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8 회: 경영의 대가 20권 -->
“에이, 뭘 또 겸손 떨고 그래. 네 덕분에 이 나라가 산 것이나 다름없는 상황인데. 콘돌 기병대를 혼트 제국 본토로 침공시킨다는 전략도 네 머리에서 나온 거고.”
딘과 렉스도 이에 호응했다.
“맞습니다, 주군. 영주대리께서 치밀한 전략으로 싸움을 여기까지 이끌어주셨지요.”
“그건 이곳에 있는 모두가 인정하는 부분입죠.”
“다,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베일은 정말로 쑥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는 모습이었다.
나는 그런 베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자.”
“예? 이, 이게 무슨?”
“우리 악수나 하자.”
본래 주군과 수하가 악수를 한다는 것은 예의상 부적절한 일이다. 하지만 뭐 어떠냐?
나는 일개 평민으로 태어났고, 산적 수괴 노릇을 하다가 지금은 나라를 위해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하고 있는 경이로운 남자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누가 그저 호의로 부하로 거둔 베일이라는 이 남자가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활약할 줄을 생각했을까. 역시 모든 인간은 저마다의 큰 가능성을 지녔다는 것을 이렇게 또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일개 상인으로 한평생을 살았던 내가 지금은 나라의 재상이 되었듯이 말이다.
베일은 머뭇거리다가 내 손을 맞잡았다.
나는 그 손을 꽉 잡고 흔들었다.
“고맙다. 네가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주, 주군……!”
베일은 눈시울을 붉히더니 이내 뜨거운 눈물을 흘리고야 말았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은 감격이리라. 나와 딘, 렉스는 눈물을 흘리며 쑥스러워하는 베일을 보며 낄낄거렸다.
그런데 그때,
“이제 다 끝났느냐?”
익숙한 굵은 남자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려 퍼진다. 나는 뒤돌아 그 남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 아버님.”
아버지는 날 보면서 무언가 심기 불편한 얼굴이었다.
그 옆에는 릭 형님도 함께 있었는데, 릭 형님은 아예 심통 맞은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오랜만에 가족이 만났는데 왜 이래?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표정들이 다들 왜 이러십니까? 전에 롬펠 대공한테 깨졌다고 들었는데 그때 어디 다치기라고 하신 건가요?”
“맞고 싶으냐?”
“죽고 싶냐?”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으르렁거리는 아버지와 릭 형님이었다.
“에이, 농담이에요.”
나는 히죽히죽 웃었다.
“폐하를 가까이서 보필해야 할 네가 이곳에는 무슨 일이냐? 네 어깨에 걸린 짐이 결코 가볍지 않은데 사사로운 걱정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은 아니겠지? 아니면 설마하니 이 아비에게 이곳을 맡겨놓기에는 영 미덥지 못하다고 생각한다든지…….”
아버지의 말을 요약하자면, 여긴 우리에게 맡기라고 했는데 믿음이 안 가서 도와주러 왔냐고 불만을 나타낸 것이다.
둘이서 롬펠 대공과 대결해 패한 것도 분한 마당에 나까지 나타났으니 자신의 역량이 역부족으로 평가받았다고 느끼셨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해명했다.
“그럴 리가요. 저는 국왕 폐하의 어명으로 이곳의 상황을 확인하러 왔습니다.”
“폐하의 어명으로?”
“예. 저희는 이제 황제와 야전으로 결판 지을 생각인데, 그 사이에 아버님께서 맡으신 이곳의 방어선이 뚫리기라도 하면 후디니 백작령도 위험해지잖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럼 전갈을 보내셔도 될 것을 굳이 널 보내셨단 말이냐?”
“제가 날아서 다녀오는 편이 가장 빠르니까요. 이렇게 오랜만에 가족이 만나 안부도 물을 겸 해서요.”
“그렇구나. 그렇다면 납득했다. 보다시피 이곳은 아직 문제없다. 놈들도 아직까지는 때만 기다릴 뿐 공격에 나서고 있지 않고 말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베일 경에게 들어라.”
“그러겠습니다. 아, 있다가 저녁에 식사 같이 하실 거죠?”
“그러자꾸나.”
아버지와 릭 형님은 저녁을 기약하고 다시 본래 위치로 가버렸다.
나는 베일에게 물었다.
“적들이 왜 공격을 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거지? 놈들의 상황을 보면 적극적으로 나서도 모자란데.”
“땅이 굳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땅?”
