는데 어깨만 더 무거워졌잖아.”

“죄송합니다.”

베일은 고개를 숙여보였고, 나는 피식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됐어. 그런데 그보다 날 찾아온 걸 보니 결정을 한 모양이지?”

“예.”

“그럼 말해봐. 내가 뭘 해줄까? 미리 말해두지만 천지를 뒤집어달라는 등의 부탁은 들어주지 못해.”

“그 정도 난이도의 부탁은 아닙니다.”

베일이 말했다.

“파오니 남작과 상의한 결과, 텍스 강을 막아 다시 범람시켜달라고 부탁드리는 편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이 났습니다.”

“아하, 적군이 땅이 굳기를 기다리고 있으니 다시 강을 범람시켜서 진흙탕을 만들면 멋지게 엿 먹이는 셈이군?”

“예. 그리고 가능하면 요새가 범람한 강물에 젖지 않도록 보강해주실 수 있는지도 파오니 남작님이 물어보라 하시더군요. 아무래도 목조 요새다 보니 불은 물론 물에도 약한지라…….”

베일은 너무 무리한 부탁인가 싶어서 내 눈치를 보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할 수 있지. 좀 힘을 써야겠지만 돌아가서 며칠 쉬면 회복되니까 문제없어.”

“감사합니다! 그것만 해주셔도 큰 도움이 됩니다.”

“그것만 해준다면 롬펠 대공 군단을 막을 수 있어?”

단도직입적인 내 물음에 베일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쉬이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리라.

나는, 아니 우리는 확신이 필요했다.

우리가 황제와 승부를 보는 동안, 리간드 영지가 롬펠 대공에게 뚫리지 않고 버텨낸다는 보장이 필요했다. 그래야만이 자신 있게 카르스 황제가 초대하는 전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군사학적으로는 막아낼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만…….”

“전략가들이 계산 범주에 넣을 수 없는 싸움이 관건이군?”

“휴우, 네…….”

베일은 힘없이 대답했다.

결국 베일을 끊임없이 괴롭힌 문제다.

……아버지와 릭 형님이 롬펠 대공과 싸워 이길 수 있는가?

오러 마스터 둘이서 한 명도 못 이기겠냐는 막연한 기대는 더 이상 할 수도 없었다. 제대로 맞붙은 건 아니지만 이미 한 번 아버지와 릭 형님이 패퇴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리간드 영지군이 잘 싸워도 아버지와 릭 형님이 롬펠 대공에게 목숨을 잃는다면 싸움은 패배로 급격히 기울고 만다.

“알았어. 네게 너무 많은 짐을 떠넘겨서도 안 되지. 조금 있다가 아버지와 릭 형님에게도 물어볼게.”

“죄송합니다, 주군.”

“네 마음 알아. 자신 있게 확신을 주고 싶겠지만 책임감 때문에 호언장담을 할 수 없지.”

“…….”

“그만큼 네가 현실적이고 냉정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지. 내가 널 신뢰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주군…….”

베일은 내 말에 또다시 감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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