“텍스 강의 물을 둑으로 막고 숲을 불태워서 이 일대를 전부 진흙탕으로 만들었습니다. 롬펠 대공은 그 둑을 무너뜨려 강물의 범람을 막고 질퍽해진 땅이 다시 굳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진흙탕에서 병력을 운용하면 병사들이 금방 지칠 테니까요.”
“오, 그럼 땅이 굳을 때까지 시간을 번 셈이네?”
“예. 상대의 조치가 너무 신속해서 더 시간을 벌지 못한 것이 아쉽지만 말입니다. 아무래도 롬펠 대공의 옆에 좋은 참모가 있는 모양입니다.”
“뭐, 그렇겠지. 나한테도 네가 있는데, 롬펠 대공 같은 거물 곁에 인물 하나 없겠어?”
“또 그런 과찬을…….”
베일은 또다시 쑥스러워한다.
이거 재미있네. 칭찬놀이를 할 때 부끄러워하는 시스랑 비슷한 반응이야. 물론 시스처럼 귀엽지는 않지만.
“아무튼 롬펠 대공 그 노인네도 그냥 막 사는 것 같아도 묘하게 날카로운 구석이 있는 양반이야. 어찌 보면 베일 네가 그 참모보다 더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롬펠 대공인지도 모르지. 롬펠 대공의 날카로움은 상식을 부숴버리기도 하니까.”
그를 처음 만났던 기억을 떠올리며 내가 말했다.
롬펠 대공.
언젠가 나를 찾아온 그 괴물 같은 양반은 정령의 기운을 탐지하는 요령을 깨우치고 말았다. 기사도 마법사도 불가능한 일을 그는 해낸 것이다.
그것은 지혜도 지식도 아니었다. 특출한 감각으로 상식을 깨버리며 내 허를 찔렀다.
그 경험을 통해서 대충 롬펠 대공이 어떤 인물인지 알게 되었다.
전생에 상인으로 살았을 때도 간혹, 아주 간혹 가다 보게 되는 유형!
루이와 제론 같은 논리적인 천재가 아닌 특유의 육감으로 상식을 초월하는 천재였다. 누가 봐도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하는데 이상하게 그걸 성공시키는 타입 말이다.
“싸움이 시작된 초기에 대병력을 동원해 일대의 모든 고지를 동시다발적으로 공략하는 걸 보고 저도 주군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랬구나.”
“아무튼 저희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 맞설 것입니다.”
“우리가 황제와 결착 낼 때까지 버틸 수 있겠어?”
“그건…….”
베일은 쉬이 대답하지 못하고 안색이 어두워졌다. 장담할 수가 없을 만큼 형세가 좋지 않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 까닭이리라.
내가 말했다.
“너무 걱정 마. 내가 왜 굳이 자청해서 이곳에 왔겠어?”
“예?”
“곧 폐하께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 전에 정령술로 도와줄 수 있을 만큼은 도와줄게. 말만해. 내가 무엇을 도와줬으면 좋겠어?”
그 말에 베일은 반색을 하고 물었다.
“혹시 지금 혼트 제국군을 공격해서 큰 피해를 입혀주실 수 있으십니까? 병력 피해보다는 적을 크게 놀라게 해 사기를 꺾을 정도면 됩니다만…….”
“미안. 그건 좀 어렵겠는데.”
“주군의 정령술로도 안 된단 말씀이십니까?”
“보통은 그 정도야 가능했겠지만, 지금 저쪽 사령관이 누군지 잊어버린 거야?”
“……롬펠 대공이지요.”
“그 양반은 무슨 수작을 부린 건지 정령의 기운을 감지하는 요령을 터득해버렸어. 모르긴 몰라도 내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도 알고 있을지도 모르고. 내가 공격을 시도했다간 곧바로 알고 마법사들과 함께 맞상대해오겠지.”
“그렇군요.”
베일의 어깨가 축 쳐졌다.
쯧, 베일 정도면 어디에 내놔도 출중한 전략가인데, 역시 상대가 좋지 않았다.
롬펠 대공이라는 인간은 그 어떤 전략가라도 골치 아파할 괴물딱지인 것이다.
“뭐, 오늘은 이곳에서 묵을 생각이니까 다 같이 상의를 해보고 결정하자고.”
“예, 주군. 오시느라 피곤하셨을 텐데 쉴 곳을 마련해드리겠습니다.”
나는 베일 일행과 함께 요새의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